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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제1호
자료형태 정기간행물 시대/연도 ~ 대한제국(~1910) / 1883.10.31.
규격 21.8 x 27.4
한줄설명 박문국에서 발행한 최초의 근대적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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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10월 3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평가되는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호가 발행된 날이다. 당시 조선은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였고 순한문으로 한성순보를 창간, 발행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파괴되어 발행이 중단되었으며 1886년 한성주보(漢城週報)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었다. 약 1년여의 기간 동안 40여 호가 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같은 젊은 개화파 인사들은 신문의 발행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신문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신문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선진 국가들의 다양한 제도를 소개함으로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박영효는 수신사(修信使)로 다녀온 뒤 계몽을 위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문 발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성순보는 순(旬)자를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흘에 한 번 발행되었다. 정부 기구에서 발행되는 만큼 국가의 각종 정부 시책과 국내외 여러 상황 등을 알리는 관보(官報)의 성격을 갖고 있다. 신문은 크게 삼분체제로 구성되어 있어 조보(朝報)로 국내기사를 다루는 내국기사(內國記事)를 첫머리에 두었으며 이후 각국근사(各國近事)라 하여 각종 외국의 기사들을 수록하였다. 제5호부터는 두 부분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국내 기사들을 국내사보(國內私報)라 하여 수록하였다. 호별 발행 부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보내어 졌으며 순한문으로 발행되었기에 여기에 익숙한 식자층, 관원들이 주요 독자층이었다.


 전체 20쪽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진 속 한성순보 제1호는 첫 기사 순보서(旬報序)를 통해 개화정책의 추진을 알리고 있다. 순보서는 ‘조정에서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보(外報)를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내사(內事)까지 기재하여 국중(國中)에 알리는 동시에 열국(列國)에까지 반포하기로 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이 개화를 위해 어떠한 방침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밖에도 제1호 신문에는 국내의 인사(人事)나 사건‧사고, 국왕의 능행(陵幸)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스페인, 러시아, 일본, 베트남(安南)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기사를 번역, 수록하였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되었으나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자 당시 개화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한성순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https://www.nl.go.kr/newspap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736)

이광린, 「漢城旬報와 漢城週報에 對한 一考察」, 『역사학보』 38, 1968.

김미지, 「『한성순보』와 중국 개항장 신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 1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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