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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제주 4·3 70주년 기념 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Commemorating the 70th Anniversary of Jeju 4·3

기 간 : 2018.03.30 [금] ~ 2018.07.03 [화]

장 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 관람문의 : 02-3703-9200

전시를 열며 (Opening Special Exhibition)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린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노력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에 대해서는 국민적 차원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당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 곁에 남은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초해 관련 사료와 유품,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제주4·3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준비되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Jeju 4·3, a series of historic events that occurred around April 3rd, 1948, resulted in the second largest number of casualties in modern Korean history. However, it took over half a century to discover the truth of these sorrowful events. The truth-finding efforts that were first made by private citizens and universities in the 1980s led to the 2000 enactment and promulgation of the Special Act on Discovering the Truth of the Jeju 4·3 Incident and the Restoration of Honor of Victims. The act prompted efforts at the national government level to restore the honor of the victims and their bereaved families. During the process, the Report on the Truth-Finding Investigations of the Jeju 4·3 Incident was published in 2003, and, in 2014, April 3rd was designated as a national memorial day.

Nevertheless, it is true that the general Korean public still lacks understanding of Jeju 4·3, and, unfortunately, by the 70th anniversary of Jeju 4·3 in 2018, most of the victims’ family members who had direct knowledge of the events had passed away. So much time had gone by before Jeju 4·3 was recognized on the national level, and before those efforts had gained momentum, that the stories of those witnesses were not documented.

The special exhibition marking the 70th anniversary of Jeju 4·3 is designed to illustrate the historic events by displaying historic artifacts, personal effects of the deceased, and related works of art, which were collected based on information contained in the Report on the Truth-Finding Investigations of the Jeju 4·3 Incident. We prepared this exhibit with high hopes for Jeju 4·3 to be recognized not just as part of the history of Jeju, but of the Republic of Korea as a whole. Hopefully, you will take your experience at this special exhibition as an opportunity to rediscover the precious values of human rights and help lay a cornerstone of the grounds for peace and mutually-beneficial coexistence.
저기에 있는 봄
제주 주민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기며 살아왔고, 그 강인함은 1932년 해녀항일운동에서도 드러났다. 패망 직전 일제가 제주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자 도민의 고초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해방은 찾아왔고, 도민들과 제주 인민위원회는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봄은 멀지 않은 듯 했으나, 미군정에서 일제 경찰의 재임용, 부정부패 사건, 식량공출 등으로 도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저기에 있는 봄
흔들리는 섬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 발포로 민간인이 숨지자 제주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발포에 대한 항의로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잇따른 경찰의 무차별 검속과 고문치사에 도민들은 분노했다. 1948년 5·10총선거를 앞두고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의 무장대는 4월 3일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평화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저기에 있는 봄
행여 우리 여기 영영 머물지 몰라
무장대에 의한 선거 저지로 제주는 5·10총선거에서 선거 무효가 선언된 유일한 지역이었고,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정통성에 도전으로 여겼다. 1948년 10월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의 통행자를 무조건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제9연대의 포고문을 시작으로 11월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어린이, 노인, 여성을 포함해 2만 5천~3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여 우리 여기 영영 머물지 몰라
땅에 남은 흔적, 가슴에 남은 상처
4·3의 악몽은 연좌제로 대물림되었고, 마음껏 슬퍼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4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진상규명 노력이 활기를 띠어 2000년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고, 2014년에는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땅에 남은 흔적, 가슴에 남은 상처

Epilogue


너도 누군가의 꽃이었을테니
제주 하귀리 영모원의 추모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4·3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고 아픈 역사에 대한 치유와 화해의 길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이다.

너도 누군가의 꽃이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