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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해 1966
기획특별전

일하는 해 1966

A YEAR OF WORK TO MOVE AHEAD

기 간 : 2016.07.19 [화] ~ 2016.08.28 [일]

장 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 09:00 ~ 18:00
  •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 관람문의 : 02-3703-9200

전시를 열며 (Opening Special Exhibition)

전시에 앞서 전시 개요를 소개합니다.
한국의 1966년은 여느 해 못지않게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해입니다. 동서냉전(東西冷戰)의 대립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굳건히 한 가운데 최초로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이 있었고, 많은 군인과 기술자가 베트남으로 향했으며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이 나왔습니다. 또 곳곳에서 건설의 망치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가 초등학교의 교실을 가득 메웠고 훗날의 대표적 수학 참고서와 문예비평지가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50년 전 한국의 각계각층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당대 사람들의 도전과 환희, 일하고자 했던 열정, 시련과 희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도전과 환희Challenge and Euphoria
1966년 6월 25일 밤,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장충체육관에서 한국 복싱 사상 최초로 김기수 선수(1941-1997)가 세계권투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는 현장이 중계방송되었다. 김기수의 도전 상대는 이탈리아 국적의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Nino Benvenuti)였다. 3분씩 15라운드까지 진행된 이 날 경기는 결국 판정으로 승부가 갈렸다. 첫 번째 한국인 부심은 72대 69로 김기수의 우세를, 두 번째 이탈리아인 부심은 68대 72로 벤베누티가 우세하다고 판정하였다. 마지막 미국인 주심의 점수 발표만이 남았다. “벤베누티 68, 김기수 74...” “이겼다!” 김기수의 점수 끝자리는 관중들의 환호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관중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던 국민들은 모두 함성을 터뜨렸다. 김기수 선수가 한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50년 전의 한 여름 밤 풍경이었다.
김기수 선수가 사용한 글러브
1966년의 세계 : 냉전 속의 열전The World in 1966 : Hot War Amidst Cold War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핵전쟁 직전까지 간 미국과 소련은 이후 핵무기 제한 협상을 개시하였다.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한 프랑스는 1966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탈퇴하고 대통령 드골이 소련을 방문하였다. 서독에서는 보수 기민당의 17년 집권이 끝나고 사민당과의 연정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소련과 중국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렇게 냉전의 이완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뜨거운 열전(熱戰)이 벌어졌다. 통킹(Tonkin)만 사건(1964년, 미국의 선제공격 이후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사건)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하였다. 한국·미국·일본의 3각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 참전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휴전선 총격 도발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1966년 미국의 한국군의 증파 요청에 대응해, 우리 정부는 증파 조건을 명시한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를 얻고 백마부대를 베트남에 추가 파병하였다.
민주공화보 화보
고도성장의 궤도진입The Beginning of Rapid Growth
1966년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마지막 해로서 의류, 가발, 합판 등 경공업품 위주의 수출주도공업화의 성과가 뚜렷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포항종합제철, 울산석유화학단지 등 중화학공업도 육성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재정 ·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여 과학 기반도 구축하려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1965년을 ‘일하는 해’로, 1966년은 ‘다시 일하는 해’로 선언하였다.
일하는 즐거움, 일하는 해의 노래 음반, 반공이 따로 없다 이것이 반공이다. 포스터
월남에 간 김상사First Sergeant Kim, a Soldier Sent to Vietnam
1964년 9월 대한민국은 의무병과 태권도 교관 등의 지원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이후 한국은 미국의 계속된 요청으로 1965년 봄 공병대를 보낸 데 이어, 9월 전투부대인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였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추가 파병을 요청하자, 한국과 미국은 1966년 3월, 한국군 추가 파병의 조건으로 한국군 장비 현대화, 차관 제공, 장병의 처우개선 등 14개항을 미국이 약속한 ‘브라운 각서’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한국은 1966년 8월 육군 백마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베트남에는 군인만 파견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기술자와 기업들도 목숨을 걸고 베트남에 진출하여 군수 물자의 하역·운송과 건설공사 및 각종 용역을 제공했다. 베트남에서 우리 군인과 기술자들이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달러는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한국과 베트남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백마부대기, 이인호 해병 소령의 군
선택 1967Choice 1967
1967년은 제6대 대통령 선거(5월 3일)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6월 8일)가 있던 해이다. 이를 앞둔 1966년 집권 민주공화당은 양호한 경제개발의 성적을 선전하면서 조직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이에 반해 야당은 한일협정 비준반대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다가 선거를 불과 석 달 앞둔 1967년 2월에야 단일 야당으로 통합하였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와 재대결에서 큰 표 차로 이겼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이 부정선거 논란을 일으키면서까지 전체 175석 중 개헌이 가능한 129석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 등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괴한의 공격과 경향신문사 강제 매각,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1967년)과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1967년)의 발표가 이어졌다.
민주공화당 '변영에의 도약' 포스터, 신민당 ' 우리는 왜 못사는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변화하는 사회A Changing Society
대한민국의 인구수는 1953년 1천 9백만에서 1966년에는 2천 9백만으로 급증하였다. 만 14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43.9%를 차지한 매우 젊은, 아니 어린 사회였다(2016년의 만 14세 이하 인구 비율은 13.6%). 이와 더불어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도 진행되어, 1960년대 서울 인구는 매년 10%대로 늘어났다. 경제개발에 따라 도시와 농촌 간의 발전 격차가 생겼으며, 도시에서는 주택·교통문제, 빈민문제 등이 심화되었다. 한편, 사회 전반에서는 여러 부패 사건이 끊이지 않았는데, 1966년에는 일명 ‘사카린밀수사건’이라 불리는 한국비료밀수사건이 있었다. 동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교양’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이에 대한 지성계의 역할이 대두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잡지들이 창간되었는데, 1966년 1월 창간된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 대표적이다.
가족계획 포스터, '창작과 비평'창간호, 가리방등사기 필경도구
국민교육National Eduction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교육 정책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학교 시설의 복구와 초등학교 의무교육에 집중되었고, 1960년에 이르면 초등학교에 99% 이상이 취학하였다. 1960년대에는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초등학교에 취학한 결과 교실이 부족해서 세칭 콩나물교실의 과밀학급과 2부제, 3부제 수업이 시행되었다. 또한 1960년대에는 치열한 중학 입시 경쟁이 벌어졌다. 복수정답 논란이 벌어진 1965년의 ‘무즙파동’, 1968년의 ‘창칼파동’도 있었다. 초등학생의 과도한 입시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1969년부터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무시험 추첨제를 실시했다. 1968년에는 「국민교육헌장」이 공포되었고, 각급 학교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국민교육이 강화되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현창(顯彰)사업, 엘리트(Elite) 스포츠 육성 등도 국민교육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수학 1의정석, 양지축구단 유니
쇼쇼쇼Show Show Show
196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일상생활의 변화가 시작되고, 대중문화가 양적·질적으로 성장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교육기회의 확대 속에서 신식결혼이 대중화되었고, 가정에서는 난방을 위해 연탄을, 조리를 위해 석유풍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라디오가 보편화되고,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라디오를 통해 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즐겨 들었고, 텔레비전으로 「쇼쇼쇼」(1964~1983)와 같은 쇼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대중 가수로는 이미자, 최희준, 패티김 등이 인기를 끌었고, 영화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만추」, 「하숙생」 등이 이 시대 사람들을 웃고 울렸다.
만화 '호피와 차돌바위'포스터, 금성 텔리비전 VD-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