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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화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프린스턴 라이먼 교수 / 조지타운대

지금도 기억나는데 제가 한국에 가기로 했을 때, 제 동료들은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원조에 과도하게 의존했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으며 자원도 없는 나라였으니까요. 한국인들 중에도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세계의 부정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
경제 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기적의 중심엔 철근처럼 탄탄한 중화학공업이 있었다.

 


1

 


중화학공업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육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국은 한국의 공업화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비교우위가 있는 농업에 주력하고, 공산품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라는 입장이었다. 자립경제를 위한 중화학공업화의 꿈은 장면 정부를 거쳐 박정희 정부로 이어졌다.
 

 

1962년 1월 발표된 제1차 5개년계획에는 수력 4개, 화력 8개 발전소의 건설 등 외에도 비료, 정유, 시멘트, 종합제철소, 종합기계, 조선소, 자동차 등 중화학 전 분야에 걸친 공장 건설 계획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기술력도, 투자자금도 없는 한국에게 이 계획은 그림의 떡이었다. 미국은 1차 계획의 목표 성장률을 낮추고 종합제철소와 같이 과도한 투자계획을 취소할 것을 요구해왔다.
박정희 정부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결국, 투자 사업을 대폭 축소해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건설 사업만을 남겼다.
 

 

그리고, 1962년, 정부는 국영기업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하고, 미국 걸프석유회사의 투자와 차관을 얻어, 정유공장을 울산에 건설하였다.
곧이어 비료공장도 건설했다. 충주비료와 호남비료, 이 두 개의 비료공장이 이미 가동 중이었으나, 그것으론 비료 자급이 부족하였다.
그로 인해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울산과 진해에 각기 추가 비료공장이 건설되었다. 그간의 쌓인 경험 덕분에 단기간에 완공된 두 비료공장은 가동률도 100% 이상이 되었다.
 

 

 프린스턴 라이먼 교수 / 조지타운대

당시 한국 정부는 크고 근사한 비교 공장 두 개를 세웠는데 1년 넘게 앞당겨서 완공했어요. 그래서 과학기술부 장관을 만났을 때 물어봤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최신식 공장 두 곳을 1년이나 앞당겨 완공하는 게 가능하냐’고요. 장관이 ‘충주 비료 공장을 기억하느냐’기에 저는 ‘아주 엉망인 프로젝트였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장관이 대답했어요. ‘당신네에게는 나쁘게 보일지 몰라도 한국의 모든 엔지니어들은 그곳에서 많이 배웠고, 이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비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요.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민간 비료 공장도 건설되었다. 삼성의 이병철은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4천만 달러 차관을 도입해 연산 33만 톤의 거대 요소비료 공장을 울산에 건설했다.

 


2

 


정유공장과 비료공장은 당초 계획한 1차 5개년계획 사업의 일부에 불과했다. 중화학공업을 더 건설하려면 자본재와 원료를 수입할 외화가 대적으로 필요했다.
박정희 정부는 외화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64년 12월.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해 4,000만 달러의 재정 · 상업 차관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외자 도입의 큰 물꼬를 터야만 했다. 그 물꼬가 바로,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파병이었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1951년 이래 오랜 현안이었다. 군사정부 전까지 총 5차례나 회담이 열렸으나, 양국의 상반된 입장으로 모두 결렬되었다.
군사정부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다. 이른바 청구권 자금을 얻기 위함이었다.
결국, 19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3억 달러 제공 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1964년 봄 회담 타결을 서두르자, 야당과 학생들이 굴욕외교, 매국행위라고 크게 반발했다.
 

 

 

 이원덕 교수 /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유보한 채 안보적인 협력, 경제적인 협력만을 추구하는데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군사정부는 1964년 6월 3일. 서울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반대 시위는 진압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65년 6월,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이 맺어졌다.
8억 달러의 청구권 자금.. 이는 1964년 수출액이 1억 1,900만 달러에 불과한 한국의 숨통을 터줬고 무엇보다도 한국이 일본에서 자본과 선진 기술과 지식을 도입할 통로가 열렸다.
 

 

 이원덕 교수 /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일본하고 수교하게 될 경우에는 많은 개발자금을 얻어낼 수 있다고 하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미국과 일본과 안보적인 협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북한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외자도입의 두 번째 물꼬, 베트남 파병.
1964년 베트남전의 확전을 결정한 미국이 한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주한 미군의 베트남 이동 방지와 한국군의 현대화, 장병 봉급과 용역 수입 등의 다각적 효과를 기대하고 파병을 결정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달리 베트남파병에 대해 야당은 적극 반대하지 않았고 언론은 호의적이었다. 학생들의 반대시위도 없었다. 오히려 파병군의 지원율이 높을 정도였다.
 

 

 우용락 / 월남참전

내가 살아올 수 있겠나 이런 걱정이 됐는데 또 이면에는 내가 가서 살아오게 되면 우리 농촌에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정말 농토 얼마 안되는 걸로 어렵게 사시는데 땅이라고 한, 두마지기 사주면 삶이 나아질 거고 그게 안 되면 송아지 몇 마리 해주면 그때는 소가 재산목록 1, 2호 아니겠습니까. 그럼 집이 좀 살기가 안 낫겠나? “설마 내가 죽겠나, 살아오자“ 이런 용기를 갖고, 대다수 그런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때 하도 사회상황이 어렵고 하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1965년에는 경비대대와 공병대대에 이어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 등 핵심 전투병력 2만여 명을 파병하였고, 1966년에는 백마부대 1개 사단 2만여 명을 증파하는 등 베트남 파병 한국군 수는 연인원 31만여 명에 달했다.
그 중 5천여 명의 전사자와, 1만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8만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다.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대한민국은, 미국의 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일명 ‘브라운각서.’
한국군 현대화 지원 및 증파 병력의 장비와 필요경비 부담, 주월 한국군 소요 물자와 용역을 한국에서 구매하고, 미군용 물자도 한국에서 일부 발주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었다.
 

 

미국은 또 한국에 공업연구소의 설립도 지원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즉 KIST를 설립했다.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와 공학자를 국내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1970년대에 정부가 중학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바지선이 월남에 수출돼서 사이공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월남 파병으로 베트남에 대한 수출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또 파병 기간 동안, 베트남에 파견된 군인이나 노동자들이 받은 봉급 소득과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벌어들인 사업수익은 총 7억 4,000만 달러에 달했다.
가히 ‘피 흘려’ 번, ‘피 같은’ 돈이었다.
 

 

이처럼 한·미·일 세 나라의 협조체제가 공고해지자 외자도입이 급증했다. 1965년에는 차관도입액이 4천만 달러에 못 미쳤으나 1969년에는 12배가 넘는 5억 달러의 외자가 도입됐다.
외자 도입 승인을 받기 위해 민간 기업들은 줄을 섰다. 외자 도입 승인을 받는 것은 기업에 큰 이익이었기 때문이었다. 외자 도입에 대해서는 은행이 지급 보증을 했고, 그 금액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은행 대출금액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3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파병으로 확보한 외자로 1960년대 후반 석유화학단지와 종합제철소를 세웠다.
당시엔 화학섬유공업이 발달하면서 화섬 원료를 국산화할 필요도 커졌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석유화학공업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석유화학공업은 원유에서 나오는 나프타로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만들고, 그것으로 중간물질을 거쳐, 다시 최종적으로 PVC, 폴리에스터, 아크릴 등을 뽑아내는 산업으로서, 한마디로 경공업 기초소재를 만드는 산업이다.
석유화학공업은 서로 연관성이 있어, 관련 공장들이 한 곳에 모여야 한다. 그래서 울산지구에 약 100만평 규모의 석유화학 단지 건설을 계획한다.
 

 

정부는 당장은 협소한 국내 수요를 감안해서 1966년 11월 생존 최소단위로 에틸렌 연산 10만 톤 규모를 택하고 관련 계열공장을 한꺼번에 건설하기로 했다.
이 소규모 석유화학단지 공장이 살아남으려면 대폭 지원이 필요했다.
정부는 원료인 나프타를 원가 이하로 공급한다든가 각종 조세를 감면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나프타분해공장 등 중요한 대규모 사업은 유공과 충주비료 등의 공기업에 맡겼다. 아직 민간 기업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10월, 드디어 4년 반 동안 내외자 2억5천만 달러를 들인 울산석유화학 단지가 준공되었다. 그 후.. 기초 소재의 자급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4

 


한국은 종합제철소의 건설도 추진했다. 종합제철소는 철광석과 코크스를 고로에서 녹여 무쇠를 만들고, 이 무쇠에서 탄소를 제거하여 강철을 만든 다음, 높은 압력을 가해 여러 용도의 철판을 생산하는 곳이다.
 

 

1960년대 초, 한국에는 소형용광로에서 연간 1만톤 가량의 무쇠를 생산하는 삼화제철소와 고철을 평로에서 녹여 연간 20만톤 가량의 강철을 생산하는 인천중공업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울산에 연산 30만톤 규모로 제철소를 건설하려 했다가 재정난으로 무산시켰다. 하지만, 박정희는 종합제철소 설립을 다시 추진하였다.
 

 

1965년 5월 박정희는 미국 방문 길에 미국의 제철업자들을 만나서 협력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철업자 등은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을 만들었다. 장기영 부총리의 경제기획원이 종합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를 맡았다.
경제기획원은 KISA와 1967년 10월 연산 6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공장 건설 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1968년 4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KISA는 제철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세계은행 및 미국 수출입은행과의 차관 교섭을 진척시키지 못한 것. 1969년 봄까지도 세계은행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에 대한 부정적 보고서를 냈다. 
 

 

 

 황병태 / 1960년대 기획원 공공차관과장, 경제협력국장

외국 사람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종합제철을 할 형편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후진국에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white elephant, 백색 코끼리를 갖다 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공장 유지가 안되지 않느냐 한국도 마찬가지다. 백색 코끼리 된다 해서 처음부터 반대한 겁니다.

 

 

 

결국.. 196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대한국제경제협의체 회의에서 KISA의 종합제철소 계획안은 부결되었다. 새 방안을 찾아야 했다. 박정희는 김학렬을 새 경제부총리로 임명해 종합제철소의 해결사로 투입했다. 
 

 

 

 양윤세 / 1960년대 기획원 외자총괄과장, 투자진흥관

김학렬씨가 나한테 와서 “청구권자금 조기 사용을 하기로 청와대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양국장이 그 교섭을 맡되, 양국장 마음대로 하세요. 앞으로 양국장 마음대로 해서 이걸 빠른 시일 내에 매듭을 지어주시오“ 하는게 김학렬씨가 나한테 한 이야기예요.

 

 

 

정부는 종합제철소 사업이 경제적 타당성을 갖도록 거액의 출자와 기반 시설 제공, 각종 세제 혜택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규모도 연산 100만 톤으로 확대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제철소 사업에 협력하였다. 한국의 의지와 능력을 볼 때 종합제철소 건설은 필연적이라 보고, 한국의 제철소 사업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명분과 실리를 얻고자 했다. 
 

 

 

 오원철 / 박정희 정부 중화학공업기획단장

그 때 일본도 수출하려고 굉장히 애쓰던 때거든요. 몇십억 불 짜리 종합제철소가 얼마나 큰겁니까. 우리가 사주겠다고 한거죠. 거기서 왔다 갔다 하는 길이 터진거죠.

 

 

 

1969년 12월 한국과 일본은 종합제철소 사업에 협력한다는 기본 협약을 체결하였다. 포철에 기술을 지원할 일본의 철강회사들은 Japan Group 컨소시움을 만들었다.
포철에는 외자 1억 7,800만 달러, 내자 493억원 등 총 1,204억 원을 투자했다. 428억 원이 소요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의 3배나 되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그렇게, 1973년 6월 9일. 일관 제철소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여상환 / 포항제철 창립멤버

출선구가 막혀서 산소드릴로 다시 뚫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저것이 될까 괜찮을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 전체 분위기를 지배했는데, 마침내 펑 소리가 되면서 그 출선구에서 쇳물이 되어 나오니까 아주 그 빛깔이 영롱하고 형용할 수 없는 창조의 빛깔인데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전부다 만세하고...

 

 

 

포항종합제철의 탄생은 난산 중의 난산이었다. 자칫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종합제철소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기본적으로 박정희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휘 아래 몸을 던진 장기영, 김학렬, 박태준의 노고도 컸다.
 

 

 황병태 / 1960년대 기획원 공공차관과장, 경제협력국장

종합제철은요. 박대통령의 베이비(baby)입니다. 그 분이 말하면 잉태했고 그 분이 키웠고 그 분이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종합제철은 박대통령때문에 살아났던 겁니다.

 

 


5

 


대한민국은 이처럼 석유화학단지와 종합제철소로 중화학공업화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 무렵 안보위기를 계기로 중화학공업화에 박차가 가해졌다.
 

 

1960년대 말. 북한의 대남 군사 도발이 격화하면서 남·북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한반도 긴장 상황과는 반대로 세계는 동서냉전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월남전의 출구전략으로서 아시아에 미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는다는 방침, 즉, 닉슨독트린을 발표했고, 이 방침에 따라 1970년 7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가 결정되었다.
 

 

또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했다. 그간 국을 지켜주던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오히려 적국인 중국과 손잡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심각한 안보위기, 국가비상사태로 인식하였다.
자주국방의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무기 국산화에 나섰다.
 

 

그리고, 1970년 6월, 정부는 4대 핵공장 사업 계획을 세웠다. 주물선, 특수강, 중기계 종합 공장과 조선소를 세운다는 것.
이는 장갑차, 총포, 포신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현대건설의 정주영에게 조선소를 맡기는 등 각 사업 담당자도 선정했다. 정부는 1970년 8월, 병기 국산화를 담당할 국방과학연구소(ADD)도 세웠다.
그러나 차관을 얻지 못해 4대 핵공장 사업은 진척되지 못했다.
 

 

박정희는 1971년 11월 상공부의 오원철 차관보를 경제2수석에 임명해서 방위산업 육성임무를 새로 맡겼다. 오원철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인화기와 60mm 박격포 제작에 나섰다.
암호명, ‘번개사업’! 한 달 만에 카빈소총과 기관총 시제품을 만들었다. 이어 유도탄과 105mm 대포 개발에도 나섰다. 
 

 

 윤응렬 / 초기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신응균 장군이 “각하, 무기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대포 포신도 영국이나 스웨덴에서밖에 생산이 안 됩니다. 기관총이나 칼빈총 모양은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과연 제대로 발사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닙니다.”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박대통령께서 역정을 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요. 월맹이 수도 파이프 가지고 박격포를 만들어서도 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린 그것보다는 나을 것 아니요.”
백분위 정밀도까지 되어야 하는데 그건 뭐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고 그래서 굉장히 문제가 되어서 역시 무기개발이라는 건 종합적인 중화학공업화가 되어야겠다는 그런 결론에 이른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는 중화학공업 일을 착수하게 된겁니다.

 

 


6

 


박정희는 방위산업 육성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임기 제한 없이 집권하면서 전면적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1972년 10월 17일 갑자기 비상계엄을 선포, 헌정을 중단시켰다. 사실상의 종신집권을 보장받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유신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국민이 자신의 대표자를 뽑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그는 1980년 100억불 수출, 1인당 1,000불 소득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 수단은 전면적 중화학공업화였다.
 

 

 

 오원철 / 전 중화학공업기획단장

백억불 수출, 그것을 박대통령이 하겠다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니까 제가 ”중화학공업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답한거지요. 그런데 중화학 공업은 병기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동시에 하겠습니다 하고 나간거지요. 중화학 공업은 우리가 백억 불 수출을 하기 위해서 만든거예요.

 

 

 

그가 유신체제의 비전으로 내건 1980년 100억불 수출, 1인당 1,000불 소득은 기존의 경공업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다. 한국경제의 중심이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어야 했다.
박정희는 1인 절대권력 체제 속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아무런 정치적 간섭이나 반대 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였다. 
 

 

 73. 1. 12 연두기자회견, 박정희 대통령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2월에는 범정부 부처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6월에는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공업이 6대 전략 업종이었다.
1981년까지 전체 공업 중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늘리겠다고 하였다. 박정희는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과 경제 제2수석 오원철 등으로 중화학 공업화 팀을 구성,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정부는 한 분야에 한두 사업체를 선정해 규모의 경제를 구현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집중 지원하였다. 우선, 금융기관 예금으로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하고, 그를 중화학공업에 쏟아 부었다.
중화학공업 분야의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었으며, 인력이 충분히 공급될 수 있도록 공업고등학교와 공과대학의 입학정원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공업고교 수는 8년만에 1.6배로, 그 학생 수는 2.5배로 커졌다.
여기서 양성된 기능인력이 훗날 한국 중화학공업의 중심 기술자로 성장했다. 정부는 또 해당 분야 연구소도 설립했다. 또한, 6대 업종별로 산업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중화학투자로 1970년대 후반에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급성장했다. 1976~1978년에 연간 경제성장률은 10%를 넘었다.
그 기간 제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6.6%에 달했다. 중화학공업화는 기계공업 부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과 목표를 달성하였고, 수출 100억 달러도 애초 목표보다 4년을 앞당긴 1977년 말에 달성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산업이 이 중화학공업화 시기에 건설되었다. 바로, 자동차와 조선이다.
 

 

195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미군 트럭이나 지프의 부품을 재활용해서 자동차를 만들었다. 1955년 등장한 ‘시발차’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 외국 모델의 부품을 수입해 완성차를 단순 조립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생산량은 늘었다. 그러나 그만큼 부품 수입에도 막대한 외화가 들었다.
스웨터, 합판, 가발을 수출해 어렵게 번 달러로 사치품인 자동차를 수입하는 셈이었다.
 

 

이에 정부는 1970년대 초 자동차 및 주요 부품의 국산화를 강력 추진했다. 완성차 조립 회사는 엔진가공공장과 차체 공장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했으며, 업체의 국산화 실적에 따라 허가 생산량에 차등을 두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각사에 고유모델 승용차를 개발하도록 독려하였다.
 

 

가장 먼저 성과를 낸 것은 기아산업. 1974년 기아는 국산 엔진을 장착한 1,000cc 승용차 ‘브리사’를 생산했다.
현대는 고유모델 개발에 착수하였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회사와, 엔진과 변속기는 일본 미쓰비시와 계약해, 1974년 10월 포니승용차를 개발하였다.
우리나라가 자동차 고유모델국이 된 것은 세계 16번째, 아시아에선 두 번째였다. 현대는 1975년 종합자동차공장을 완공하고, 1976년 포니차를 본격 생산하면서부터 국내 승용차시장을 석권하였다.
 

 

이렇게 1970년대 말에 자동차산업은 급성장하였다. 마침 중동건설과 중화학투자로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국내 승용차 수요도 늘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조선공업도 본격적으로 육성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조선업계는 영세 업체들뿐이었다. 국내 수요가 없어서였다. 당시 국내 해운사들은 외국에서 중고선을 사왔다. 상공부는 먼저 2~3만톤급 배를 몇 척 주문받아 건조하기로 했다.
 

 

상공부는 1970년 우리나라에 원유를 공급하던 미국 걸프사에 대한조선공사에게 선박을 발주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대한조선공사는 걸프사에 1973년까지 2~3만톤급 소형 유조선 12척을 건조해 인도하였다.
 

 

한편, 4대 핵공장 사업에서 조선업을 배정받은 현대건설의 정주영도 조선소 건설에 나섰다. 그는 영국에서 조선 기술을 확보했지만, 차관을 얻기 위해선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선박 구매자를 확보해야 했다.
1971년 10월 정주영은 그리스의 한 해운업자에게서 국제시세보다 싼 값인 한 척당 3,095만 달러로 26만톤급의 초대형 유조선 2척을 2년 6개월 뒤 인도하기로 계약했다.
현대가 계약을 불이행할 경우, 선수 원리금에 대해 한국 정부가 지급하겠다는 보증까지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
     “당신이 배를 사주면, 사줬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영국 정부에서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사서 여기
     에 조선소를 지어서 네 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사라. 이 얘기예요.”

 

 

 

이렇게 현대는 5천만 여 달러의 차관을 얻어 1972년 3월, 조선소를 울산에 짓기 시작했다. 아울러 선박 건조도 병행했다. 그 후로 현대는 1973~1974년 초까지 총 12척 300만톤의 초대형유조선을 건조하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어 설계도면을 얻고, 또 사원들을 기술연수 보내면서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이내 시련이 닥쳤다.
 

 

1973년 말 제1차 석유파동으로 석유가격이 4배로 올랐다. 세계경제가 급속히 침체된 것! 유조선의 건조 수요가 크게 줄었다. 현대가 건조한 초대형 유조선 3척은 인도 일자 등을 핑계로 인수해 가지 않았다.
현대조선소는 출범하자마자 망할 위기에 처했다. 현대는 정부의 지원과 자구노력으로 이 위기를 넘겼다.
 

 

특히 현대조선은 중동건설 붐에서 활로를 찾았다. 모기업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수주한 공사 건에 철 구조물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현대조선은 울산에서 제작한 철 구조물 자켓을 동남아 바다와 인도양을 지나는 6,750마일의 해로로 중동 건설현장에 공급했다. 현대조선은 이 철 구조물 사업으로 조선 사업의 부진을 메웠다.
덕분에 현대조선은 1970년대 후반의 극심한 조선 불황을 헤쳐 나갔다.
 

 

현대조선소에서는 1972년 3월 기공 이래 1975년 5월까지 약 3년여 동안 2천 건이 넘는 안전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자와 근로자는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 선박건조 기술을 습득했다.
 

 

한국 조선업 생산성은 1960년대 말에는 일본의 1/20 가량에 불과했으나, 1984년에는 그 절반으로 격차를 좁힐 수 있게 되었다. 이 학습능력이야말로 한국 조선공업을 훗날 세계 1위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한국의 조선업은 정부 당국자, 기업주, 기술자, 근로자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주력산업이 1970년대에 속속 건설되었다. 이는 동시에 거대 재벌 기업의 발전이기도 했다. 이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흔히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집단이 부쩍 성장하였다.
대기업집단은 총수와 혈연 가족이 지배하는 기업조직을 말한다. 중화학공업화 시기의 지원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컸다. 업종별로 소수의 기업이 독과점을 보장받으며 대기업이 되었다.
 

 

대기업집단은 계열 내 상호 출자와 지급보증, 내부 거래, 인력 지원으로 똘똘 뭉친 선단식 경영을 했다. 특히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 그러했다. 이 선단식 경영은 조기에 신규 사업의 역량을 구축하고 초기 사업위험을 줄여 사업의 조기 안착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나 무분별한 확장으로 인한 계열기업의 연쇄 도산과 같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대기업 총수의 왕성한 기업가 정신은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나, 황제경영과 같은 독단적 경영으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밤.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뒤를 이은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었다. 1980년의 연간 성장률은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개시한 이래 20년 만에 처음으로 3%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새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화에서 찾았다. 신군부는 여기서 박정희 정부와 차별성을 보이려 했다.
 

 

 

 송의영 교수 / 서강대 경제대학원

70년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이 막대한 양의 선투자를 해야 하고 규모의 경제에 의존하는 몇 개 산업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수요가 예상보다 못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금융위기로 번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중화학공업이 전체적으로 잘됐다 잘못됐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조금 급하게 과도하게 추진된 것이 아닌가..

 

 

 

신군부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주도한 상공부 라인을 축출하고, 경제기획원 라인,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에게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주었다. 정부는 불황의 그늘이 특히 어두웠던 자동차, 발전설비 부문에서 투자조정을 시도했다. 신규 진입을 금지하고, 기존 업체도 사업부문을 정리하도록 했다.
전두환 정부는 산업정책도 바꾸었다. 정부가 특정 산업을 선택해서 그 소수 기업을 집중 지원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1986년에는 과거의 7개의 특정 공업 육성법을 폐지하고, 일반화된 기능별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공업 발전법을 제정하였다. 이런 정책 전환은 기존 산업정책의 폐해를 반성한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세계적인 경제 자유화 흐름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 레이건 정부를 중심으로 정부의 경제 개입을 축소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가 대두하였다.
 

 

한편 경제 안정화를 위하여 인플레 억제정책이 시행되었고, 노동운동 억압, 복수노조 금지, 3자 개입 금지 등 강권적인 노사관계안정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이는 위기에 빠진 신생 중화학 기업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경제는 정부의 강력한 안정화, 합리화 정책에 힘입어 1980년대 전반에 예년의 성장세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1986년부터 1988년.. 대호황이 왔다. 이 3개년간 수출의 폭발적 증가에 힘입어 경제성장률은 매년 11%를 넘었다. 이 호황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산업은 자동차산업이다.
 

 

1980년대 초 정부의 투자조정에 따라 승용차 2개 회사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자동차산업의 존립이 의문시되었다. 위기의 극복 방향은 단일 모델의 소형차에 집중 투자하여 수출을 위한 양산체제를 갖추는 것!
현대차는 1981년 10월 연 30만대 생산을 계획, 일명, ‘X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 등록된 전체 승용차 26만 7천대보다도 많은 수의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대담한 전략이었다.
세계은행은 이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내렸다. 하지만, 이 강수가 적중했다. 1980년대 미국-일본간 무역 역조가 커지자 엔화가 크게 절상되었고 일본 자동차업계는 소형차를 중심으로 대미 수출을 스스로 줄였다.
미국의 소형자동차 시장이 예기치 않게 열린 것이다. 이는 한국 자동차산업에 일대 기회가 되었다.
현대차 포니엑셀 수출이 급증하였다. 1983년 1만 6천대이던 것이 5년 만에 56만 4천대가 되었다. 포니엑셀은 미국의 10대 히트상품에 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어 대우차 르망과 기아차 프라이드도 수출대열에 동참하였다. 그 후 한국 자동차산업은 꾸준한 품질 개선과 적극적 마케팅으로 세계 5위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 한국 경제의 또 하나의 성취는 반도체산업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1960년대 중엽 외국계 기업에 반도체 부품을 단순 조립하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1970년대 중엽부터는 삼성이 웨이퍼 가공 체제를 갖추어 트랜지스터 등 집적회로(LSI) 제품을 생산하였다.
1983년 삼성의 이병철은 반도체사업을 주력업종으로 결정하고 D램 반도체 제조에 뛰어들었다. 재계의 라이벌인 금성사와 현대 역시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 반도체 부문은 재계 최고 그룹의 격전장이 되었다.
 

 

삼성은 1983년 11월과 1984년 10월에 각기 64K D램과 256K D램을 개발했다. 선진국과는 5년 정도의 기술 시차가 있었다. 게다가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의 덤핑 공세로 1985년에 D램 가격이 폭락했다. 1984년 9월 삼성이 첫 출하할 당시 3달러였던 64K D램 반도체 가격은 1985년 8월, 그 1/10인 30센트로 떨어졌다.
삼성의 생산원가는 1.7달러였다. 1985년 삼성은 1,300억 원의 천문학적 손실을 보았으며, 현대와 금성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1986년부터 사정이 나아졌다.
D램 반도체 가격이 오른 것! 정부도 기업의 반도체 투자에 자극받아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일본과의 제품개발 격차를 줄였다. 한국은 D램 개발 착수, 9년 여 만에 미국,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급기야 1990년대에는 D램을 본격적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PC가 급속히 보급되는 추세 속에서 D램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한국산 D램의 대량 주문이 몰렸다. 한국은 1993년부터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달성하고, 전체 반도체에서 미국, 일본에 이은 3위의 생산국이 되었다.
선두 기업 삼성전자는 1995년, 한국 기업 사상 최초로 조 단위 순이익을 기록했다.
 

 


철강업을 위시하여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우리나라가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부는 체계적인 계획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선도했고, 야심있는 기업가들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뛰어난 학습력과 근면함으로 중화학공업을 안착시켰다.
한국인은 선진국처럼 철강, 화학, 기계, 전자공업을 갖고자 했고, 그 성공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이 산업들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로버트 루카스 교수 / 노벨경제학상, 시카고대

수많은 한국인들이 농촌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고, 자녀를 좋은 계층에 넣으려고 했어요. 한국은 그렇게 성공을 이뤘습니다. 한국인들은 늘 더 힘들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조금씩 발전해 결국은 그 분야 최고의 상대와 경쟁하죠.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휴 패트릭 교수 / 콜롬비아대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야망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죠.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요. 그들은 자신과 자녀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리길 바랍니다.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대한민국은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중화학 투자 사업이 수년간 계속 적자를 보거나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난 후에는 큰 성공을 거두고 여느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근 교수 /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장

평가는 그 시간 프레임을 얼마나 짧게, 또는 길게 보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다를 수 있는 거 같아요. 가령 우리나라에 지금 삼성이 (삼성에서 가장 대표되는) 가장 잘한다는 반도체도 7년 동안 적자였거든요. 중화학공업도 똑같은 거였죠. 그렇지만은 7년이라는 적자를 버텨주고 나니까 그 때부터 수입이 생긴 것이고 중화학공업 투자도 단기적으로는 적자였지만 그것을 통해 한국이 많은 것을 배웠고, 실패나 시도 없이는 배울 수 없는 거죠.

 

 

 

중화학공업화는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한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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