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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확립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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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확립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다음의 다섯 가지 기준에 따라 세계 167개국의 민주주의를 평가한다.
 

선거 과정과 절차는 자유롭고 공정한가?
정부의 기능은 합리적인가?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자유로운가?
정치 문화는 발전하고 있는가?
시민은 온전한 자유과 권리를 인정받고 있는가?
 

그 평가 결과는?
 

아시아에서 일본 외에는 유일하게 충실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대한민국!
 

하지만, 대한민국은
두 번의 쿠데타,
두 번의 종신 집권기도,
세 번의 국회 강제 해산,
아홉 번의 헌법 개정 등 파란만장했던 민주주의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출범 이후 굴곡을 거치면서도 전진해 오늘날 충실한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 잡기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
 


서구에서는 몇 백 년에 걸쳐 확립된 민주주의 정치.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일거에 도입되었다.
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 동안 한국인은 주권자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민 국가가 무엇인지,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모른 채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기까지 좌익과의 폭력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기본권과 자유가 침해되는 등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상태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외래 민주주의를 수용할만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 사간원의 간관이 국왕과 관료를 비판, 견제하고 재야의 양반 지식인들도 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공론정치가 행해졌으며, 이는 훗날 지식인과 언론의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구한말에는 의회 개설, 헌법 제정, 공화제 등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을 기본 정체로 택했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 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보통선거가 치러졌다. 등록 유권자의 95.5%라는 놀라운 투표율은 새 민주국가 건설에 대한 국민의 강한 열망을 말해준다.
 

198명의 제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는 같은 해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로 민주주의 제도의 전면 도입과 함께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제헌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은 보통선거제를 채택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를 선택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였으나, 한편으로는 국회가 대통령 선출권과 부통령, 국무총리 인준권을 갖는 내각제적 요소도 있었는데,
내각책임제 정부를 선호한 제헌의원들과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한 이승만의 의견을 절충한 결과였다. 당시 제헌의원 대다수는 무소속으로, 아직 정당은 확립되지 못했다.
 

6.25 전쟁 중 이승만은 재선을 위해 국회가 아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고자 했으나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양측의 개헌 시도가 무산된 후 이승만은 1952년 7월, 경찰과 헌병, 지지단체를 동원해 국회를 굴복시키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관철해 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헌정은 손상을 입었으나,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력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2.
 


이후 이승만 정권은 권위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이는 한편으로는 6.25전쟁의 영향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의 강력한 권력의지 때문이었다.
 

6.25전쟁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경험한 후 반공주의가 절정에 달한 가운데 남한의 정치는 보수 우파의 정치로 단일화되었다.
한국정치사의 첫 야당이라 할 한민당과 그 뒤를 이은 민국당, 그리고 그 다음의 민주당은 지주와 자산가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고, 집권 자유당 못지않게 반공 성향이 강한 정당이었다.
 

군대와 경찰 등 국가 기구는 더욱 공고화되었으며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었다. 이 반공주의는 정치권력의 권위주의화를 촉진했다.
또, 무엇보다도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1945년 9월 좌파마저도 이승만을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했다.
자신이 대한민국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국민과 여러 정파에 자신을 중심으로 뭉칠 것을 요구했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Q.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은?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이 됐을 때 좌익이든 우익이든 할 것 없이 이승만을 다 대통령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적으로도 높은 지지를 갖고 있었던 분입니다. 출발 당시에 이승만은 상당한 정도의 권위가 있었던 사람이죠.

 


신복룡 前 석좌교수 /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노선은?

이승만의 정치 노선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는 공사석에서 마치 실수하듯이 ‘과인이,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나 왕손이’ 이런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그가 이끌어갔던 조각회라든가 내각회의는 마치 왕실의 어전회의 같은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도록 헌법을 개정하며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로써 한 사람의 권력자를 위해 헌법마저 개정하는 1인 중심의 권위주의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의제도의 골격은 유지되었으나, 집권세력의 권력 남용은 더 심각해졌다.
 

 


이정희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이승만 권위주의의 특징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독립시기의 경력, 집안의 혈통, 교육 기반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가지고 있었던 1인의 가부장적인 성격을 근간으로 하는 권위주의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의 추앙을 받는 존재였다.
1956년 자유당의 대통령 선거 포스터 구호는 “위대한 국부 리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다시 모시자” 였으며, 1960년 선거에서도 “나라 위한 80 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또 1955년부터 해마다 3월 26일이면 이승만의 생일을 축하하는 정부 주최의 경축행사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날 관공서는 휴무였고, 야간 통행금지마저 일시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권위주의화 속에서도 민주적 진전은 있었다.
 

첫째로, 여야 정당 정치의 발전이었다.
1950년대 초 대통령 직선제 개헌 과정에서 이승만 지지자들로 구성된 집권당과 반 이승만 세력이 결집한 야당으로 양당 경쟁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정희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한국에서 여야 정당체제가 만들어진 계기는?

양당정치 체제가 제대로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결국 이승만 정치세력에 대한 찬반으로 갈리면서 1955년 민주당이 신익희씨 주도하에 만들어졌을 때 결국 자유당과 민주당이라고 하는 양당체제가 제대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용호 교수 /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한국에서 여야 정당체제가 만들어진 계기는?

60대, 70년대, 80년대의 여야 양당 체제로 가는 것이 거의 전통으로 유지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선거 역시 민의를 반영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1956년 5월에 펼쳐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여야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제 1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서하여 이승만이 무난하게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부통령에는 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의 의석이 대폭 늘어났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유, 평등, 국민 주권의 민주주의 가치를 교육받은 세대가 등장하였다.
6.25전쟁 휴전 후부터 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본격 시행되어 1950년대 말이면 초등학교 취학률이 99%에 달했으며, 중등학교와 대학교 학생 수도 크게 늘었다. 학생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주권 재민과 국민의 기본권, 참정권 등 서구 민주주의의 원칙과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Q. 4.19의 배경으로서의 학교 교육은?

4.19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저는 교육의 힘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을 합니다. 민주주의 교육의 문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를 체득해 나가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야 정당 정치의 발전, 선거의 시행, 민주주의 가치의 교육 등 세 요인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4.19혁명의 추동력이 되었다.
 

1960년에 이승만은 이미 85세의 고령이었다. 그런데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에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차후 그의 사망이나 와병 등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기 때문에 집권 자유당은 반드시 부통령 선거에서 이겨야 했다.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이승만 정권은 유령 유권자 조작, 관권 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3~5인조 공개투표, 기권자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 수 조작 등의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그 덕에 이기붕은 80% 가까운 득표로 부통령에 당선됐지만 국민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 당일 마산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나자 국민은 분노하였다. 특히, 선거 당일 마산의 시위에서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4월 19일,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벌어졌다. 시위 학생과 시민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명의 사망자와 4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에게 사임을 권고했고, 출동한 계엄군은 시위를 방관했다. 이승만은 집권 중 처음 접하는 국민적 저항과 미국의 압력, 군부의 방관 속에 결국 사임했고,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권위주의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용호 교수 /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4.19 혁명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4.19 이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집권세력도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독재를 하면서도 자기네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일시적으로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일시적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죠. 그래서 4.19혁명이 가진 정치적 의미는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국민의 주권의식을 확립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승만 하야 후 야당인 민주당의 주도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얻어 집권했으나, 통치권을 가진 총리직을 두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가 분열했고,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의 정부가 출범한 후에는 그동안 억눌렸던 국민의 요구가 분출되면서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일단의 군부에게는 이것이 기회였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군부는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더 근대화되고 조직화된 집단으로 성장했다. 전쟁 전에는 10만명에 불과했던 군 병력이 1950년대 말에는 일곱배 이상 늘어나면서 군 장교도 함께 급팽창했다.
 

미국은 매년 1천여 명, 총 9천여 명의 군 장교와 하사관을 미국에서 연수시켰다. 이를 통해 군부는 군사기술과 조직 관리의 선진기법을 배우고 합리주의와 효율성을 알게 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습득했다.
 

선진화된 젊은 장교들은 군 수뇌부를 불신하고 갈등했다. 그들은 4.19혁명 이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운동을 벌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군운동의 주역인 김종필이 군복을 벗었고, 박정희도 좌천되었다.
 

장면 정부는 박정희 그룹의 거사 모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 장면 정부와 쿠데타 세력 사이에 양다리를 걸침으로써 장면 정부는 이미 내부에서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그룹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김포 해병대 여단병력을 비롯해 3,600명의 소규모 병력이 육군본부와 정부 주요 기관, KBS방송국을 점령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 중 누구도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장면은 은신했고, 윤보선은 주한미군 사령관의 진압 명령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미국도 쿠데타를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5.16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초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사회혼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경제 개발에 착수했다.
아울러 박정희 군사정부는 선거를 통한 민간 정부로의 변신을 꾀했다. 이를 위해 정권 보위 기구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군부의 선거참여를 위한 정당을 조직했다.
 

1962년 12월, 정부 형태를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제로 바꾼 개헌안이 국민 투표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1963년 10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민주당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누르고 승리했다.
득표수는 박정희 470만 표, 윤보선 455만표, 불과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의 승리였다.
이렇게, 쿠데타 군부는 직접 통치 대신 민정으로 전환했으니, 군의 유사민간화였다. 이로써 민주주의 정당정치와 대의제도가 다시 복원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쿠데타 첫해부터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2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196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과 만나 일본이 한국에 지원할 금액의 규모 등에 관해 합의했다.
이후 새로 출범한 박정희 정부는 1964년 봄, 회담 타결을 서둘렀다.
 

이를 매국 굴욕 외교라 본 야당과 대학생들은 강력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64년 3월 이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를 아무 대안 없는 반대일 뿐이라 여긴 박정희는 군을 동원해 진압하였다.
 

6월 3일, 또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서울 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듬해 8월,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내려졌다.
이처럼, 초기에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박정희는 군을 동원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1965년경부터 경제개발이 본 궤도에 올랐고, 그에 힘입어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박정희 569만 표, 윤보선 453만표 득표로 116만표의 큰 차이가 났다.
 

곧 이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부정선거 논란을 일으키면서까지 개헌 요건인 국회의석 3분의 2이상을 차지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에 나섰다. 3선 개헌에 대해서는 당내 2인자였던 김종필 지지 세력이 반발하고 야당, 학생들이 강력히 저항했으나, 박정희는 다시금 중앙정보부와 군을 동원하여 3선 개헌을 단행했다.
 

그리고 1971년 대선에서 젊은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의 도전을 물리치고 3선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1960년대 말, 70년대 초, 미중 화해를 비롯한 국제 정세의 급변 속에서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개발의 지속을 명분으로 그 이상의 장기 집권을 추진했다.
 

북한은 특수군을 보내 청와대를 습격하는 등 대남 군사도발을 강화했지만, 월남전에서 실패한 미국은 향후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주한 미군의 철수를 시작했다.
또 미국, 일본과 중국 간의 국교정상화 교섭 등 냉전체제의 해빙이 시작되었다. 박정희에게 이는 최고의 안보위기이자 국가의 위기였다. 그는 자신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계속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다시 한 번 군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계엄령 하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제 국민의 직접 선출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국민은 정부 선택권을 빼앗긴 것이다.
또 대통령은,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 등의 비상대권을 보유하며 국회 의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사실상 임명하는 권한도 가졌다.
이로써 대의제 민주주의와 3권 분립은 껍데기만 남았다. 오직 박정희 1인만 집권 가능하고 그에게 온갖 권한을 집중한 새로운 통치체제인 유신체제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1973년 2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유신체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집권 공화당은 39%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통일당의 득표율의 합계는 43%나 되었다.
 

그해 여름에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가을부터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학생과 재야 지식인, 종교인들은 유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개헌 서명 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철권으로 탄압하고 반대자를 처벌했다.
 

1974년에는 전국의 대학생 학생운동 조직 등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트렸으며, 인혁당 관련자 등 8명이 이듬해 사형판결을 받고 바로 집행되었다.
 

1975년 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이 연이어 공산화되었다. 한 지역이 공산화되면 인접 지역도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안보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9호를 선포하며 국민의 눈과 입을 막고 손과 발을 묶었다.
이로써 권위주의 체제는 일시 안정되었다.
그 사이 전면적 중화학 공업화와 더불어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어졌다. 1976년에서 1978년까지의 호경기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위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1977년 등장한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를 내세우며 한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비판하였고, 이에 자극받아 민주헌법으로의 개정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재개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은 깊어졌다.
 

다수 국민은 유신체제 하의 제한된 선거에서나마 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심판하고자 했다. 1978년 말 총선에서 국민은 집권 여당보다 야당에 더 많은 표를 주었는데 이는 민심이 정권에서 떠나고 있음을 뜻했다.
 

 


윤성이 교수 /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78년 말에 야당이 더 많은 득표를 하게 된 이유는?

1970년대 경제성장을 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안정화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중산층을 만들어내게 되고 국민들의 의식을 향상시키게 됨으로써 비판 정신과 저항 정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1970년대 경제호황이 박정희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중산층을 길러내고 저항세력을 조직화 하는, 박정희 정권으로 봤을 때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Q. 야당득표율이 높았던 1978년 국회의원 선거의 의미는?

1978년에 12월 야당이 득표율에서 앞서면서 정국이 사실은 그 이후부터는 굉장히 요동치게 되는데요. 10.26에 대한 출발점이 됐던 사건은 결국 1978년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이듬해 1979년 5월, 김영삼은 선명 야당을 내걸고 야당의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영삼은 반유신 투쟁의 선두에 섰다.
같은 해 8월,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의 여공들이 폐업 철회 등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중 경찰의 강제 해산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김영삼은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 대해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박정희는 이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의원직에서 제명토록 하였는데, 이러한 강경 조치에 대해 10월,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이 대거 항의하였다.
그 수습과정에서 권력 핵심부의 분열이 일어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었다.
 


4.
 


그 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열망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맡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군부 강경파는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했다.
1980년 봄, 신군부가 정권 찬탈을 엿보는 가운데서도 과거 긴급조치 관련자가 사면 복권되고 제적학생이 복교했다. 계엄해제와 정치일정 제시 등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신군부는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야당 인사를 체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일체의 시위를 금지했다.
 

이튿날인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의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이 벌어졌다.
지역의 학생과 시민은 김대중의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계엄군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차별 가격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일부 시위대는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까지 했다.
시위대의 기세에 밀린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일단 철수했지만, 27일 새벽, 광주 시내에 다시 진입해 무력으로 시민을 학살하면서 진압했다. 이 사태로 200명 가까운 민간인과 군인, 경찰이 사망했다.
 

그 후 전두환 신군부는 집권 작업을 가속화했다. 이들 역시 유사 민간화의 과정을 밟았다. 유신헌법을 개정했으나, 대통령 간접 선거제로, 정부선택권은 국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또 한 번의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언론·출판, 집회 및 시위의 자유와 노동3권도 심하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제5공화국은 대통령 단임을 서약하고 과거와 달리 1인 권위주의로부터는 탈피할 조짐을 보였다.
 

 


윤성이 교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전두환의 5공 정권이 이승만, 박정희의 1인 권위주의 체제와 다른 점은?

전두환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으로 출범하면서도 7년 단임제라는 것을 대국민적으로 약속했었고 그래서 향후에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갈 것이라는 여지를 주는 그러한 권위주의 체제였습니다.

 

 


5.
 


하지만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초는 갈수록 단단해졌다.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국민 소득이 증대되었고,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 교육까지 받은 고학력, 고숙련, 고임금 인력이 대거 배출되어 두터운 중산층을 이루었다. 이들은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자각하고 민주주의의 실천을 원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 2월 26일 방송 MBC 뉴스데스크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방해 책동에 대비해 공항과 항만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목요일밤 MBC 뉴스데스크입니다.”
     “전두환대통령은...” 

 

 

이들에게 ‘체육관에서 선출하는 대통령’, 저녁 9시의 ‘뚜뚜전 뉴스’, ‘땡전 뉴스’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학생운동은 오히려 더욱 확산되었다.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 성립을 미국이 도왔다고 주장하며 반미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사회주의혁명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는 세력도 등장했다.
1983년 김영삼은 언론통제 해제 등 민주화 다섯 개 조항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고, 이는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신군부 정권의 강력한 경제안정화 조치와 세계 경제 회복 등에 힘입어 경제는 성장 기조를 되찾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집권 세력은 1983년 말부터 반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의 해직 교수가 복직되고 제적 학생이 복교되었으며, 옛 야당 정치인들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화국면이 조성되었다.
 

이제 옛 야당 정치인과 학생, 지식인의 민주화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가택연금에서 풀린 김영삼과 사형에서 감형되고 미국으로 보내진 김대중은 1984년 5월, 민추협,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각종 성명서 발표나 집회를 통해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들이 새로 만든 야당은 1985년 2월 총선에서 큰 지지를 받아 일약 제1야당이 되었다.
새 야당은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회복하는 직선제 개헌 운동을 시작했다. 대학가 학생운동의 핵심 세력은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지향했으나, 당면 과제로서 제도권 야당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이와 함께 운동권 학생들은 노동자 의식화 투쟁에도 힘썼다.
 

그러던 중, 시위학생과 노동운동 참여 학생을 색출, 검거하려던 경찰이 여대생을 성고문하거나 대학생을 고문 끝에 사망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1986년 7월에는 부천경찰서의 경장이 위장 취업한 여대생을 성 고문한 사건이 터졌다.
1987년 1월에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사관들이 연행 학생을 고문 폭행하다 사망케 했다.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에 분노했고, 이제 직선제개헌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의원내각제 개헌이 여의치 않자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기존의 대통령 간선제 헌법을 유지한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는데, 이는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완전히 거스르는 일이었다.
그 후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하다가 사망하게 만든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한 사실이 폭로되자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1987년 6월, 가톨릭 등 종교계를 필두로 광범위한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전까지의 민주화운동이 학생과 야당 당원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일명 넥타이 부대라 불리는 일반 직장인까지 반정부 집회 시위에 가세했다. 이 끓어오르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었고, 군이 진압에 나서는 경우 제2의 광주사태와 같은 일대 파국이 우려되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집권 세력은 최종적으로, 군을 동원하는 강경책보다 직선제를 수용하는 타협책을 선택했으니, 바로 6.29선언이었다.
 

 


김용호 교수/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집권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이유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을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이고 자기네들도 그 뒷감당을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무산될 수도 있는 그러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서 집권세력은 정치적인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죠.

 

 

곧, 여야 합의로 대통령 직선제 등을 규정한 민주헌법이 마련되어 국민 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타협에 따른 평화적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6.
 


직선 개헌 후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의 동시 출마로 집권여당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이는 집권 세력 내의 권력 승계였지만, 국민의 선택을 거쳤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 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5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과거 야당의 민주화 투사로서 집권 여당에 합류한 김영삼이 승리함으로써, 무려 30년 가까이 지속된 군부 출신 대통령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 후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또, 40년 가까운 시간을 야당정치인으로 보낸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은 여야 정권 교체가 절반쯤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는 집권 기간 중 군대내 사조직을 척결하고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과거의 집권세력인 신군부를 단죄하는 작업도 함께 벌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이 야당 후보로는 최초로 승리했다. 이는 출신지역과 지지계층 면에서도 최초의 실질적인 정권교체였다.
이어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같은 민주화세력 출신인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5년 후인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이명박이 승리하여 다시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12년 선거에서도 같은 당 출신의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평화롭게 진행되고, 두 번이나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고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군부 시대가 남긴 권위주의 정치 유산은 거의 다 청산되었다.
이제 한국 정치에서 군부나 극우세력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위협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형식이 먼저 갖춰진 후 그 내용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선거에 의한 국민의 대표 선출 및 3권 분립, 정치적 자유 등의 제도가 도입되었으나, 그 내실을 갖추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인은 대가를 먼저 지불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손에 넣은 후 나중에 그 값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형식 덕분에 내용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민주공화제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큰 틀은 계속 유지되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인 선거는 계속 실시되었고,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김용호 교수/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특징은?

우리나라의 정당정치와 선거는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거의 중단 없이 정기적으로 계속되어 나온 것입니다. 다른 남미 국가나 동남아 국가에서 권위주의 체제는 군부가 집권하고 난 이후에 선거나 정당을 없애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군부가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통치를 하는 바람에 정기적으로 선거를 했어야만 했고, 또 정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계속 유지해 나온 것입니다.

 

 

선거 결과, 곧 국민의 의사는 정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당과 학생, 지식인, 종교인 등이 참여한 민주화 운동은 그로부터 지지 동력을 얻었다.
경제발전과 사회 문화의 발전은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고,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형성된 중산층은 민주주의의 핵심 지지층이 되었다. 중산층은 경제 발전과 어울리지 않게 뒤떨어진 권위주의 정치를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강력히 지지하자 군부 권위주의는 마침내 퇴장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운동권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 올림픽 개최와 같은 상황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1987년에 발생한 고문치사 사건은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으며, 올림픽 개최가 임박하자 집권세력은 강압조치를 쓸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점진적, 타협적인 민주화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이후의 전개 방향이 분명치 않았지만, 사회적 혼란을 줄이면서 전진할 수 있었다.
이처럼 1948년 민주헌정제도가 도입되고, 1987년에는 그 내실이 갖춰지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민주주의의 내실을 채우는 것이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Q. 더욱 성숙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민주화라는 게 어느 시점에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가야되는 거죠.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성취 했고, 공고화 단계로 갔고, 이제는 심화되는 형태로 한걸음 더 진전되어 나가야 되는데 공동체가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고민도 같이 가야만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공동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권리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의 고민들이 같이 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민정치교육 같은 것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윤성이 교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Q. 더욱 성숙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일반시민들의 참여라는 부분이 상당히 부족하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굉장히 취약한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현실입니다. 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어떻게 활성화 시킬 것이냐, 그리고 일반시민들의 생활정치의 참여 부분을 어떻게 확산시킬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부분들이 이루어질 때 우리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사회 갈등의 조정 장치로서 정치의 기능을 높이는 일, 안정적 리더십을 구축하는 일, 그리고 정치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시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을 강화하며, 정치 과정에 대한 시민의 참여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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