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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이 걸어온 길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헌법이 공포됐다.

국민의 주권과 자유, 평등을 기본으로 하여 총 10장 103조항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제헌헌법이 제정. 공포된 후, 1987년까지 총 9차례 개정이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법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임종훈 교수/ 홍익대학교 법학과


민주국가에서 헌법의 제1차적인 역할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보통 기본권이라고 부르는데요. 헌법에는 기본권에 관한 규정 외에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등 국가 통치 기관에 관한 규정도 있습니다.

 

국가의 든든한 뿌리인 헌법!

과연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1948년 7월에 제정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통치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헌법의 핵심 개념인 국민주권, 국민기본권, 권력분립, 대통령제 혹은 내각책임제와 같은 정부 형태는 국민들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데, 어떻게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헌법을 준비하여 제정할 수 있었을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제헌헌법이 해방 후부터 준비되고 제정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헌정사를 돌아보면 해방 전부터 입헌주의 도입, 즉 헌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사에서 헌법이라는 국가의 최고법이 등장한 건 근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절대 왕정국가로 이행한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계급은 구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사회 개혁을 요구했다.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 재산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이런 움직임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1689년 12월, 영국의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만들어 왕의 서명을 받았다.

이것은 영국 입헌주의 기초가 되는 법률이었다.

그러나 국민 기본권, 정부형태, 권력분립을 규정한 성문 헌법을 최초로 제정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각 주에서 시행 중이던 주요 헌법들을 통합하여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근거로 미국 연방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미국의 사례처럼 먼저 헌법을 제정했다.

그 기반 위에서 국민기본권을 보장하고, 정부를 비롯한 통치기구를 수립했다.

근대적인 입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입헌주의는 개항과 함께 아시아에도 전파됐다.

이 결과 일본은 1889년에, 중국은 1908년에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우리도 일본, 중국처럼 개항을 계기로 입헌주의가 소개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원리로 통치되고 있었고 시민계급의 성장은 미약했다.

따라서 우리의 헌정사는 서구의 입헌주의 사상을 수입·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은 그동안 조선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제도인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등의 정치제도를 소개했다.

1883년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에 파견된 유길준은 서양이 동양보다 부강한 이유를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입헌주의에서 찾았다.

언론 또한 입헌주의 소개에 앞장섰다.

정부는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에 민권, 정부 형태, 정치제도 등을 소개했다.

1896년 4월에 창간한 <독립신문>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주권과 자유 민권 사상 등을 소개했다.

 

새로운 정치사상에 눈 뜬 일부 시민들은 여론을 형성하며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1898년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으로 하여금 개막 연설을 하게 하여 국민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입헌주의가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가령 1895년 <홍범 14조>, 1898년 <헌의 6조> 제정을 주도한 개화세력은 국민기본권과 정부 기구의 법제화를 주장했다.

반면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여 군민공치를 부정하고 전제 군주권을 강화했다.

 

이영록 교수 / 조선대학교 법학과


개화파가 힘을 얻고 득세하고 있었을 때는 입헌주의를 향한 진보적 흐름으로 갈 수 있었지만 거꾸로 보수파가 정권을 잡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 반대 흐름들이 나타나게 되는 거죠. 입헌주의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원칙, 이런 것들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서도 입헌주의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갔다.

이때부터 전제 군주제는 부정되고 민주공화제로 이행해 갔고 이에 따른 헌법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5년에 설립된 헌정연구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정 연구 단체로 국민의 정치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창설됐다.

회원인 양한묵은 <헌정요의>를 황성신문에 연재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국가는 군주의 사유물이 아닌 국민 공동체의 것이며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황실이 아닌 정부가 필요하다.”

 

고종이 폐위된 1907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중요한 전기였다.

고종 폐위 이전에 개화세력들은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 폐위 이후 입헌군주제는 설득력을 잃어갔고, 민주공화제가 새로운 정치체제로 대두됐다.

 

전종익 교수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민주공화제, 군주가 없는 국가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졌었던 것 같아요. 이미 조선 말 경부터 우리 지식인들이 일본 문헌과 특히 중국 문헌을 통해서 그런 정치 체제가 존재한다는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최초로 제시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세울 새 나라의 체제로 입헌 군주제 대신 민주공화정을 제시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자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됐고 입헌주의 사상은 헌법 제정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1917년,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상하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은 순종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라 주장하며

국민주권, 즉 민주공화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헌정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제적으로 널리 확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대외적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19세기 말 이래 다양하게 논의되어 온 입헌주의 사상을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집결한 독립 운동가들은 10개조로 구성된 임시헌법인<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공식 헌법에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사용한 것은 임시헌장이 최초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이후 임시정부 헌법은 194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개정됐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헌법은 근대적인 헌법의 형식을 갖추어갔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의정원, 임시정부와 같은 통치기구, 회계 등 근대 헌법의 핵심 조항들이전부 포함됐고, 헌법의 내용도 더욱 구체화됐다.

이 헌법 체계는 1948년 제헌헌법에 대부분 그대로 이어져 대한민국 헌법의 기반이 됐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우리나라는 잔혹한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36년을 기다리던 자주독립국가의 꿈,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그 날이 온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념을 달리하는 여러 정치세력은 저마다 지향하는 국가체제를 수립하고자 각축을 벌였다.

이들은 국가 수립 구상을 저마다의 헌법안에 담았다.

 

헌법을 제정하고자 제일 먼저 행동을 개시한 사람은 임시정부 출신의 신익희였다.

해방 후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한 신익희는 신생 독립국가의 기초가 될 행정조직 및 법제를 기초할 전문가들을 모았다.

그리고 1945년 12월 17일,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헌법분과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 건설을 준비했다.

이들은 1946년 1월 중순부터 여섯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헌법기초요강을 작성했고 1946년 3월 초 ‘한국헌법’을 발표했다.

더불어 좌우익을 막론하고 여러 정치단체에서 연이어 헌법을 제정·발표했다.

우익을 대표하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좌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을 발표했다.

그리고 중도파를 대변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는 1947년 8월 6월에 ‘조선임시약헌’을 최종 의결했다.

 

이영록 교수 / 조선대학교 법과대학


대동소이하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순수한 대통령제 헌법이나 순수한 내각, 의원내각제 헌법이 아니라 대개 혼합형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을 들자고 한다면 강한 통제 경제, 균등,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그 시기 헌법안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편,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됐다.

같은 해 11월에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의가 채택됐다.

그러나 소련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북한의 거부로 총선거는 남한에서만 실시됐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로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국회를 구성할 대표를 선출한 선거였다.

이들은 앞으로 탄생할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게 될 제헌국회의원들이었다.

 

미국 국가건설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헌법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한 다음,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국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로서는 헌법을 제정할 국회를 곧바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10 선거는 정부 수립 방법의 차이, 이념 대립 등으로 갈등은 격화됐지만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국회의원 200명 선출에 948명이 입후보하여 약 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총유권자의 92.1%가 선거권을 행사하여 5.10 선거는 전 국민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8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를 개원했다.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임무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국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할 헌법기초위원 30명을 선정했고,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아울러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실무 작업을 도와줄 전문위원 10명을 위촉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 기초는 6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국회에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헌법안, 대한민국 임시헌법, 조선임시약헌은 물론 세계 각국의 헌법 등 여러 헌법안들이 자료로 제출됐다.

 

그 중에서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을 원안으로 하고 ‘법전기초위원회에서 제출한 헌법초안’ 일명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은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유진오가 작성한 헌법 초안과 행정연구위원회 헌법 초안을 합친 것으로 국회 개원일인 5월 31일에 제출됐다.

권승렬안이라 부르는 헌법 초안은 6월 3일 헌법기초위원회 개회 때 새로 제출된 것으로 유진오의 헌법안과 큰 차이가 없었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헌법 초안은 6월 22일까지 모두 16차례의 회의에서 논의한 끝에 최종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내각제 헌법안을 대통령제로 바꾼 것이다.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의 주장이 중요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긴 했지만 대통령의 국회에서 선출, 임기 4년, 중임 1회 제한 등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내각제적 요소를 상당히 남겨두었다.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서상일은 본회의에 헌법 초안을 제출하고 제안 설명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서상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이 헌법안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민주의원에서 제정된 임시헌법,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약헌 등을 종합하고, 그 외에 구미 각국에 현재에 있는 모든 헌법을 종합해서 이 원안이 기초된 것이다

-국회 제1회 제17차 속기록 내용 中에서-

 

헌법 초안은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과 권승렬안 외에도 국내에서 제정된 헌법 및 서구 각국의 헌법들을 광범위하게 참조해 완성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제헌헌법은 해방 이후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정된 것도 아니요, 미국의 영향 아래 제정된 것도 아니었다.

 

개항으로 유입된 근대 입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세계 각국의 헌법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또 그것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헌법으로 수정하면서 이루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해방을 맞이한 8월 15일을 새 정부 수립 선포일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국회는 헌법 초안이 넘어온 다음 날인 6월 23일에 본회의를 열고 헌법안을 심의했다.

본회의에 상정된 헌법 초안은 의원들이 조문 하나 하나를 다시 심의하여 최종 결정했다.

이 모든 과정은 7월 7일까지 마무리됐다.

7월 12일에는 그동안 심의한 내용을 정리하고 자구를 수정했다.

그리고 결정된 헌법안을 낭독한 후 헌법안에 대한 확정을 기립으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국회의원 전원이 기립하여 동의를 표시했다. 이로써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확정했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수립의 토대가 되는 헌법이 전 국민에게 공포됐다.

그리고 헌법이 정한 법규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대통령 중심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정부가 합법적으로 출범했다.

 


신우철 교수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헌법 논쟁들이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논의였다고 한다면 역시 우파 내부에서의 권력의 배분 문제, 즉 정부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통령제를 채택할 것인지 아니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할 것인지, 대통령제를 채택한다면 대통령을 어떤 방식으로 선출할 것인지. 그리고 의회를 양원제로 할 것인지, 단원제로 할 것인지

 

 

이와 같이 많은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신속하게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제헌국회의원들의 강한 의지와 오랜 기간에 걸친 준비 덕분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정된 제헌헌법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물론서구의 앞선 헌법 규범 등의 영향을 받아 국민기본권을 상대적으로 잘 보장한 헌법이었다.

가령 신체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의 자유권을 다양하게 보장했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해당하는 법 앞에서의 평등, 즉 기회의 평등 역시 제헌헌법에서 보장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제헌헌법은 재산권과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사회주의적 특징을 보여주는 조항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가령 시장경제의 근간인 재산권은 보장되고 있지만, 공공 필요에 의해 재산권은 제한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고 했다.

더욱이 광물 등 중요한 지하자원은 국유화하고,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했다.

 

제헌헌법은 교육과 노동 등의 사회권도 중요하게 보장했다.

교육권에서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했고 초등교육은 무상 의무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명시했다.

노동권에서는 영리 목적의 사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인정됐다.

 


신우철 교수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19세기(20세기) 초중반의 시기는 사회주의와 사회화의 경향이 전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19년의 바이마르 헌법이라든가 1918년의 소련 헌법이라든가 심지어는 미국의 경우도 뉴딜주의에 입각한 국가 개입적인 헌법 이론들이 상당히 성행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전종익 교수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당시 우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적 요소에 대한 반감이 있었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 상황을 반영해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1952년 제1차 개정 이래 총 9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헌법을 개정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므로 헌법 규범 역시 그에 맞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거나 경제발전에 맞춰 시민들의 인권 의식이 향상되는 것과 같이, 현실 변화에 맞춰 헌법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헌법을 개정하는 경우도 있다.

통치기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심지어는 정권을 연장하려고 헌법을 개정하는 사례도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은, 현실이 변하여 그에 맞게 개정하기도 했지만, 헌법을 개정한 보다 직접적 계기는 정치적 이유였다.

가령 집권자의 정권연장을 목적으로 추진한 개헌은 제1차, 제2차, 제6차 개헌, 모두 세 차례였다.

 

제1차 개헌은 6.25전쟁으로 피난 중이던 1952년 7월,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반대세력이 다수를 점한 국회에서 대통령 당선이 불가능해진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고자 개헌을 한 것이었다.

 

개헌 정족수를 충족시키지 못해 ‘사사오입 개헌’으로 추진된 제2차 개헌은 1954년 11월에 이루어졌다.

이 개헌의 중요한 배경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연임의 길을 열었고, 대통령 궐위 시에 부통령이 그 지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여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1969년 10월에 추진된 제6차 개헌 역시 ‘1차에 한해 허용한 중임 규정’을 개정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3기 계속 연임을 허용하려고 이루어졌다.

 

한편, 집권세력이 교체되거나 통치 구조를 강화할 목적으로 개헌을 추진한 경우도 다섯 차례나 됐다.

이 경우 헌정체제의 변화가 수반됐다.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허정 과도정부 하에서 1960년 6월에 추진된 제3차 개헌은 대통령제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로 변경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 하에서 1962년 12월에 추진된 제5차 개헌은 정부형태를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했다.

제7차 개헌은 국내외 정치·안보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강력한 국가 권력구조의 확립이라는 목적 아래 1972년 12월에 이루어졌다.

이 헌법은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고, 비상조치권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국민기본권의 실천을 크게 제약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제8차 개헌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부 하에서 1980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이 헌법에서는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간선하도록 변경했으며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개정했다.

제9차 개헌은 전두환 정부의 권위주의 통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등을 열망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1987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우리 헌정사 최초의 여야 합의로 이루어진 개헌이었다.

 

신우철 교수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헌법 개정은 한편으로는 권력의 사유화라든가 국민 권리의 제한이라고 하는 그런 곡절의 경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을 공유화해서 권력을 제한하고 정당화하고 그리고 국민의 권리를 최대한 신장하는 방향으로 헌법 개정을 통해서 입헌주의가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40여 년 동안 평균 5년마다 한 차례씩 헌법을 개정했지만 현행 헌법은 1987년 개정된 이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역대 최장수 헌법이다.

1987년 헌법의 의의는 국민 기본권의 실질적 강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있다.

통치구조에서는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채택하여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국정감사권을 다시 부활시켜 국회의 권한을 강화해 국가 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했다.

또한 국민 기본권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국민 기본권은 제헌헌법에서부터 계속 개선되어 왔지만, 1987년 헌법에서 그 실효성은 눈에 띄게 개선됐다.

가령 신체의 자유가 크게 개선되어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서는 처벌할 수 없으며, 타인의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한 국가 구제조항을 신설했다.

게다가 최저임금제, 노인·청소년 복지, 환경권 등 사회적 기본권 조항을 신설했고, 인권침해를 구제하려고 헌법소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국민기본권도 대폭 개선됐다.

 

국가의 근본법이자 최고 법규인 헌법.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기본 가치를 공유하게 하며 우리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은 헌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개항을 계기로 도입된 입헌주의사상을 바탕으로 민주공화제 통치 구조를 정착시켰고 국민 기본권 이념을 수용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헌법의 토대를 이룬 제헌헌법을 제정했다.

제헌헌법에서부터 지금의 헌법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차례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는 집권자의 정권 연장이라는 정치적 동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국민 주권과 기본권이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고 국민의 행복한 오늘과 희망찬 내일을 보장할 기본 문서.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일상생활의 규범.

그것이 바로 헌법이며, 대한민국 헌법의 존재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