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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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INDEPENDENCE, WHEN THAT DAY COMES

기 간 : 2019.02.22. (금) ~ 2019.09.15. (일)

장 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 관람문의 : 02-3703-9200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독립 만세를 외치다 Shouting “Hail Independence!”
1919년 3·1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출발이었다.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지배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그 억압에 저항했다. 독립 만세는 저항과 자유의 외침이었다. 사람들은 함께, 때론 혼자라도 선언서와 격문을 쓰고 만세를 부르며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대한 운동을 만들어갔다. 이러한 주체적인 참여 경험은 이전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전시이미지
1.사진:기미독립선언서, 1919 2.사진:조선독립신문 제 42호, 1919.8.20, 진관사 제공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The Numerous Unknown Faces
학생, 종교인, 농민, 노동자, 가마솥장사꾼, 두부장사, 포목상, 날품팔이, 무직자 할 것 없이 독립의 열망만 있다면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들이 외치면 일상의 공간은 혁명의 공간이 되었다. 남녀노소, 계층과 지역을 넘어 한 마음이 되었고, 이것은 3·1운동을 이끈 힘이었다.
전시이미지
1 사진 : 고등법원 형사재판서원본, 1919, 국가기록원 제공 2 사진 :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판결서, 1919, 국가기록원 제공
가슴에 품은 3월 1일 March 1st Held Dear
1919년 3월 1일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마치 하나가 된 것 같았지만, 보고 들은 것도, 부른 만세의 의미도 같지 않았다. 모두에게 잊기 어려운 날이었다. 그날의 경험으로 어떤 이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어떤 이는 이 땅을 떠나 돌아올 수 없었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간 이도 있고, 상처와 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 사람도 있었다. 친일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삶을 엿볼 수 있는 열일곱 명의 이야기를 여기에 펼쳐놓았다. 이들이 들려주는 3·1운동과 그 이후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전시이미지
1 사진 : 김원벽,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1919, 연세대학교 박물관 제공 2 사진 : 한위건,「ML당 사건의 한위건 중국관헌에게 피검」,『동아일보』, 1933.6.20. 3 사진 : 김대우, 친일인명카드 4 사진 : 류준근, 덕수궁국장화첩 德壽宮國葬畵帖 5 사진 : 김윤식, 한국병합기념장 韓國倂合記念章 6 사진 : 김진우,선면 묵죽, 1942, 최열 7 사진 : 김마리아, 2·8 독립선언서, 1919, 독립기념관 제공 8 사진 : 김경천, 김경천과 아내 유정화, 1911, 학고방 제공 9 사진 : 류자명,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독립기념관 제공 10 사진 : 심훈, 그날이 오면, 1949, 함태영 제공 11 사진 : 이미륵, 압록강鴨綠江은 흐른다(한글판), 1959,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12 사진 : 김법린, 김법린 친필 이력서, 1963, 김태연 제공 13 사진 : 유봉춘, 유관순 영화 포스터, 1959 14 사진 : 박래원, 박래원 공판기일 통지서, 1962.1.15, 박명도 제공 15 사진 : 정석해, 4·19혁명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교수단, 경향신문 아카이브 제공 16 사진 : 최은희, 3·1절 기념 위로연에 참석한 3·1운동 당시 징역 할머니들, 1960, 탐구당 제공
3·1운동의 깊은 흔적 The Legacy of the March 1st Movement
3·1운동의 기억은 다음세대에도 이어졌다. 사람들은 저항과 참여, 그리고 정당함의 상징으로 3·1운동을 다시 불렀다. 1919년의 물결은 여전히 우리 곁에 흐르고 있다.
전시이미지
1.사진: 3·1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 1979.3.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2.사진: 대한민국 헌법, 1948 3.사진: 이응노 군상, 1983, 가나문화재단 제공

2부. 임시정부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 상하이 The Peopl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Longing for their Homeland
20세기 초반의 중국 상하이는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국제도시였다. 상하이가 중국 신해혁명의 거점이자 활동지였던 만큼 현지의 혁명가들 뿐 아니라, 다수의 약소민족국가 망명가들과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하거나 거주하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된 조계 구역이 있었다. 한국인들에게도 상하이는 임시정부, 거류민단, 의열단 등의 단체들이 근거했던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전시이미지
1.사진: 최신상해지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2.사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5-1호)
상하이에서 살아간다는 것 Getting by in Shanghai
상하이의 삶은 기후 적응부터 의식주 해결에 이르기까지 매순간이 위기이고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실력양성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생계와 독립운동을 위해 직업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한편 이국에서의 기념일은 임시정부와 교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행사이자, 독립운동의 사명과 결의를 다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시이미지
1.사진: 독립신문_「상해의 삼일절」 2.사진: 직업군상 일러스트
사람에 울고 웃다 People the Cause of both Joy and Sorrow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를 모두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온갖 비난과 반대 의견을 전단에 담아 국내외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임시정부가 가장 경계했던 대상은 밀정이었다. 조국을 배신한 밀정 활동은 임시정부와 요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전시이미지
1.사진: 독립신문_「칠가살」 2.사진: 독립신문_「동포의 은인 피박사」 3.사진: 김붕준의 트렁크(김임용 소장)

3부. 고향, 꿈을 꾸다

고향, 꿈을 꾸다 Dream of Homeland
전시이미지
1 사진 : 중국·인도-타지에서 세우고 지킨 나라 2 사진 : 멕시코·쿠바-조국의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꼬레아노들 3 사진 : 미국-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퍼져나간 독립운동의 씨앗 4 사진 : 러시아-고려인의 고향이자 무장투쟁의 최전선 5 사진 :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 새로이 가꾸는 삶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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