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립 영웅 - 김경천 편 자막>
[상황]
1917년,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러시아 내전
[상황]
일본군과 연합한 러시아 반혁명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존재가 있었다
[상황](쾅쾅 박히는 효과)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진"
"전멸"
[강조](세로로 튀어나온 한자 왼쪽에 크게 발생)
군
신
김
장
군
[프로필]
김경천(18881942)
연해주 수청 고려의병대 총사령관
[네임수퍼]
최불암 / 배우
[말]
일본과 연합한 러시아 반혁명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김경천 장군
그는 일찍이 조국을 지키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상황]
1909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학
[상황]
적을 제대로 알아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
/ 일본군의 장교가 된다
[상황]
3.1운동이 시작되자
목숨을 걸고 탈영해
만주로 간 김경천
[강조]
적군의 군복 속에 감춰온 비장의 계획을 실행한다
[상황](한줄씩 강조하듯 박히는 효과)
1920년 창해청년단 조직
연해주 독립군의 사령관으로 활동
[강조]
그의 별명은 '백마 탄 김 장군'이었다
[상황]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러시아 혁명군과 손을 잡았던 김경천과 독립군
[상황]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 200여 명을 사살
1920년 5월 18일
[상황]
독립군 200명으로 700여 명 러·일연합군에 승리
1922년 1월 6일
[인용]
'탄환이 비 쏟아지듯 하는 속에 말을 타고 서서 지휘하는데 백군들이 대포를 놓다가 불빛에 나를 보고
'꺼레이츠(조선인)'란 소리를 치며 달아났소"
동아일보, 김경천 장군 인터뷰 1923년 7월 29일 기사
[상황]
1922년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무장해제 당한 독립군
[상황]
스탈린 독재 아래 정치범으로 몰려 러시아 수용소에 수감된 김경천
[상황]
강제노동과 영양실조 끝에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설명]
김경천 장군이 그린 고향 집
[말]
평생 고향의 품으로 돌아올 그 날을 기억하며 이역만리에서 당당하게 무력투쟁을 벌였던 김경천 장군
유해마저도 돌아오지 못한 채 끝내 시베리아 벌판의 별로 남았습니다
[인용]
뜬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시베리아의 별> 김경천
<나의 독립 영웅 안창남 편 자막>
(말자막)
서울 여의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하늘길이 있었습니다
/ 일제 강점기였던 1916년
(이름자막)
이영표 /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말자막)
여의도 공원에 세워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
/ 이곳에서 조선 최초의 에어쇼가 있었습니다
(자막)
1922년 12월 10일
/(후발) 여의도에 모여든 인파 5만 명
(자막)
그날, 사람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 억압받던 조선의 하늘을 훨훨 나는 한 대의 비행기
(자막)
한반도 하늘 위
최초의 환희
(자막)
조종사는 비행기의 몸통엔 한반도를
꼬리날개엔 금강산의 모습을 그리고
'금강호'라 이름 붙였다
(프로필자막)
안창남 (1901~1930)
한반도를 비행한 최초의 조선 비행사
대한독립공명단
중국 산서비행학교장
(자막)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발) 비행술과 비행기 제작기술을 배운 안창남
(자막)
<개벽> 1920년 12월
(자막)
안창남의 기고문 <오구리 비행장에서>
(자막)
이제라도 해외 곳곳 남의 틈에 섞여서 비행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여 주십시오
/ 우리 조선 청년은 근래에 무엇이든
다른 나라 사람에게 조금도 지지 않는다는
기쁜 소리를 여러 방면으로 듣습니다
(자막)
안창남은 일본인보다 뛰어난
신기술을 가진 자신의 존재가
동포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랐다
(말자막)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하늘을 난다는 것은
/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 그는 하늘을 날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막)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마는
/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지...
잡지 <개벽> 안창남의 기고문 중
(자막)
비행기술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남
(자막)
중국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 가입
(자막)
<동아일보> 1929년 4월 20일
/(후발) 1929년 단원들을 조선으로 잠입시켜
우편 수송 차량에 실린 현금 탈취 시도
(자막)
이들을 뒤에서 지원했던 안창남
(자막)
제남에서 안창남 씨에게
6백 원을 위선 받아
(자막)
그는 대한독립 공명 단원들과 함께
항공 독립군을 양성할
비행학교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자막)
이영표 /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말자막)
항공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던 안창남 선생의 꿈은
/(후발)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 하지만 식민지배로 암울하고 답답했던 당시
/ 움추러들었던 가슴을 펴고 하늘을 보게 해준
그 이름 '안창남'은
/ 바로 이 노래처럼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마리아 편 자막>
(장소)
정신여자고등학교
김마리아관
(상황)
70여 년 전 한 여인이 남긴
저고리 하나
/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달랐다
(말)
일본형사들이 인두로 지지며
고문을 했다고 합니다
(네임수퍼)
배우 박지영
(말)
한쪽가슴이 없었던 거예요
(프로필)
김마리아 (18921944)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발췌)
2월 8일,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 800명이 모여
청년독립단 선언서를 발표
독립신문 1919.8.26.
(발췌)
2.8 독립선언
전조선 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말)
2.8 독립선언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의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
학생들은 특사를 조국으로 급파합니다
/
그게 바로 김마리아였죠
(프로필)
[김마리아]
동경 여자학원 고등과
동경 여자 유학생 친목회장
(상황)
기모노 허리띠에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입국한 김마리아
(상황)
3월 1일, 들불처럼 일어나 조선을 뒤흔든
독립 만세의 함성
(상황)
5월까지
만세운동 약 1,500회
참가자 200만 명
(상황)
3월 6일 김마리아 체포
(상황)
일제는 처참하게
김마리아를 고문했다
(인용)
"너희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못 빼내리라"
(상황)
1919년 9월, 최초의 전국적 여성 독립운동 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성
(인용)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발췌)
"2천원은 비록 적사오나
우리민족을 위하여 빛나게 쓰시옵소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상황)
독립전쟁에 대비해
결사부와 적십자부 설치
(상황)
또 다시 체포, 치욕적인 고문이 이어졌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인용)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
김마리아를 심문한 일본검사
(상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거쳐
귀국 후 학생들을 가르친 김마리아
(인용)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장소)
정신여자고등학교
김마리아관
(네임수퍼)
배우 박지영
(말)
일제는 한국 여성의 존재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고
/
여성을 굴복시키면
곧 그 다음 세대인 자녀들까지 굴복시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설명)
김마리아의 유품
(말)
김마리아는 온 몸을 던져
한국 여성의 의지와 저력을 보여준
/
그 누구보다 강인한 독립투사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 허은 편 자막>
(상황)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 경북 안동
(상황)
3대에 걸쳐 배출된 독립운동가 총 10명
그 중에 한 여인이 있다
(프로필)
허은 (19091997)
: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말)
고성 이 씨 가문의 허씨 부인
/
그녀는 독립운동가를 아홉 명이나 배출한
이 집안의 며느리였습니다
(네임수퍼)
배우 김영옥
(설명)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허은 회고록
(말)
그녀 역시 의병장을 배출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었죠
(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항일운동을 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
이상룡 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혼인을 시켰습니다
(프로필)
이병화 (19061952)
: 독립운동가
(인용)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허은 회고록
/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 되었겠는가"
허은 회고록
(설명)
시할아버지 이상룡
(상황)
만주의 무장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를 이끌다
(상황)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던 시댁
(인용)
"조직원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 해도
큰 역사(役事) 였다"
허은 회고록
(상황)
찾아오는 이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기도
버거웠던 형편
(상황)
단춧구멍 일감을 가져다가
부업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하기도 했다
(상황)
배고픈 이에겐 밥을,
추운 이들에겐 옷을 지어줬던 허은
(상황)
1932년 시할아버지 사망 후
고향에 돌아온 허은
(상황)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일제의 낙인
(상황)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에 시달렸던 가족들
(상황)
하지만
항일의지를 꺾지 않았다
(상황)
관공서 습격
(발췌)
관공서 습격한 이병화
(상황)
남편 이병화 투옥
(상황)
마침내 1945년 해방
(말)
독립군들에게 밥과 옷을 지어주던
독립군의 어머니
/
그녀에게도
일곱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
해방된 조국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상황)
허은의 자손 6남 1녀 중
4명은 생활고로 사망
/
나머지 3명 중 2명은
가난 때문에 고아원에서 자랐다
(인용)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허은 회고록
/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 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허은 회고록
(상황)
하지만 그녀는 훗날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인용)
"지나온 구십 평생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나의 독립 영웅 윤세주 편 자막>
[상황]
1919년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가 열린 날
[상황]
일본인 교장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 변소 구더기에 내다꽂았던
열한 살 소년.
[강조, 인용]
"더 이상 노예화 교육을 받기 싫다!"
(발생)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윤세주
[프로필]
윤세주(19011942)
의열단 창립단원
조선의용대 총사령관
[네임수퍼]
이만기 / 전 씨름선수
[말]
열한 살 어린 나이에도 식민화교육을 당당히 거부했던 소년, 윤세주
/열아홉 청년이 되자
밀양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합니다
[상황]
만세운동 주동자 검거령을 피해중국으로 망명
[말]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최연소 창단멤버가 됩니다
[상황]
의열단은 일제의 무력에 대항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창단
[상황]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를 계획한 윤세주와 의열단
[상황]
1920년 국내침투
[상황]
하지만 (발생)일본 경찰에게
거사에 쓰일 폭탄과 무기 발각
※기사 맨 오른쪽에 있는 '밀양폭탄사건' 튀어나오는CG
[설명]
동아일보 1922.06.08
[상황]
윤세주 징역 8년 구형
※기사사진 화면에 확대되서 발생 CG
[상황]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법관에게 경고했다
[말,인용]
제 1차 계획은 불행히도 실패하여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기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달성할 날이 있을 것이다
윤세주의 재판정 발언
[상황]
6년 7개월
(선행)잔혹한 고문을 견뎌냈다
[상황]
1932년 중국
[상황]
출옥 후 난징으로 망명
윤세주는 독립 투쟁에 더 깊숙이 뛰어들었다
※사진, 윤세주 얼굴 도드라지게 CG(김원봉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이 있어서 김원봉 이름 빼야할 것 가탕요)
[상황]
세계 각국 독립군 단체를 통일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
[상황]
일본군으로부터 민족혁명당을 지켜내기 위해
(발생)무장독립운동단체 조선의용대 편성
[상황]
1939년 일본군과 대치하는 최전선
[상황]
중국 북부지역에서
통신 교량시설 및 탱크 파괴
[상황]
적진에 침투
심리적 압박을 주는
선전활동 전개
[상황]
1942년 5월 29일
[상황]
조선의용대를 잡기 위해
일본군 20개 사단 총출동
[강조]
태항산 진격
[강조]
일본군 40만 명 VS 조선의용군 3천명
[설명]
최후의 결전
윤세주 작사
[군가 가사]
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상황]
윤세주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소수 정예요원으로 일본군 기습 공격
[상황]
하지만 (발생)윤세주는 작전 도중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상황]
그가 대원들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강조,인용]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길 바란다"
[말]
그는 독립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고
자신을 희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 희생으로 만들어진 세상
[설명]
윤세주의 묘
중국 태항산
[말]
우리는 윤 세 주
[말]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음이 죄송합니다.
나의 독립영웅 '김산' 자막
(네임수퍼)
윤성빈/ 스켈레톤 국가대표
(말)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영혼이 담긴 노래입니다
/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됩니다
(상황)
이 책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얘기였다
(설명)
님 웨일스(Nym Wales)
<아리랑의 노래> 저자, 미국의 저널리스트
(프로필)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
조선민족해방동맹 소비에트지구 주재 대표
(상황)
독립운동을 위한 가명만 15개
(상황)
김산이란 마지막 가명으로
자신의 삶을 털어놓았다
(상황)
1919년 3.1운동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김산
(인용)
"나는 흥분한 나머지 하루 종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3월 1일에 끼니를 잊은 조선인이 수백만 명은 될 것이다."
(말)
3.1 만세운동 이후 무수한 국민들이 거리에서 학살 당합니다
/ 평화적 시위로 조국의 독립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짓밟힌 김산은 압록강을 건넙니다
(상황)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중국 혁명에 가담
(상황)
그는 이 혁명의 끝에
조선의 독립과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인용)
"조국을 생각할 때면 우리의 가슴은 미래로 달렸다.
이 전쟁은 동시에 우리의 조국을 방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
조국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에 동조했다고 진술
1929년 중국 국민당 경찰에 체포 후
(상황)
중국 국민당 경찰은 그를
일본 경찰에 넘겼다
(상황)
모진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김산
(상황)
극한의 상황에서 그가 새긴 한 마디
(인용)
나는 이곳에서 또다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고 쓰고 내 이름을 서명했다
<Song of ARIRAN>, 김산/님 웨일스 1941년 작
(네임수퍼)
윤성빈/ 스켈레톤 국가대표
(말)
김산에게 아리랑은 조국이자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고비를 열두 번 넘어서면
광복이라는 마지막 고개에 도착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상황)
출소 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
(인용)
"전쟁이란 상황이 벌어지기만 하면 저는 곧바로 만주로 가서
그곳의 조선인 항일 무장독립운동을 지도할 작정입니다."
(상황)
그러나 김산의 아리랑은 끝내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했다
(상황)
김산은 1938년 만주에서 일제 스파이로 몰려
중국 공산당원들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
누구보다 열렬하게 조국을 사모했던 김산
/ 조국에 대한 그의 마음은
정이자 한이자 눈물이었던 아리랑, 그 자체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정이형 편 자막>
(말)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는
총 9만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수감됐었습니다
/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외로운 투쟁을 했던 그들
/
그중에는 무려 19년 동안
투옥된 분도 있었습니다
(네임수퍼)
국악인 남상일
(발췌)
대혼란 일어난 재판정
/
"재판장이 경어를 쓰지 않는다"하여
심리를 거절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
재판장 홀로 조서 낭독
전례 없던 우물쭈물 휴정 선언
(상황)
그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고려혁명단원
정이형이었다
(프로필)
정이형 (18971956)
: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
: 고려혁명당 위원
(상황)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떠난 한인들
(상황)
만주의 의병들이 서울로 진격
(상황)
일제를 몰아내는
서울 진공작전 전개
(상황)
정의부 의용군의 제6중대장
정이형
(상황)
그는 독립전쟁 최일선에서
전투를 펼쳤다
(인용)
"1924년,
경찰 출장소를 향하여 난사,
전부 소각"
정이형, 신의주 형무소 공판 판결문
(상황)
1927년 하얼빈
(상황)
대대적 체포 작전으로
일경에게 붙잡힌 정이형
(상황)
1928년 2차 공판
(발췌)
"피고는 역시 공술을 거절"
1928년 2월 9일 동아일보
(말)
부당한 식민통치에 맞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 정이형 선생은
/
일본 재판부의 심판을 거부했습니다
(상황)
사형
(상황)
사형을 구형한다는 말을 듣고
빙그레 웃을 뿐
조금도 공포의 기색이 없었다
(상황)
1928년 4월
무기징역 선고
(상황)
그에게 옥중 생활은
또 하나의 투쟁
(상황)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편지가 전부였다
(인용)
"가정의 은택을 맛보지 못하는
문경에게"
/
"아버지는 장소의 불길과 편지의 부자유도
모다 불구하고 이 편지를 보내오니"
/
"여성의 의지는 강제품같이
강인하여야 함이라"
/
"아모리 꺾여도 꺾이지 않고
아무리 밟아도 밟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함이다"
(상황)
일제강점기
국내 최장기 수감자 정이형
(상황)
1945년 8월 17일
광복과 함께 출소
(상황)
해방 후에도 정이형은
친일파처리 특별법 제정위원장으로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다
<나의 독립영웅> 황병길 자막
(상황)
한반도, 중국, 러시아가 만나는 곳 (후발)훈춘
(네임수퍼)
박중훈 / 배우
(말)
삼국이 만나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훈춘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장소였습니다
(말)
이곳에 훈춘 호랑이라 불리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프로필)
황병길 (18851920)
훈춘의용대 사령관
(상황 총알 박히듯이 자막 박히게)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14명을 홀로 사살
(강조)
'훈춘 호랑이' 황병길
(인용)
"황병길 장군"
신한민보 1919년 7월 10일
(인용)
"열혈 용감"
신한민보 1919년 6월 17일
(상황)
1909년, 안중근과 함께피로써 대한독립을 결의
(상황)
훈춘 순경국에서 일하며
독립군 지원
(상황)
1912년, 신풍학교 건립
(후발) 조선족 사립학교 10여 개 개교
(상황)
졸업생들은 독립군으로 무장투쟁
(강조)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
황병길은 만세 시위의 열기를
훈춘으로 확산시켰다
(인용)
"완전한 독립군의 국민이 되는
희열을 느끼니 제군과 함께 만세를 부르자."
황병길
(상황)
5천여 명의 한인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
(상황)
이후 북간도 지역의 만세운동은
무장투쟁으로 발전
(상황)
1920년 황병길은1,300여 명의 의용군과 국내로 진격
(상황)
함경북도 일대에서 왜정 기관을 폭파
(상황)
일본 밀정 살해
(상황)
일제를 압박했다
(상황)
꾸준히 모아온 군자금으로 무기구입
(상황)
훈춘과 연해주의 무장투쟁 세력을 연합
(상황)
세력을 점점 더 키우자
(강조후발)황병길은 일제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인용)
"모든 반일투쟁이 황병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상황)
그를 잡기 위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린 일본군
(상황)
집요한 추적 끝
(상황)
1920년 6월 1일
억수 같은 폭우가 내린 날
(상황)
훈춘 호랑이 황병길은 중국 북간도에서
서른다섯 항일투쟁의 삶을 마쳤다
(인용)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굳세게 싸우시오"
(말)
항병길 장군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탁월한 전략으로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의새 장을 열었던 훈춘 호랑이 황병길
/그가 남긴 항쟁의 포효는 많은 독립군에게 이어져
무장 투쟁의 전설이자 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상옥 편 자막>
(상황자막)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 됐다
(인용자막)
<동아일보> 1923년 4월 12일 '가공할 위력의 폭탄'
(상황자막)
일본 경찰은 범인을 지목했다
(프로필자막)
김상옥 (1889~1923)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단원
비밀결사 <혁신단> 결성
(네임수퍼)
이제석/ 광고인
(말자막)
일제 치하 종로경찰서는 우리 민족에겐 울분이 서린 곳이었습니다
/ 한용운, 안창호 선생 등을 가두고 극악하게 심문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죠
/ 그곳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상황자막)
3.1운동을 계기로 비밀결사 <혁신단> 창설
(상황자막)
지하독립신문 <혁신공보> 발행
(상황자막)
1919.12 일제기관 파괴, 요인암살을 위한 암살단 조직
(상황자막)
1920.8 미국 의원단 방문에 맞춰
시위와 총격전 준비하다 검거
(상황자막)
40일간 투옥 후 중국 상해 망명
(상황자막)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가입
(인용자막)
'상해에서 갖고 들어온 폭탄을 기름 종이에 싸서 항아리에 넣고 봉해서
외갓집 울타리 밑에 묻었다"
김상옥 아들의 목격담
(상황자막)
종로경찰서 폭파를 위해
경성에 투입된 김상옥
(인용자막)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거사를 앞두고 김상옥이 한 말
(상황자막)
종로경찰서 피격 이후
대대적인 수색을 시작한 일본 경찰
(상황자막)
그러나 김상옥의 거사는 끝나지 않았다
/ (프로필/ 총독 사진 옆)
사이토 마코토 총독
서울역에서 조선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삼판통(후암동)에 숨어있던 김상옥
(상황자막)
계획이 발각되고 만다
(상황자막)
포위망을 뚫고
남산을 맨발로 넘어 효제동으로 피신
(상황자막)
1월 22일 새벽
일본 기마대와 무장 경찰 천여 명 출동
/ 양손에 권총을 들고 5채의 지붕을 넘나들며 접전을 벌인 김상옥
(상황자막)
무려 세 시간 동안 계속된
1대 1000의 총격전
/ 일본 경찰 17명 사살
(인용자막)
(강조) '최후순간까지 대항'
(상황자막)
마지막 하나의 탄환이 남았을 때 그는,
동지들과 했던 약속 그대로
(상황자막)
적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했다
(말자막)
그의 시신엔 열 한 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고 처절했던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 그것은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경고한
일대 사건이자
/ 오랫동안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 후세 다쓰지 편 자막>
[상황]
1924년 10월
(후발) 일본 왕궁 다리에
폭탄이 떨어졌다
[상황]
고관 암살을 위해 침투한
의열단원 김지섭
[상황, 인용]
변호를 자청한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후세 변호사
검사를 압박하며
무죄 주장
[상황]
1919년 2월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외친
[인용]
한국인 유학생 60여 명 검거
[상황, 인용]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것도
후세 다쓰지였다
/ "재판관은 대체
조선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 "조선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정당하다
그들을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위법이다."
[프로필]
후세 다쓰지 (1879~1953)
일본 변호사
자유법조단 창립
[네임수퍼]
서경석 / 방송인
[말]
보통의 일본인이라면
나서기 쉽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임료조차 받지 않고
변론을 자청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게 됐을까요?
[장소]
후세 다쓰지 법률사무소
일본 도쿄
[상황]
도쿄의 유능한
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
[말, 인용]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다
/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 혁명'을 선언한다.
후세 다쓰지 <자기혁명의 고백> (1920)
[상황, 인용]
그것은 조선인을 향한
양심선언이기도 했다
/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후세 다쓰지
[상황]
1921년
정의로운 약자의 투쟁을 돕기 위해
(후발) 자유법조단 결성.
[상황]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발생
/ 혼란 속에 퍼진 유언비어
/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
/ 일본 관원과 민간인,
조선인 6천 명 대학살
[상황]
분개한 그는
군과 경찰에 책임을 추궁했다
[말, 인용]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합니다
[상황]
1924년 의열단원 김시현
조선총독부 폭파 미수사건 변호
[상황]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나주 농민 토지 510만 평 반환소송 참여
[상황]
그는 언제나
일본의 식민지배로 곤경에 빠진
한국인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 그가 자신의 조국을
대신해 전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였다
[상황]
1932년
후세 다쓰지 변호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 일제는 그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한다
[상황]
무료변론을 고집해 온 그는
/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 그의 아내는 한국인 대상
하숙집을 운영, 생계를 유지했다
[사진 설명, 상황]
(왼쪽) 후세 다쓰지의 손자
(오른쪽) 한국인 유학생
/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하숙생이 돼 그를 도왔다
[말]
일본의 패전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그는
자유법조단을 재결성해
/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 그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와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 평생 실천한
일본의 숨은 양심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홍진 자막
(상황)
1908년 5월 충북재판소
(후발)한 검사가 견책을 받아 사임한다
(인용)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
(인용)
"나는 일제에 항거한 의병을 폭도로 규정한 재판에
논고를 하지 않겠다"
(프로필)
홍진 (18771946)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말)
검사직을 내려놓은 홍진 선생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도왔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동지들을 모읍니다.
(네임수퍼)
문희상 / 국회의장
(상황)
3.1운동 이후
13도 대표자들과 한성정부 수립 결정
(상황)
상해로 건너가 국내외에 산재해있던 임시정부 통합
(상황)
홍진, 1921년
지금의 국회인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
(상황)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새 헌법 제정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발족
(말)
그는 독립을 위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는 일이
늘 먼저라고 생각했고 그 목표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상황)
1927년 한국독립당 조직
(상황)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정규군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용맹스럽게 나가라 그리하야 왜놈을 무찌르고
우리의 옛 나라를 광복하여라"
한국 광복군 창립식 기념사 1941.2.1
(상황)
1942년 10월 통일의회 의장 취임
(상황)
1944년 4월
지금의 헌법의 초안이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탄생시켰다
(상황)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말)
홍진 선생은 가장 오랜 기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정치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좌우로 분열돼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연합정부를 구성해 민족의 대표이자 중추라는 위상을 찾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상황)
그는 광복 후 임시의정원 관련 문서를 보존해 귀국,
초기 의회의 역사를 후대에 길이 남겼다
<나의 독립 영웅 최재형 편 자막>
(자막)
1909년 10월 26일
(자막)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자막)
저격의 주인공 /(후발) 안중근
(자막)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프로필자막)
최재형(1860~1920)
임시정부 재무총장
동의회 총장, 대동공보 사장
(이름자막)
현정화 / 탁구 감독
(자막)
러시아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말자막)
러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항일운동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막)
손가락을 잘라 암살을 결의했던
12명의 동의회 동지들
(자막)
그들이 피로 새긴
(자막/ 태극기 한자 옆에 발생)
한 대
립 독
(자막)
최재형이 안중근에게 구해준 총
(자막)
총알을 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라
동의회 총장 최재형
(자막)
1860년대
가난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
(자막)
그곳에서 선원으로 일하다
(자막)
러시아군에 납품하며
큰 부자가 된 최재형
(자막)
재산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지원
(자막)
최재형 딸 올가의 회고록
(자막)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살해한다면 독립운동에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막)
1908년 7월 5일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보고서>
(자막)
'한인 의병부대는 경흥시 외곽과 두만강 상·하류에 있는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했다'
1908년 7월 5일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보고서>
(말자막)
최재형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을 돕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막 )
한민족의 계몽을 위해
연해주에 30여 개 학교 설립
(자막)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러시아 최초 한인 신문
<대동공보> 발행
(자막)
러시아 한인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페치카"
/(후발) 따뜻한 난로 같은 존재였다
(자막)
최재형은 1920년 4월
러시아까지 쫓아 온
일본 헌병에 총살되었다
/ 그의 시신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나의독립영웅 <배화여고> 자막
(네임수퍼)
최원정 / 아나운서
(말)
광복운동가 5천여 명의 수형 기록표가 있는 이곳
/유독 앳된 얼굴의 소녀들이 있습니다
(상황)
1920년 보안법 위반혐의로
수감된 24명의 소녀들
(상황)
가장 꿈 많던 시절
(상황)
조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상황)
1919년 2월 27일
소녀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상황)
독립선언서를 숨겨놓고
전교생 동원 방법 모의
(상황)
그러나 3월 1일 교장의 조치로 학생 규합 실패
(상황)
3월 10일 휴교령 발령
소녀들의 계획은 좌절되는 듯 했다.
(강조)
썩은 줄과 같은 일본 정책을 끊고 일어서라
(상황)
엄혹한 식민지배 아래서도민족정신을 일깨워줬던 교사들
(말)
한 번 꺾였지만, 소녀들의 의지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년째인 1920년 3월 1일 새벽
/배화학당 여학생 40명은 학교 뒷산 필운대로 올라갔죠
(상황)
이 땅과 사람, 생각을 짓밟고 있던
일제를 향해 소녀들이 외친 말
(강조)
대한 독립 만세
(말, 인용)
일경 : 주소와 성명을 써보라
(발생)이수희 : 쓸 줄 모른다
(발생)일경 : 주소와 제 이름도 못 쓰는 것이 어찌 만세를 불렀느냐
(발생)이수희 : 못 쓰기는 하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상황)
일본 경찰 앞에서도 당당했던
이 소녀는 열다섯 살이었다
(말)
참 어린 소녀들인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정말 작고 여린 수많은 이들의 용기가 모여역사를 바꾸는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프로필)
김경화(만18세) 이수희(만15세)
징역 1년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구형 집행유예 3년 구형
(프로필)
안옥자(만17세) 김마리아(만17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김성재(만14세) 김의순(만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문상옥(만 17세) 박경자(만 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박신삼(만 16세) 박양순(만 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소은경(소은명, 만 14세) 소은숙(만 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왕종순(만 14세) 윤경옥(만 17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이남규(만 17세) 이신천(만 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이용녀(만 15세) 지은원(만 15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프로필)
최난시(만 17세) 한수자(만 16세)
징역 6개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구형 집행유예 2년 구형
<나의 독립 영웅 서영해 편 자막>
(말)
1929년 프랑스에서 한국인이 쓴
한 소설이 발간됩니다
/
소설의 제목은 <AUTOUR d'une VIE COREENNE>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네임수퍼)
작가 조승연
(말)
이 소설은 발간 1년 만에 5판을 인쇄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상황)
한국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AUTOUR d'une VIE COREENNE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
저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특파원
(프로필)
서영해 (19021949 실종)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프랑스특파위원
: 파리 고려통신사 설립
(상황)
1919년 중국 상하이
/
임시정부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상황)
3.1운동으로 수배 중이던
열일곱 살의 서영해
(상황)
임시정부는 그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
(말)
국제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널리 알려야 했던 당시
/
임시정부에는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
프랑스로 간 서영해는 12년 정규교육과정을
6년만에 마칩니다
(상황)
파리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한 서영해
(상황)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어 소설 발간
(상황)
한국의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상황)
프랑스 일간지
<Le Petie Journal>
(발췌)
"한국을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태도는 급변했다
서영해는 한국인들의
고통과 수난의 이야기를 열어나갔다"
(상황)
1934년
<거울불행의 원인> 발간
/
<심청전>, <흥부와 놀부> 등
한국 전래민담을 번역해 수록
(인용)
"어떤 것은 환상적이고
또 유머가 가득 차 있다"
/
"프랑스어로 옮겼음에도
한국적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 매거진 <FranceJapon>, 1934년 10월호
(말)
서영해의 활약은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국제정세 평론지 '에스프리'까지 나서
서영해의 글을 실었습니다
(발췌)
"일본이 지배한 한국은
말 그대로 거대한 감옥이 되고 말았다"
/
"일본은 조선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박탈했다"
서영해 기고문 '한국의 문제', 1933년 12월
(말)
'기본적 자유'란 프랑스인들이
프랑스혁명으로 탄생시킨 단어이기 때문에
/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은
/
프랑스인에게 가장 강력하게 호소하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상황)
1936년 9월
벨기에 브뤼셀 만국평화회의 홀로 참가
/
40여 개국 대표를 일일이 방문해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 호소
(상황)
그는 말과 글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웠다
(상황)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이뤄낸 광복
(상황)
프랑스 신문은
1면에 그의 글을 실었다
(인용)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가슴에 불타오른
자유와 독립에 대한
정신의 불길을 끌 수 없었다"
/
"나는 확신한다
가까운 미래에 한국은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서영해 기고문<Ce soir> 1945년 8월 16일
(말)
독립운동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유럽에서
고독하고 집요하게 펜으로 투쟁했던 서영해
/
그의 글은 어떤 총탄보다 강력하게
세계인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락 편 자막>
[제목]
창작 오페라 <김락>
로열 오페라단
연출 이상민
[네임수퍼]
송해 / 방송인
[말]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실명까지 한 여인
[말]
하지만 기록에는
이 여인의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프로필]
김락 (18631929)
독립운동가
[상황]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후발)을미사변
[상황]
의병을 모아
국권 회복에 나선 시아버지
[강조] [인용]
請斬五賊疏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소서
[상황]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단식투쟁 시작
[상황]
1910년 10월 24일
단식 24일 만에 사망
[제목]
창작 오페라 <김락>
[말]
시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 김락 여사와 그 가족은 뜻을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상황]
1917년
대한광복회 가입
독립자금 모금
[상황]
김락은 독립운동가에게
은신처와 군자금을 지원
[제목]
창작 오페라 <김락>
[상황]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57세의 고령에도 참가
/ 3월 22일 체포
[상황]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인용]
"안동의 양반 이중업의 처는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실명했다
고등경찰요사 1934년
[인용]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 만세 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의 한을 풀까
이윤옥, <서간도에 들꽃 피다> 중
[상황]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아들 둘마저
일본 경찰에 체포, 투옥
(판결문 옆 발생) 아들 이동흠의 판결문
[상황]
앞을 못 보는
고통 속에서도
/ 두 아들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던 김락
[상황]
1929년 2월 12일
(후발) 끝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상황]
그의 묘엔 이름조차
남지 못했다
[말]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암흑 같던 그 시절
/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짐작이 갑니다
/ 한 사람의 어머니이자 아내,
한 사람의 국민으로 불의에 무릎 꿇지 않았던 일생
/ 비록 두 눈은 잃었지만
그녀의 정의로운 삶은 빛이 되었습니다
<나의독립영웅> 최양옥 자막
(상황)
1929년 4월 18일 작게
세 명의 청년이
경성우편국 수송 차량을 습격했다
(상황)
자동차 두 대 추가 습격
(상황)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현금 35원과 금시계 탈취
(기사발췌)
만세삼창을 강제로 고창하게 한 후
산중으로 유유히 종적을 감췄다
<동아일보> 1929년 4월 20일
(프로필)
최양옥 (1893~1983)
: 대한독립 공명단장
: 대동단 단원
(이름)
김인권 / 배우
(말)
현금수송차량을 털고 만세삼창을 한 후 사라졌다
/
마치 영화 같지 않습니까?
/
최양옥 선생은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의 단원이었습니다
/
그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범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갑니다
(상황)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자금을 마련하다 체포돼
7년 형을 받은 최양옥
(상황)
출소 후 중국 망명
(상황)
중국 비행학교 교관 안창남을 만나
/(후발) 대한독립공명단 조직
(상황)
중국에 무관학교를 세워
75,000여 명 병사 양성
(상황)
국내로 진격
일본과 전면전 계획
(말)
대대적인 진격전을 계획하고 있던 이들에겐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
최양옥은 안창남으로부터
권총 세 자루와 600원을 받고
/
국내로 잠입해 독립 자금을 구할 계획을 세웁니다
(인용)
1929년 4월 공금이 서울로 온다는 정보를 받고
나와 김정련 이선구 3인 동지가 자동차를 습격했다
최양옥의 회고록
(상황)
그러나 습격한 우편수송차엔
/(후발) 현금이 없었다
(상황)
사건 3일 만에
김정련과 이선구는 체포
(상황)
최양옥은 하루 뒤 체포
(상황)
수차례 심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했던 최양옥
(인용)
"적어도 2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것이니
체포당할 때는 경관쯤은 죽이고서 자살할 생각이었다."
최양옥의 경성 종로경찰서 공술 중
(상황)
1929년 5월 11일
호송차에 오른 세 사람은
/(후발) 웃고 있었다
(인용)
"여러분들 평안히 계시오
한 이십 년 후에 또 만납시다."
(상황)
1929년 12월
/(후발) 새벽 3시부터 모인 방청객들로
법정은 대만원
(인용)
"우리 세 사람은 사생을 같이하던 동지로
공판심리 전에 악수로 인사를 하고 싶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 7일
(상황)
그들은 마지막까지 당당한 동지였다
(말)
조국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정의로운 도적이 되기로 결심한 그들
(말)
그들은 누구보다 패기 넘치게
독립을 위해 돌진했고
/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당당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조명하 편 자막>
[인용]
"나는 조국의 원수를 갚았노라"
[이름]
김종진 /가수
[인용]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상황]
1928년 대만
일본의 중국 침략 전진기지
[상황]
일본군을 격려하기 위해 찾아온
육군대장
[상황]
그는 일왕의 장인이었다
*사진 아래에 이름 자막
구니노미야 육군대장
※ 칼과 육군대장 사진 겹쳐서 꽂히는 CG
[상황]그를 향해 단도를 던진 한 청년
[인용]
'조선총독부 대경실색'
(발생)'대만총독은 사표 제출'
[상황]
혈혈단신 일본 황족을 처단한
한국의 독립투사
[프로필]
조명하 (1905~1928)
황해도 신천군청 서기
[말]
그는 신천군청의 서기 출신으로
일제 치하에서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만까지 가게 된 걸까요?
[상황]
1926년 6월 10일
[상황]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상여 행렬을 따라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
[상황]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조명하.
[인용]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
[상황]
갓 난 아들과 아내를 두고
오사카로 유학
[상황]
낮에는 전기회사, 상점, 공장에서 일하고
[상황]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 1년
[상황]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 출발
[상황]
1927년 11월
[상황]
경유지 대만에서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상황]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대만 방문
[상황]
조명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상황]
혈혈단신인
그가 구한 무기
[상황]
(발생)총도 (발생)폭탄도 아닌
(발생) 독을 바른 단도 한 자루
[상황]
1928년 5월 14일
9시 55분
[상황]
구니노미야 대장의 차 등장
[상황]
환영인파에 숨어있던
조명하가 칼을 꺼내 들었다
[상황]
차량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발생) 뛰어 오른 조명하
[상황]
비수를 던지며 외쳤다
(발생) "대한독립만세"
[인용]
"조명하 사형선고"
[상황]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인용]
"나는 조국의 원수를 갚았노라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순국 직전 남긴 유언
[말]
"대한의 젊은이여
조국을 굳게 지켜라"
/"조국을 잃으면 자유와 정의, 평화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상황]
독검을 맞은 일왕의 장인은
(후발)조명하 사형 3개월여만에
온몸에 독이 퍼져 사망
[말]
마지막까지 일본은
조명하 의사의 배후를 찾는 데 혈안 돼 있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그의 배후는 다름 아닌
조국을 되찾기 위한 열망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독립영웅> 노백린 자막
(장소)
전쟁기념관
(이름)
이원복 / 만화가
(말)
일제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운 비밀학교가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공군학교
윌리우스 비행학교입니다
(상황)
1920년 일제에 맞설
비행사 양성을 목표로 개교
(인용)
"동경에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
(상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방장관의 특급 프로젝트였다
(프로필)
노백린 (1875~1926)
: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군무총장(現 국방장관)
(말)
노백린 장군은 일제 침략이 진행 중이던 1900년
대한제국 육군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일찍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길 원했던 그는
기개가 남달랐습니다
(상황)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일제에 외교원 박탈
(상황)
축하연을 연 이토 히로부미
(상황)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이 함께한 자리
(상황)
울분에 찬 노백린은 그들을 향해
("워리워리, 쯧쯧쯧")
(후발/ 소리 들리고)
개 부르는 흉내를 낸다
(강조)
"나라를 팔아먹은 개보다 못한 놈들아"
(상황)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조직
300명의 독립군 양성
(상황)
그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크게 활약
(인용)
"그런즉 죽을진대 한번 용맹스럽게 독립전쟁을 하고 죽읍시다"
노백린의 시카고 연설
(상황)
그는 더 강한 독립군을 원했다
(인용)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
<독립신문> 1919년 4월 17일
(상황)
미국에서 쌀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의 도움으로
/(후발) 비행군단 창설
(상황)
미국 비행학교를 수료한
6명의 한인 교관
(상황)
비행술, 정비, 무선통신 등을 교육
(상황)
77명의 비행사를 양성했다
(1920년~ 1923년)
(상황)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인용)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도쿄에 가서 떨어뜨리겠습니다
자살하는 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장호/ 윌로우스 비행학교 교관
(말)
노백린 장군은 도쿄 폭격의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만든 항일 비행군단은
전투력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
광복군의 사기를 올렸고 일제에게는 위협이 됐습니다
(인용)
"정복에 말 타고 남대문에 입성해보면 참으로 좋겠다"
상해에서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말
<나의 독립 영웅_ 황기환 자막>
(상황)
1919년 영국 에든버러 항
(상황)
200여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도착했다
(상황)
러시아에서 철도 공사를 하던 이들
(상황)
일제는 식민지의 국민이라며
이들의 송환을 주장
(상황)
한 한국인이
영국 외무성을 찾아갔다
(인용)
"한국 노동자들을 프랑스로 데려가겠소."
(프로필)
황기환(1887 추정 ~1923)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파리위원부 서기장
: 임시정부 런던위원부 위원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이 교섭을 통해
국민을 구하러 나선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네임수퍼)
다니엘 린데만/ 방송인
(말)
적국으로 끌려갈 위기에 놓인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말)
임시정부의 첫 번째 영사
그는 미군 출신이었습니다
(상황)
10대 후반 일제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황기환
(상황)
1차 세계대전 발발
미군에 자원입대
(상황)
유럽에서 군 생활 중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규식을 만난다.
(상황)
1919년 6월
김규식을 도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상황)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호소
(말)
뛰어난 영어실력, 서양문화에 대한 유연함
/
미군 복무라는 이색경력을 가진 황기환 선생은
/
당시 임시정부에 귀한 인재였습니다
(상황)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임명
(상황)
1919년 9월
파리위원부에 긴급전보 도착
(상황)
러시아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이 보낸 구제요청
(상황)
황기환
영국 외무부에 도움 요청
(인용)
'신중히 고려 중'
영국 외무부
(상황)
프랑스 노동부에
한국인 노동자들 고용 요청
(인용)
'프랑스인들이 동양 노동자를 배척해
한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
프랑스 노동부
(상황)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끈질기게 설득
(프랑스어/ 성 옆에 발생)
남 / (coreen) 한국인
노
박
임
(상황)
35명의 한국인들을
프랑스에 정착시켰다
(상황)
동포를 단 한명이라도
적국에 보내지 않으려는
/ 절실한 노력의 결과였다
(말)
어디 있는 나라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
/
조선? 뭐라고? 이런 반응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 당시 대사관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조국을 알리고 노력한다는 것은
/
굉장히 자기만의 싸움이었을 거예요
혼자만의 싸움이죠
(상황)
그의 노력으로 프랑스에 남은 한인들
/(후발) 유럽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조직
(상황)낯선 땅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독립자금 850프랑을 모아 송금
(현재 약 800~900만원)
(상황)
그는 유럽언론에
식민지배의 실상과 독립의지를 호소
(상황)
1920년
잡지 자유한국 (La coree liber) 발간
(상황)
3.1 만세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수록
/(후발) 프랑스어와 영어로 1,000부 발행
(상황)
181종 유럽신문에
한국기사 517회 실어
/ 한국의 실상을 유럽에 알렸다
(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관으로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감성)
1923년 40세의 황기환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감성)
미혼으로 유족이 없던 그의 무덤은
한 공동묘지에 방치
/(후발) 2008년 발견됐다
<나의 독립 영웅 – 한도신 김예진 편 자막>
(네임수퍼)
고두심 / 배우
(인용)
새벽 눈이 한 시간 전부터 퍼부었다
/
고깃국을 싸고 남편의 의복을 챙겨
아이 업고 집을 나섰다
/
주재소 문을 두드리며
어젯밤에 잡혀 온 사람 조반을 가져왔다고 했다
/
"도망갔시오, 도망 가"
/
주재소 마당에 눈발자국이
뽀드득 뽀드득 찍힌다
/
행여나 발자국 때문에
남편이 잡히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프로필자막)
김예진 (1989~1950)
: 병인의용대
: 대한일신 청년단 결사대
한도신 (1895~1986)
: 김예진의 부인
: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 기록
(말자막)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은 늘 쫓겼습니다
아내는 일평생 마음 졸이며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
총칼을 들고 함께 전선에 서진 않았지만
부부는 늘 같이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1920년 8월
평남부청 폭파
(상황자막)
거사를 주도한
대한민국 광복군 결사대
(이름자막)
김예진 장덕진
(상황자막)
수시로 변장을 하며
도주전을 벌인 김예진
(상황자막)
어느 날 밤 불쑥 집에 찾아왔다
(인용)
'밥 한술 빨리 주시오'
(인용)
순사들이 들이닥칠까 무서우니
찬밥을 얼른 드릴까 하다가
/
한겨울 한밤에 먼 길을 떠나는 남편한테
따뜻한 밥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 새로 했다
/
"이제 가면 또 언제나 오시렵니까?"
/
눈물은 안보이고 보내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상황 자막)
일본 경찰은 집을 급습
(후발) 남편의 행방을 추궁했다
(인용, 강조)
"죽일 테면 죽여라!
너희 육법전서에 아무나 죽여도 된다는 법이 있으면 죽여라!"
(상황자막)
상해로 간 김예진
병인의용대 조직
/
결성 두 달 만에
일본 밀정 5명 척살
(상황자막)
1926년 3월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폭탄 투척
(상황자막)
15년 구형
(인용)
"나는 나카무라(경찰)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틀어쥐고 귀때기를 후려쳤다.
나라 잃고 당했던 오랜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한도신의 회고록> 중
(상황자막)
남편이 수감된 동안
고무공장에서 일하며
6명의 아이들과 시부모를 책임 진 한도신
(상황)
모진 세월을 끝내 이겨냈다.
(상황)
1967년 화창한 봄날
그녀는 남편의 무덤을 찾아 갔다
(인용)
"여보 나 왔시오"
/
"당신 부탁대로
여섯 자녀 다 기르고
이제 저의 책임을 다했시오"
/
"여섯 꽃송이 당신에게 바칩네다 여보"
<나의 독립 영웅 한성수 편 자막>
(상황자막)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상황자막)
<조선인 학도 특별 지원명령> 발표
(상황자막)(일본어)
전 국토에 징병제
(상황자막)
4,385명의 한국 청년들이
일제의 총알받이로 끌려갔다
(상황자막)
1944년 1월
중국에 배치된
스물다섯 살 학도병
(인용,강조)
"일제의 제물이 되어
죽기보다는 죽어도 꼭 탈출하겠다"
(상황자막)
목숨을 걸고 2명의 동지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다
(프로필)
한성수 (1920~1945)
: 광복군 제 3지대 대원
(말자막)
한성수 선생은 중국 서주지역의 일본군 부대를
최초로 탈출한 학도병이었습니다
(네임수퍼)
현우 / 배우
(말자막)
이후 많은 학도병들이 그를 따라 탈출했습니다
/
한성수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의 정규군 대한광복군에 입대합니다
(상황자막)
제식훈련과 교육을 받은 한성수
(상황자막)
따뜻하고 강인한 통솔력으로
또래 훈련생들을 이끌었다
(인용)
"항상 동지들에게 다정했던 마음,
솔선수범하여 동지들에게 존경받던 성품이었다."
동지 김우전의 추모글
(상황자막)
교육을 마친 그는
상해의 공작 책임자로 임명
(상황자막)
2명의 동지와 상해로 파견
/
군자금 모집과
첩보공작 임무를 수행
(상황자막)
상해주둔 일본 군법회의에
기소된 한성수
(상황자막)
잔혹한 고문에도
광복군의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말자막)
일본군 임시 군법회의에 넘어간 한성수 선생은
업힌 채로 재판정에 등장합니다
/
혹독한 고문으로
두 발로 설 수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용)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일본어)를 쓰지 않는가?"
/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에겐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
(상황자막)
결국 일본어 통역을 불러와
재판을 진행
(인용)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한국 독립군들이 당한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
(상황자막)
광복을 겨우 3달 앞둔
1945년 5월 13일
/
그는 참수형을 당한다
(말자막)
1940년대는 일제의 강제 점령이 장기화되며
많은 사람들이 지쳐가던 시기였습니다
(네임수퍼)
현우/ 배우
(말자막)
독립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한성수 선생
/
광복을 석 달 앞두고 맞은 죽음이
가슴 저미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의 독립 영웅 차미리사 편 자막>
[상황]
1920년 6월
서울 YMCA
/ 수천 명 청중이 모여들었다
[상황]
여성들이 주도한
최초의 순회강연
[인용]
아수라장이 된 여자 강연회
(강조) 회장이 좁아서 중지
/ "일천만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자 하노라"
[프로필]
차미리사 (18791955)
조선여자교육회 설립
근화여학교 교장
[말]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써는 거대한 열망을 이끌어낸 사람
[이름]
임백천_방송인
[말]
바로 차미리사 여사입니다
/ 하지만 그녀의 삶도
처음엔 남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 열일곱에 시집을 가
3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어느 선교사의 도움으로 떠난
유학이 전환점이 됩니다
[상황]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하며
[상황]
조국의 현실과
여성의 역할에 눈을 뜬
차미리사
[상황]
"외국에 있느니 고국에 돌아와
청년 여성을 교육시켜
/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차미리사
[상황]
1912년 귀국
배화학당 교사로 일하며
여성운동 시작
[상황]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 조직
독립정신으로 교육운동 본격화
[상황]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어
한국어 교육
[상황]
특히 가정주부들의
계몽 유도*
[말]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상황]
67 고을 (체인지) 10,000리
(체인지) 84일
[상황]
전국 순회강연
[인용]
"여성과 시민들의 지원금 쇄도"
<매일신보> 1921.07.09.
[상황]
1925년
순회강연에서 모은 성금으로
근화여학교 설립
[상황]
근화→무궁화
[상황]
무궁화를 수놓은
교표를 달았던 학생들
[상황]
양장, 부기, 주산, 사진술 등
실용학문 교육
[인용]
(신문의 헤드라인 강조)무엇보다도 개성 발휘에 목적
[상황]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 강조
[상황]
'근화槿花'
'무궁화를 상징하는 교명이 불온하다!'
[상황]
1940년 8월
조선 총독부의 압력으로
차미리사 교장 강제 퇴임
[상황]
그러나
무궁화를 새긴
교표만은 남겼다
[말]
그녀는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 교육운동, 여성 운동의
/ 세 흐름을 주도한
보기 드문 여성 선각자였습니다
/ 그녀의 생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나침반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2.8 독립선언' 편 자막
(장소)
일본 도쿄
(네임수퍼)
강하나 / 배우 (재일교포 4세)
(말)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는 조국을 두고
(말)
이곳 도쿄로 왔던 학생들
(말)
청춘의 분노와 의기는
바로 이곳에서 폭발했습니다
(장소)
1919년 2월 8일
도쿄 YMCA 회관
(상황)
도쿄 한복판에 모인60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
(강조)
대한 독립 만세
(상황)
2.8 독립선언
일본의 한국 유학생 600여명
(상황)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
/ 식민지 해방에 대한
세계 정세 변화에 주목한 (후발)39인의 독립운동가
(상황)
중국 지린에서
최초의 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상황)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일본 유학생들에게 전달된 독립의지
(상황)
1919년 1월 6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 200명 집결
(인용)
"우리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상황)
독립선언을 위한
/(후발) 조선청년독립단 결성
(상황)
1919년 1월 8일
일본 경찰, 집회 강제 해산
/학생들 강제 연행
(설명)
조선독립선언 2.8기념비
(상황)
한국의 청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언서)
조선청년독립당은
우리 이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선언서)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선언서)
한일합방이 한 국민의 뜻에 반하는 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선언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이다
(인용)
조선 학생 대검거
(말)
일본의 탄압에도꺾이지 않았던 조선 청년들은
(말)
이곳 히비야 공원에 다시 모여
세 차례 더 만세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말)
그리고 바다 건너조국으로 밀사를 보내
(말)
만세 운동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상황)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던 독립열망을 모아
중국에서 일본으로
(상황)
다시 한반도로 전파
(상황)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민적 만세운동으로 확산
(상황)
3.1 만세운동은전 국민의 독립 의지를 결집
(상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다
(장소)
재일본 한국 YMCA 회관
(말)
2.8 독립선언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말)
민족의 독립 열망을
일깨우고 확산시켜
(말)
독립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말)
일제의 심장부
도쿄 한복판에서 외쳤던
(강조, 세로로 발생)
대한 독립 만세
(말)
청년들의 이 뜨거운 절규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 홍범도 가족 편 자막>
(상황자막)
1908년 한 여인이 일본군에 잡혀 왔다
(상황자막)
"남편 앞으로 편지를 쓰라!"
(상황자막)
그것은 투항 권고문이었다
(상황자막)
"너희 마음대로 해라"
(프로필 자막)
이 씨 부인 (미상~1908)
: 의병장 홍범도의 부인
(네임수퍼)
최불암/배우
(말자막)
이 여인은 '이 씨 부인'이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 일본군은 이 여인의 남편을 도저히 잡을 수 없자
가족을 이용해 회유하려는, 가장 치졸한 방법을 씁니다
/ 그녀의 남편은 대체 누구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가사자막)
<날으는 홍범도가> 작사:미상 작창:노동은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상황자막)
뛰어난 매복, 유인, 사격술로 일본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산포수 의병들
(상황자막)
그들을 이끌었던 의병대장, 홍범도
(상황자막)
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군 창건
(상황자막)
독립군을 추격해 두만강을 건너
(발생) 북간도로 진격해 온 일본군
(상황자막)
홍범도 부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대파
(상황자막)
김좌진 부대와 연합,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
/ 일본군 전사자 1,200명
부상자 200여 명
(인용자막)
"최후의 한 사람까지 분투하여,
우리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
(상황자막)
홍범도를 잡기 위해 특명을 내린 일본
(상황자막)
부인 이 씨와 큰아들 압송
(상황자막)
남편 앞으로
투항권고문을 쓸 것을 강요
(상황자막)
발가락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 넣는 등 모진 고문에도
/ 이 씨는 끝내 펜을 들지 않았다
(인용자막)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상황자막)
그리고 스스로 혀를 잘라 심문을 거부했다.
(상황자막)
벙어리가 된 채 옥에 갇힌 이 씨 부인은
1908년 5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말자막)
이 여인의 희생으로 홍범도 선생은
무장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우리는 투쟁의 선봉에 선 사람들만을 기억해왔죠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
(네임수퍼)
최불암/배우
(말자막)
/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한 이 씨 부인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독립 영웅 강주룡 편 자막>
(장소자막)
평양 을밀대
(상황자막)
1931년 5월 29일
한국 최초의 고공 농성 발생
(강조)
누구든지 쫓아 올라오면 떨어져 죽는다
(프로필자막)
강주룡 (1901~1932)
평원 고무공장 직공
항일노동운동가
(네임수퍼)
박지영 / 배우
(말자막)
한일 강제병합 10년이 지나자
일본은 자국의 기업을
/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 이 땅의 자원과 노동력에 대한
대대적인 착취가 시작됐죠
/ 우리에겐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상황자막)
1920년대 전체 공장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
(상황자막)
식민지배 아래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렸던 여성들
(노래자막)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고무공장 큰 아기>, 1930년대 신민요
(인용자막)
"고무 찌는 냄새와 더운 김이 훅훅 끼치는 공장 속에서 애기에게 젖을 빨리며
쇠로 만든 롤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신가정>, 1935년 2월 호
(말자막)
하지만 고무공장의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이후
/ 한 달 임금으로 고무신 한 켤레 값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 평양 고무공업조합에서 임금의 17%를
삭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죠
(상황자막)
1931년 5월 16일
단식파업을 시작한 고무공장 여공들
(상황자막)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에 올랐다
/ 여성해방
/(후발) 노동해방
(인용자막)
"내 한 몸뚱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대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럽다는 것이
내가 배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여류투사 강주룡, 잡지 <동광> 1931년 7월
(상황자막)
<동아일보> 1931년 5월 30일
(기사옆발췌)
경찰에서 사다리를 놓고
몰래 올라가서 잡았다
(상황자막)
투옥 중에도 단식 투쟁을 이어간 강주룡
(상황자막)
결국 평원 고무 공장은
임금삭감 철회
(상황자막)
파업을 주도한 49명의 직공은 /(후발) 해고됐다
(네임수퍼)
박지영 / 배우
(말자막)
스스로를 돌보기도 어려웠던 식민시대
대찬 투쟁으로 일제의 착취에 맞섰던 여성 노동자들
/ 비록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세상은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최봉설 편 자막>
(말자막)
일제강점기 한 청년이 남긴 사진입니다
/
앳된 얼굴이지만 표정이 결연한데요
(네임수퍼)
넉살 / 래퍼
(인용)
'폭탄과 단총을 준비해 사격연습을 하고
이제 준비가 잘 되었으니 중국으로 갑세다'
/
'마지막으로 사진이나 찍자고 하여 찍는 사진입니다'
(말자막)
이것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한 청년의 출사표였습니다
(프로필자막)
최봉설 (1897~1973)
: 철혈광복단 단원
: 대한의용군사회 사관학교 중대장
(상황자막)
1920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상황자막) 돈가방에 올린 두 손
일제의 침략자금을
운반하던 현금 호송대
(상황자막) 매복한 청년들
그들을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다
(상황자막) 뛰어나갈 때
대담한 기습작전
(상황자막) 가방 드는 청년
15만 원을 탈취
/
500명 규모의 9개 부대를 무장시킬 거액
(현재가치 150억 추정)
(상황자막)6명 얼굴 뜨고
그들은 무장독립운동단체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이었다.
(상황 자막) 앞 자막 다 뜨면
한상호 임국정 윤준희
박웅세 최봉설 김준
(상황자막)
1919년 3월 만주 용정
3만 명의 한국인들 만세 시위
(상황자막)
즉각 진압에 나선 일본
한인 17명 즉살
(상황자막)
최봉설과 다섯 청년은
평화시위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 투쟁 결의
(말자막)
영화 같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 용기를 내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셨다는 것이
/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상황자막)
무기 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철혈광복단
(상황자막)
그 곳 요새
무기고 책임자를 통해
/
소총 1천 자루와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 거래 계획
(상황자막)
무기 인수를 하루 남긴 새벽 3시
(상황자막)
일본군 헌병대 급습
(상황자막 /강조)
밀정이 있었다!
(말자막)
러시아와 철혈광복단 사이에서
무기를 중개했던 동지의 배신으로
/
최봉설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은 붙잡혔습니다
/
일본군에게 탈취했던 15만 원 중
약 13만 원 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상황자막)
최봉설
오른팔에 총상을 당한 채 도주
(인용자막)
"이 바다에 풍덩 빠져 죽을까? 아니다. 어쨌든 살아서
왜놈의 원수를 갚고 조선이 독립하여야 하겠다."
최봉설 회고록
(상황자막)
홀로 살아남은 최봉설은
끝까지 무장 투쟁을 했다
(인용자막)
내가 죽으면 큰 비석을 세우고
비석 뒷등에는 간도 십오만원
/
왜놈에게 신한촌에서 포착된 사실을 쓰어 놓으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고 애석해할 것이다 /(후발) 나는 죽어도 좋다
최봉설 회고록
(말자막)
무장투쟁을 하며 늘 죽음을 각오했던 그는
/
사후에라도 자신의 도전이
동포들에게 자극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장소자막)
<십오만 원 사건 기념비> 중국 만주 용정
(상황자막)
용정의 한인들은
그의 소원대로 비석을 세워
최봉설을 기억했다
/ (비석의 이름과 함께 강조) 최 봉 설
(말자막)
그렇게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 독립의 불씨로 남았습니다
<나의 독립영웅> 조소앙 자막
(상황)
모두가 평등한
국민의 나라
(상황)
오랫동안 우리는
그런 나라를 원해왔다
(말)
빈부, 성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
(네임수퍼)
김홍신 작가
(말)
민주화가 된 지금에도
변함없이 갈망하는 문젭니다
(말)
그런데 100년 전 엄혹했던
식민 지배 시절
(말)
바로 이 문제에
주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성)
아이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육성)
어른마다 투표하여
정치성 권리를 갖게 하오리다
(프로필)
조소앙 (18871958)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상황)
1919년 2월
중국 길림성
(상황)
만주와 러시아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 39명
/최초의 독립선언서 발표
(상황)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인용)
'군국 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베풀지니
동등한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린다'
(상황)
<대한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한 조소앙
(상황)
식민통치로 고통받던 국민들에게
그가 제시한 미래는
(상황)
삼균(三均)
(삼균자리에 체인지)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
(상황)
지금처럼
보통선거와 지방자치
(상황)
시장경제, 무상보통교육이
이뤄지는 국가였다
(말)
조소앙 선생이 주장했던
삼균주의는
(말)
침해받지 않고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
(말)
진정한
민주국가죠
(상황)
그가 주장한
삼균주의는
(상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토대가 된다
(상황)
1945년 11월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한 조소앙
(말)
조국 해방은
그와 임시정부가 함께 꿈꿔왔던
(말)
새 나라로 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말)
하지만 첫걸음을 떼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힙니다
(상황)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상황)
한반도 5개년
신탁통치안 협의
(육성)
나 조소앙은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육성)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하오리다
/우리 동포를 자유민이 되게 하오리다
(상황)
조소앙과 동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
분단 고착 위기에 빠져들었던 조국
(상황)
조소앙, 김구와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 전개
(인용)
"분단은 오직 동족상잔의 참회를
격성할 뿐이다"
(상황)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말)
조국 통일이 진정한 독립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말)
통일 운동을 펼쳐나가던
조소앙 선생은
(말)
1950년 한국전쟁 도중
납북당합니다
(말)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상황)
그는 끝까지
민족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
(상황)
1958년
단식 끝에 사망했다
(말)
융합을 통해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 했던 조소앙 선생
(말)
그는 떠나갔지만
100년 전 그가 꿈꿨던
민주독립국가는
/지금도 진화 중입니다
(김홍신 자필 문구)
조소앙
암흑의 시대에도 미래의 길을 열어준
100년의 선구자
김홍신
<나의 독립 영웅> 최용신 자막
(네임수퍼)
김명수 대법원장
(말)
일제 강점기, 농촌을 무대로 한
(말)
한 소설이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상황)
신문 연재소설
심훈의 <상록수>
(상황)
일제 치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베스트셀러
(상황)
소설 속 주인공은
(후발)실존 인물이었다
(프로필)
최용신 (1909년~1935년)
농촌 계몽운동가
샘골 강습소 설립
(말)
영화, 드라마는 물론
교과서에도 수록돼
(말)
우리에게 친숙한 소설 <상록수>
(상황)
1928년 한 일간지에 실린
고등학생의 기고문
(인용)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인용)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교문에서 농촌으로> 최용신
(상황)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 최용신
(말)
당시 전 국민 중 농촌 인구가 90%
(말)
문맹이 80% 이상이었습니다
(말)
최용신 선생은
가난 극복도, 조국의 해방도
(말)
대다수인 농민이 바뀌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황)
22살의 최용신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경기도 안산 샘골에 파견
(상황)
예배당을 빌려
한글과 위생교육
(상황)
농촌 계몽운동 시작
(인용)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글공부는 무슨!"
(상황)
주민들의 달갑지 않은 시선에도온갖 노동을 해가며 강습소 건립 자금 마련
(말)
그녀의 헌신은 결국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상황)
동네 유지들과 부인들
저축회를 조직해 성금 모금
(상황)
1933년
샘골 강습소 개소
(말)
최용신 선생은
주변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말)
한글을 시작으로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습니다
(인용)
"우리나라는 조선어가 국어다. 일본사람이 말하는 국어는 일본말이다."
최용신
(상황)
"무궁화가 그려진 샘골 강습소 마크를모자 앞부분에 달고 다니게 했다" 제자 홍석필의 회고
(상황)
민족 교육을
감시하고 압박했던 일제
(인용)
"조선인 학생 수를 줄여라"
(인용)
"교육 내용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하라"
(강조)
이에 불응한
최용신
(상황)
수원 경찰서에 끌려간다
(인용)
"선생님이 일주일이 지나서 나오셨는데
죽도록 구타당하고 몹쓸 일도 당했다고 했다.
(인용)
어린 마음에도 너무 슬퍼 엉엉 울었다."
제자 이상종의 회고
(말)
최용신 선생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말)
강습소 앞마당에
상록수를 심었습니다
(말)
그녀는 늘 푸른 상록수처럼
(말)
어떤 고난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황)
극심한 영양실조와 각기병에 시달리면서도
교육에 헌신
(상황)
1935년 1월 23일
과로 끝에 세상을 떠난다
(상황)
그녀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상황)
샘골 사람들은
대를 이어 최용신을 기억했다
(말)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우리 혼을 가르쳐
(말)
샘골을 넘어 조국을 밝힌 최용신 선생
(말)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가난한 농촌을
(말)
따뜻하게 끌어안은
스승이자 선구자였습니다
<나의독립영웅> 광주학생운동 자막
(상황)
1929년 11월
다시,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발췌하여 자막 발생)
십 년 전 기미운동 이후로 처음 보는 큰 사건
<동아일보> 1929년 11월 6일
(상황)
서울부터 한반도 최북단 회령까지
/(후발) 전국으로 퍼진 만세 시위
(발췌 후 옆 발생)
Korean strikers Wave Olden Flags
한국 시위대가 옛 깃발을 흔들다
<워싱턴 포스트> 1930년 1월 16일
(이름)
윤성빈 / 국가대표 스켈레톤 선수
(말)
3.1 만세운동 이후 정확히 10년 만이었습니다
/
다시 한반도를 뜨거운 독립 열망으로 채운 이들은
/(후발) 다름 아닌 10대 학생들이었습니다
(프로필)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11월 ~ 1930년 5월)
전국 약 54,000명
(상황)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상황)
한 일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사건 발생
(대사느낌)
"후쿠다,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후발) "뭐라고? '센징'놈이 뭐라고 까불어"
(상황)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박준채였다
(인용)
'센징'이란 얼마나 우리 민족을 모욕하는 말인가?
평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박준채의 증언
(상황)
출동한 일본 경찰은
한국인들만 구타
/(후발) 한국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말)
같은 해 11월 3일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이었습니다
/
그날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기도 했는데요
/
한국의 건국 날 일본 국가를 부르라는
일제의 강요에 광주 학생들은 침묵했습니다
(상황)
한국 학생 / 일본 학생 ( 한국학생, 일본학생 발생해서 부딪히는)
/(후발) 광주 충장로 유혈 충돌
(발췌 후 옆에 발생)
조선 생도의 면상을 단도로 자상
<중외일보> 1929년 11월 4일
(상황)
한국 학생들
구호를 외치고 행진가를 부르며
광주 시내로 진출
(상황/ 체인지해서 하나씩 발생)
조선 독립 만세
/
일본 제국주의 타도
/
식민교육 철폐
(인용)
"시민들도 가세하여 무려 삼만 명의 행렬이 되자
당시 광주 시내는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 28일
(상황)
학생 250여 명 (광주지역 중등 학생 1/5) 체포
(상황)
시험거부 백지동맹 동맹휴학
(상황)
전국 350여 개교 54,000여 명 동참
/(후발) 사흘간 계속된 가두 시위
(상황)
582명 퇴학 /(후발) 2,330명 무기정학
/(후발) 1,462명 검거
(말)
많은 학생은 이후 독립운동가가 되어
일본과 싸웠습니다
(이름)
윤성빈 / 국가대표 스켈레톤 선수
(말)
일제는 짓밟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이 땅의 청춘을 미처 몰랐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안경신 편 자막>
(날짜자막)
1920년 8월 3일 밤 9시
(상황자막)
평양 시내를 뒤흔든
커다란 굉음
(네임수퍼)
박애리 / 국악인 팝핀현준 / 무용가
(인용자막)
"폭탄 사건으로 큰 소동이 일어나
평양 천지는 가히 물 끓듯 하였다"
1920년 8월 19일 <매일신보>
(장소,상황자막)
(왼) 평양경찰서 (오) 평양부청
(상황) 삼엄한 경비를 뚫고
/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 폭탄을 던진 5명의 결사대
(상황자막) 신문 fs 나올 때 발생
그 중엔 여자 대원도 있었다
(프로필자막)
안경신 (1888~미상)
: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
: 한국 최초 여성 독립운동가
(말자막)
평양 시내를 뒤집어 놓은 폭파 사건의 주도자 안경신
/ 우리는 그녀의 얼굴조차 알 수 없습니다
/ 신문에 실린 초상화 한 장만으로
그 모습을 짐작할 뿐입니다
/ 하지만 그녀의 발자취만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상황자막)
여성들의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상황자막)
모집한 군자금 2천 4백 여원(쌀2400가마)
(발췌해서 옆에 발생)
2천 원은 비록 적사오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빛나게 쓰시옵소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발췌해서 옆에 발생)
가경할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 검거
<매일신보>, 1920년 11월 7일
(상황자막)
안경신은 중국으로 떠난다
(인용자막)
"나는 일제침략자를 섬으로 철수시킬
방법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인용자막)
그곳은 곧 무력적인 응징이다"
(상황자막)
임시정부 정규군
대한광복군 가담
/(후발) 독립무장투쟁 준비
(상황자막)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폭탄 거사를 결정한 광복군
(상황자막) 자막쓰다 생각한건데 방한과 광복군 폭탄거사 순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1920년 8월
미국 의원시찰단 방한 소식
(상황자막) 지도로 퍼져나가는 CG
13명 대원을
서울, 평양, 신의주로 밀파
(상황자막) 안경신 초상화 실루엣 처리
당시 33세
유일한 여성 대원 안경신
(말자막)
평양 밀파 당시 안경신은 임신 5개월 차,
아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 '아이에게 독립된 나라를 선물하겠다'는
그녀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상황자막)
평남도청 폭발
/ 경찰서 연쇄 파괴
(인용자막)
안경신 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최매지 / 안경신의 대한애국부인회 동지
(발췌해서 옆에 발생)
여자 폭탄범 안경신
아이를 품에 안고 감옥에
<동아일보>, 1921년 5월 2일
(상황)
일본 재판부 앞에 당당했던 안경신
/(인용)
"조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
(발췌 옆 자막)
사형선고를 받은 여자 안경신
<동아일보>,1921년 6월 12일
(상황자막)
안경신을 구명하기 위해
투서를 발송한 김구와 동료들
(인용자막)
"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안경신과 무관하니 방면하라"
(상황,인용자막)
1927년
수감 8년 만에 출소
/ 첫 돌도 안 돼 헤어진
아들은 눈이 멀어 있었다
/(후발)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인용)
"어머니 돌아가셨고
자식은 눈이 멀었으니 어찌 서럽지 않겠습니까"
안경신 출소인터뷰, <동아일보>, 1927년 12월 16일
(말자막)
자식에게 부끄러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한 어머니의 투쟁
/ 비록 아들에겐 그 소망을 이뤄주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랐던 세상은 /(후발) 결국 왔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박차정 편 자막
(상황)
중국에서 활동한
무장독립단 조선의용대
(이름)
김원봉/ 조선의용대 총대장
(상황)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해서 만주로 들어가
/
우리는 조선혁명군과 연합해서
우리의 조국으로 진입하려는 것입니다
(상황)
이들 중엔
/(후발) 여성들도 있었다
(프로필)
박차정 (19101944)
: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
: 의열단 단원
(말)
남성들 사이에서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던 여전사 박차정
(네임수퍼)
김영옥 / 배우
(말)
그녀는 열여덟 살부터 항일운동에 나섰습니다
(상황)
1930년 1월 15일~16일
서울 시내 11개교
여학생들의 만세 시위 지원
(상황)
일제, 배후세력으로
박차정 검거
(인용)
"우리 누나가 반병신이 되어 돌아왔다"
남동생 박문하
(상황)
일경의 감시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 중국 망명
(상황)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가입
(상황)
암살, 폭파 등으로
일제에 큰 타격을 준 의열단
(말)
이분은 특이하게 (여성임에도) 최전선에서 총을 들고
(네임수퍼)
김영옥/ 배우
(말)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너무 놀랍고
(말)
여장부였구나
(상황)
의열단 검거에
혈안이 된 일제
(상황)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건 현상금
/(후발) 100만 원(현재 가치 320억 추정)
(상황)
1931년 박차정은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했다
(상황)
1932년 김원봉은
독립군 간부 양성 학교 설립
(상황)
박차정은 비밀공작법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약한다
(장소)
1939년 중국 강서성 곤륜산
(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행군하던 그녀는
어깨에 총상을 입습니다
(상황)
후유증에 시달리던 박차정은
조국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
/(후발) 눈을 감는다
(인용)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을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서 뛴다
박차정 작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가>
(상황)
해방이 되자 남편 김원봉은
핏덩이가 말라붙은 속적삼과
유골을 가져와
(상황)
고향에 안장했다
(말)
눈물을 흘릴 바엔
일어나서 싸우라 했던 그녀
(네임수퍼)
김영옥/ 배우
(말)
독립군의 큰 기둥 김원봉을 있게 한
일생의 동지였으며
(말)
늘 최전선에 나서는 전사이자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어윤희 편 자막(수정)>
[상황]
1920년 2월 28일
서대문 형무소
[상황]벽과 벽 사이로 전달된
은밀한 두드림
[상황]
타벽통보법
벽을 두들겨 신호를 주고받아
의사소통하는 방법
[상황]
수감자들의 소통을
엄하게 처벌했던 일제
[상황]
타벽통보는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었다
[상황]
서대문 형무소
8호 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상황]
총 17개 여자 감방에 전달된 메시지
[상황,강조]
"내일 오후 만세 시위"
[상황]
학생이었던 유관순부터
출산부, 기생까지...
[상황]
1919년 3.1운동 가담 혐의로 투옥된
여성독립운동가들
/ 3.1 만세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 1일
[상황](서대문형무소 외벽에서부터 한 줄씩 탁,탁,탁 발생)
3.1 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준비한 거사
"대한 독립 만세!"
[상황]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만세 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프로필]
어윤희 (18811961)
개성여자교육회 회장
신간회·근우회 개성지회 간사
[네임수퍼]
서경석 / 방송인
[말]
일제는 그들을 철창 안에 가뒀지만
조국 독립에 대한 바람까지 묶어둘 순 없었습니다
/그 열망은
1년 전 그 날과 같았습니다
[상황]
1919년 2월 28일
개성의 한 교회
[상황]
경성에서
200장의 독립 선언서가 도착했다
[상황]
하지만 배포할 사람이 없어
창고에 방치
[상황]
'어부인'이라 불리던
한 여성이 자청해 나섰다
[상황]
34살의 여고 만학도 어윤희
자퇴서를 써놓고 독립 선언문 운반
[상황]
1919년 3월 3일 개성
[상황]
독립 선언서를 나눠주며
만세 시위를 주도한 어윤희
[상황]
그녀를 따라 만세운동에 동참한
개성시민 1만여 명
[상황]
개성지역의 만세운동을
대규모 항일시위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황]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된 어윤희
[발생]
"너의 배후는 누구인가?"
[인용]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웁니까?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하는 것이요."
[상황]
감옥에서도 그녀의 독립투쟁은 계속됐다
[상황]
"1919년 12월 24일 옥중 만세 시위 투쟁"
/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 투쟁"
[상황]
그녀를 따라 3천명여명의 수감자들이
일제히 철판을 두드리고 문을 차며
만세를 외쳤다.
[상황]
그녀는
8호 방의 '어장부'라 불렸다
[말]
그녀는 출옥 후,
여성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에 힘씁니다
/
배움을 통해 독립을 앞당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황]
개성 지역 여성들에게
국권 회복과 여성 권익 신장을 주제로
강연 활동 전개
[인용]
"여성문제 강연회"
(발생) "청중이 천여 명 보기 드문 성황"
[상황]
만인이 평등한 조국을 꿈꾸며
소외된 계층을 가르치고 보살폈던 어윤희
[상황]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
'유린보육원' 설립
/여생을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다
[말]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부당한 탄압과 차별을
온몸으로 견뎌낸 어윤희 여사
/
그녀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한평생 소외된 이웃을 보살폈습니다
<나의 독립영웅> 헐버트 1차 자막(수정)
(장소)
1949년 7월 29일
인천 제물포항
(상황)
환대 속에 한국을 찾은
86세 푸른 눈의 노신사
(인용)
"고종 황제의 수임권자로서
일본으로부터 그 돈을 받아
한국에 돌려주겠소."
(프로필)
호머 헐버트 (18631949)
대한제국 외교 특별위원
(인용)
"고종의 비자금을 찾아주겠다"
(네임수퍼)
김연수 소설가
(말)
그로 인해 40년간 묻혀있던
사건이 진실이 수면 위로 떠 오릅니다
(말)
호머 헐버트,
그는 고종의 밀사였습니다
(상황)
1906년
대한제국 외교 특별위원에 임명된 헐버트
(인용)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해야합니다!"
(상황)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건의
(상황)
3인의 특사를 무사히
헤이그로 보내야 했던 헐버트
(상황)
그는 일제의 감시를 받던
자신의 상황을 역이용한다
(인용)
'헐버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시베리아 철도로 유럽으로 향하였음'
1907.05.19. 일본 외무성 감시 기록
(상황)
헐버트가 헤이그 특사로
갈 거라 예상한 일제는
(후발)헐버트를 주목
(인용)
'헐버트가 네덜란드에 도착 후
무언가 할 것이니만큼
엄중한 주의를 바람'
1907.05.22. 일본 외무성 감시 기록
(상황)
그 사이 3명의 특사는
/(후발) 헤이그에 도착했다
(상황)
헐버트가 그들과 다른 경로로 이동하면서
일제의 관심을 분산시킨 덕분이었다.
(말)
그는 왜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와 함께 싸웠던 걸까요?
(상황)
1886년 고종이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 육영공원
(상황)
영어교사로 부임했던 헐버트
(상황)
그는 한국문화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상황)
1889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발간
(인용)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사민필지 서문
(인용)
"광대의 숙련된 동작과 음조가 있는 판소리는
예술성에서 서양소설을 훨씬 능가한다"
1902. <조선의 소설>
(인용)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조선인들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
1897. <조선의 예술>
(말)
(조선의 문화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하고요
(말)
첫사랑 같은 그런 감정을
평생 잊지 않았던 것 같고요
(네임수퍼)
김연수 소설가
(말)
그런 감정들을 글로 기록하고
남겼던 것 같습니다
(말)
1909년, 고종은 그에게
마지막 밀명을 내립니다
(설명)
미국인 헐버트
독일은행
(인용)
"상하이 독일은행에 예치한
내 비자금을 대신 찾아주시오."
(상황)
독립운동 자금으로 예치해뒀던
고종의 비자금
/(후발)약 51만 마르크 (현재 약 250억 원)
(상황)
하지만 일제의 계략으로
이미 전액 인출
(상황)
1949년, 42년 만에
그가 한국을 찾은 진짜 이유
(상황)
고종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인용)
"고종이 내게 준예치증서와 서류가 있으니
/일본에 도둑맞은 비자금을
꼭 돌려받아야 합니다."
(상황)
하지만 86세,
긴 여정의 여독으로
(상황)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헐버트는 세상을 떠났다
(말)
청춘을 이 땅의 독립을 위해 바치고
평생 마지막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푸른 눈의 동지
(말)
그가 한국에 보여준 사랑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인용)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호머 헐버트
<나의 독립 영웅 김순애 편 자막>
(자막)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후발)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27개국이 모여 평화체제를 논의한 회담
/ 이곳에 한국 대표가 파견됐다
(프로필자막)
김규식
신한청년당 당원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말자막)
파리에 특사를 파견한 작전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자막)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말자막)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을 때 민족봉기를 일으켜
/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자는 숨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막)
그 임무를 위해 파견된 밀사
/(후발) 김순애였다
(프로필자막)
김순애 (1889~1976)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설립자
(자막)
소학교 교사로 재직 당시
일제가 한국사 교육을 금지하자
/ 집에서 비밀리에
우리 역사를 가르쳤던 김순애
(자막)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
/(후발) 1912년 만주로 망명
(자막)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만나
/(후발) 동지이자 부부로
백년가약을 맺는다
(자막)
1919년 신한청년당 가입
(자막/특사와는 김규식 사진과 밀사는 김순애 사진과 발생)
특사와 /(후발) 밀사
/(후발) 하나의 독립 프로젝트에
투입된 부부
(자막)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전 세계에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
(자막)
김규식이 각국 대표에게 쓴 편지
(자막)
1919년 2월
민족 봉기를 유도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김순애
(자막)
민족 대표 중 한 명인
함태영을 만나
/(후발) 김규식의 파리 파견 소식을 전한다
(자막)
1919년 3월부터
국내외에서 동시에 터진 만세운동
(자막)
한국인의 독립 열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자막)
"1919년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네루가 딸에게 보낸 편지> 1932년 12월 30일
(자막)
"조선의 행동을 보라 무기가 없다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선과 비교해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매주평론> 1919년 3월 23일
(자막)
"3.1운동은
세계 혁명 사상 신기원을 열었다"
천두슈/ 중국의 사상가, 정치가
(말자막)
삼일만세운동 이후에도 독립을 위한 김순애 선생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자막)
1919년 7월
상해에서 여성 독립운동단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자막)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
/(후발)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 지원
(자막
해외각지에
한국 지도와 태극기를 제작해 보급
(자막)
간호원양성소 설립
/(후발) 독립전쟁에 대비하다
(자막)
1945년 해방
임시정부 요인들 귀국
(자막)
남편과 함께 조국 땅을 밟은 김순애
(말자막)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벅찬 게 있어요
(이름자막)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말자막)
그 당시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던 분들에 비한다면
/ 축구경기에서 우리가 하는 마음가짐이 비할 바가 못 되지만
/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후발) 상당히 울컥할 때가 있었어요
(감성자막)
뜨거운 감격을 품고 조국에 돌아온 그녀
해방된 조국 품에서 여생을 보냈다
<나의 독립 영웅 서태석 편 자막>
(말자막)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 곳곳으로 파고들어
우리를 수탈합니다
(네임수퍼)
최태성 / 역사 강사
(말자막)
이 평화로운 들녘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말자막)
일본인들과 친일 지주들은 이 넓은 땅을 독식했고
조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합니다
(상황자막)
1923년
전라남도 신안의 작은 섬 암태도
(상황자막)
농민들이 횃불을 들었다
(인용자막)
"뭉치어라 작인(作人 )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
뭉치어라 작인(作人)들아 뭉치어라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소작인의 노래>,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투쟁가
(상황자막)
600여명 시위대의
선봉에 선 한 농민
(프로필자막)
서태석 (1884~1943)
: 암태도 소작회장
: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말자막)
당시 암태도 농지 대부분을 차지한
지주는 친일파였습니다
/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한 그들은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
무려 수확량의
70~80%를 내라고 강요합니다
(말자막)
여기서 투쟁하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네임수퍼)
최태성 / 역사 강사
(말자막)
(생존에 대한 문제가) 막바지에 도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상황자막)
과거 8년간
암태도의 면장이었던 서태석
(상황자막)
농부들을 모아
암태도 소작인회 결성
(상황자막)
소작료 40%로 인하 요구
(후발,강조) 추수 거부
(후발,강조) 소작료 불납동맹
(말자막)
농민들에겐 생사가 달린
절실한 투쟁이었습니다
/
친일파 지주는
이때에도 일제의 힘을 이용하죠
/
목포의 일본 경찰관들을 동원해
소작농들을 위협합니다
(기사 발췌, 자막) 신문기사 사진 교체
"목포 경찰서가 암태 소작회 압박"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
(상황자막)
서태석과 농민대표 30여 명 수감
(상황자막)
7월 8일
목포법원으로 향한
600명의 암태도 농민들
(상황자막)
아사동맹을 맺고
단식투쟁 전개
(인용자막)
"대지로 요를 삼고 창공으로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동아일보> 1924년 7월 13일
(상황자막)
서울과 평양 시민들
암태도 농민들을 위한
지원금 모금
/
전국에서 지지가 이어졌다
(말자막)
'조선 농민들이 뭉친다'라는
그 자체로 두려움이 컸죠
/
생존권 투쟁에서 혹시 반일투쟁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
이 항쟁은 일본에게
엄청난 압박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자막)
소작인들의 기세에 놀란 일제
/
결국 협상 제안
(인용자막)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한다."
(상황자막)
최초의 농민운동 승리
/
일제에 한국 농민의 저력을 보여주다
(말자막)
암태도 소작쟁의의 영향으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한반도에선 약 2,500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납니다
/
서태석과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농민이 이 땅의 주인으로
/
일제와 봉건사회의 탄압에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빛나는 항쟁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지복영 편 자막>
[상황]
1937년 중일 전쟁
/ 일본의 무차별 폭격이 한창이던 중국 충칭(重慶)
[인용]
"중국 여자가 아기를 안고 폭격을 맞아 죽었는데
아기는 살아서 엄마 가슴을 기어오르는 거예요.
/ 이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나게 하는 게
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복영 인터뷰
[프로필]
지복영 (19202007)
:한국광복군 소령
[네임수퍼]
박찬일/ 셰프
[말]
지복영 선생은 한일 강제 병합 10년 후인
1920년에 태어났습니다
/ 독립투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5살 때부터 중국에서 생활했던 그녀는
/ 전쟁의 처참함을 몸소 보고 겪으며 자랐습니다
[상황]
1940년 9월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한국광복군 최초
여성 대원 중 한 명이 된 지복영
[상황]
남성 대원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했다
[인용]
"여자가 활동하면 그저 그렇지…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되겠단 생각에
/ 아주 결심을 단단히 했거든요"
지복영 인터뷰
[상황]
최전선에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에 지원
/ 주변의 만류에 부딪히자
[상황]
밤새도록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사진 위에 발생]
지청천(아버지) 지복영(딸)
[상황]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었다.
사진 하단에 [프로필]
지청천 (18881957)
[인용]
"내가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못 보내겠느냐. 잘 생각했다"
[인용]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되거라"
[상황]
낮에는 총을 들고
밤에는 광복군을 모집한 지복영
[상황]
무리한 활동으로 결핵 발병
[상황]
1943년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
[상황]
대적선전방송 원고 작성
/ 중국방송을 이용해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도왔다
[말]
한국 최초의 여성 광복군 지복영
/ 아버지가 딸을 전장으로 보낼 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 불행했던 시대에도 강건했던 아버지와 딸
/그들로 인해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인용]
"나는 그들(독립운동가)이 짓밟혀도 다시 살아나고.
꺾여도 다시 피어나는 그런 민들레와 같이 생각된다"
지복영 일기, 1983년 2월
<나의 독립 영웅> 김알렉산드라 1차 자막
(장소)
러시아
하바롭스크시
(장소)
(구) 볼셰비키당사
(상황)
이곳에
러시아인들이 기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발췌)
'알렉산드라김 스탄게비치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표지판에 KИМ 강조)
그녀는
조선인이었다
(프로필)
김알렉산드라 (1885~1918)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 혁명가
러시아 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
(네임수퍼)
김지영 / 배우
(말)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2세였던 김알렉산드라
/
철도 공사 현장에서
통역을 하던 아버지를 둔 그녀는
/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습니다
/
한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합니다
(상황)
우랄 지역
한국인 노동자들의 통역관이 된
김알렉산드라
(상황)
러시아 관리를 상대로
임금 체불 소송 승소
(상황)
한국 노동자들과 함께
우랄 노동자 동맹 결성
TC 0116~0121
(상황)
(자막 굵은표시 부분) 김지영 멘트로 들어가있는데 보이스가 너무 긴 느낌이 듭니다
보이스오버 빼고 상황자막으로
<1917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혁명 발발>
(말)
당시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러시아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
그들은 혁명이 성공하면
전 세계의 제국주의가 무너지고
/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상황)
혁명군 vs 반혁명군
내전을 핑계로
외국군 러시아 진출
(상황)
그중엔
일본 제국주의 군도 있었다
(상황)
김알렉산드라와
독립운동가들은 한인들을 모집
(상황)
일본과 연합한 반혁명군과 전투
(상황)
한편으론
호소문을 배포
(상황)
일본군을 회유했다
(인용)
당신을 착취하는 사람들을 위해
헛되이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
/
일본의 착취자들과 사무라이 장군들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싸우십시오
김알렉산드라의 호소문 중에서
(상황)
일제에게
그녀는 눈엣가시였다
(상황)
1918년 러시아 연해주는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 함락
(말)
마지막까지 연해주에 남아 투쟁하던
김알렉산드라는
/
러시아 반혁명군에 체포당합니다
(상황)
재판관은
김알렉산드라를 회유
(인용)
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
만약 조선 인민이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달성한다면
(인용)
조선 민족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인섭의 <알렉산드라김 회상기> 중에서
(상황)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그녀
(상황) TC 0311 그림 교체 부탁드립니다. 사형집행에 꼭 총든 남자가 안나와도 될 것 같아요.
얼굴과 가슴을 바둑판 형태로
난도질당한 후
/ (후발, 강조)
총살
(인용)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자유를 위해 봉기하여 승리를 거두면
/
전 세계는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
김알렉산드라는 죽음으로
자신이 자유의 씨앗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네임수퍼)
김지영/ 배우
(말)
조국의 청년들이 그 씨앗으로 꽃을 피워
독립을 위해 나아갈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
역사는 꽃으로 필 그날을 위해
기꺼이 땅에 묻혔던 그 단단한 씨앗들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현순 편 자막>
(장소자막)
국립 서울 현충원
(네임수퍼)
현정화/ 탁구 감독
(말자막)
1919년 3월 1일, 한반도는 대한독립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상황자막)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후발) 강력한 진압을 시작한 일제
(말자막)
그들은 만세운동이 일어난 현장을 진압하고
언론통제에 나섰습니다
(인용자막)
"설사 독립운동과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해 일체의 보도를 하지 말라"
일본 영자신문 <Japan Chronicle>
(상황자막)
그러나 보도통제를 뚫고
전 세계로 퍼진 한국의 3.1만세운동 소식
(상황자막)
한국의 독립 의지와 열망을 알리다
(프로필자막)
현순 (1880~1968)
: 임시정부 외무 차장
: 구미위원부 위원장
(상황자막)
통역관 집안 출신의 목사
(상황자막)
민족대표 33인의 위임을 받아
3.1운동 5일 전 상해로 밀파
(상황자막)
독립선언서를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
(상황자막)
세계 각국 대표에게 전보 발송
(하단) 1919년 1차 파리강화회의
(상황자막)
현순이 전 세계로 퍼트린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
(상황자막)
각국에 흩어진 독립운동가에게
통합임시정부 필요성 설득
(상황자막)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보낸 전보
"임시정부가 대표자들에 의하여 조직되었소.
곧 공표될 예정이니 즉시 당신의 의견을 답하시오"
(상황자막)
1919년 11월 3일
통합 상해임시정부 출범
(상황자막)
그 결과를 만든 숨은 공로자, 현순
(상황자막)
1920년 하와이로 간 현순
(상황자막)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 정부를 지원
(상황자막)
매해 3월 1일은 조국을 그리워하는
한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다
(상황자막)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축하한 한인들
(상황자막)
현순은 매해 이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상황자막)
현순은 1968년 L.A에서 생을 마감했다
(말자막)
그토록 조국을 그리워했지만 그는 이 땅을 떠난 지 55년 만인
1975년에야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임수퍼)
현정화/ 탁구감독
/해방 직후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입국이 거부됐기 때문입니다
(상황자막)
그의 비석엔
지금까지 추모의 글도
새겨지지 않았다
(인용자막)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모든 외세의 침입에 맞서 투쟁하는 민족
바로 조선인이라네
/ 모든 역경을 헤치고
조국의 독립을 지키는 민족
바로 조선인이라네
(후발) 현순의 시, <조선과 조선인>
<나의 독립 영웅 부산진일신여학교 편 자막>
(장소자막)
경북컬링훈련원/ 경북 의성군
(인용)
내가 7살 때
보통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인용자막)
아침 조례를 할 때
일장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고
/
상급생 언니들이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지요
(인용자막)
나라 없는 서러움이란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네임수퍼)
김은정/ 컬링선수
(상황자막)
편지글을 남긴 김반수 여사
그녀는 1919년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이었다
(프로필자막)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
:1919년 3월 부산 지역 만세운동 주도
(네임수퍼)
김선영/ 컬링선수
(말자막)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
점차 전국으로 퍼져
부산에도 독립선언서가 도착합니다
(말자막)
가장 먼저 봉기를 계획한 이들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상황자막)
1919년 3월 10일 밤 10시경
/
가슴에 옥양목 한 필을 품고
학교로 간 김반수
/
어머니가 혼숫감으로
마련해놓은 옷감이었다
(상황자막)
김반수와 학생들은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
(인용자막)
옥양목에다 대접을 엎어
동그라미를 그리고
/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하여
겨우 마련한 태극기
(인용자막)
어린 나이였지만
'나 하나쯤'이 아니라
(인용자막)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상황자막)
옥양목 태극기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 전시
(말자막)
교실까지 파고든 나라 잃은 서러움에
소녀들은 두려움도 잊었습니다
(상황 자막)
3월 11일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학생들
(상황 자막)
대한독립 만세
(상황자막)
현장에 있던 시민들도 합세
/
100명 이상 불어난 시위대
(상황자막)
경남 지역 최초의 만세운동 발발
(인용)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
목이 터지라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답니다
(상황자막)
강경 진압에 나선 일제
(인용자막)
"일본 군경의 총검에 길바닥이 삽시간에 피로 적셔졌다"
고등과 김반수
(상황자막)
만세 운동을 주도한
학생 11명과 교사 2명 /(후발) 전원 체포
(상황자막)
학생들은 모진 고문에도
꺾이지 않았다
(인용자막)
"주동 인물은 없으며 우리가 모두 주동 인물"
(인용자막)
"세 살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운동하는 데 무엇이 나쁘냐?"
고등과 김응수
(상황자막)
교사 주경애, 박시연 징역 1년 6개월
/
학생 11명 징역 5개월 구형
(상황자막)
학생 김순이는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
(상황자막)
그날은
고통이자 명예로 남았다
(인용)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은
나라 없는 서러움이란
/ (후발)
정말 뼈를 깎아내는 아픔보다도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말자막)
소녀들의 봉기는
그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
용기는 순식간에
더 거대한 용기를 불러일으켜
/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돌진했습니다
3월 13일 동래고보
3월 19일 범어사
3월 29일 구포시장
(상황 자막)
이후 부산 지역엔 의거가 잇따랐다
/
3월 13일 동래고보, 3월 19일 범어사
3월 29일 구포시장에서 의거가 잇따라 발생했다
<나의 독립 영웅 송몽규 편 자막>
[상황]
우리 말과 글이 금지된 일제강점기
[상황]
금기를 깬 청년이 있었다
[정보]
출처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인용,강조](한 줄씩 발생)
하늘 속의 내 맘을 잠그고 싶고
(발생)내 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 (꿈 부각되면서 옆에 발생) 몽夢
(별 부각되면서 옆에 발생) 규奎
[프로필]
송몽규(19171945)
독립운동가
문인
[장소]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네임수퍼]
현우 /배우
[말]
송몽규
그는 시인 윤동주의 사촌 형이었습니다
/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문학청년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윤동주 시인과 함께했지만
/ 그동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상황]
1935년 18세로 신춘문예 당선
(발생) <숟가락>
일제 강점기
가난한 부부의 애환을 담은 콩트
[인용]
"두고 봐! 대기는 만성이야!"
윤동주
/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가
열등감을 느낄 정도였다
[말]
마음속 깊이 문학의 바다를 품고 있었던
청년 송몽규
/ 그러나 조국의 현실은
청년에게 꿈의 바다를 열어주지 못했습니다
[상황]
1935년 11월
중국 지난(濟南)으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
[상황]
1936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
/ 육체는 부서져도
영혼은 무너지지 않았다
[인용]
"독립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
[상황]
1942년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입학
[상황]
독립방안을 연구하는 한인학생모임 조직
[상황]
조선독립을 위한
학병모집을 꿈꿨던 송몽규
[상황]
1943년 일본 경찰에 검거
[인용]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다"
송몽규
[상황]
옥중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후쿠오카 형무소에 각자 수감됐던
송몽규와 윤동주
/ 청춘은 빛을 잃었다
[인용]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송몽규, <밤>
[인용]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윤동주, <무서운 시간>
[인용]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송몽규, <밤>
[인용]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윤동주, <무서운 시간>
[상황]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 뇌출혈로 사망
[상황]
20여 일 후 송몽규 사망
[상황]
그는 차마 눈도 감지 못했다
[인용]
"원수의 나라에 내 뼛조각,
살 한 점, 남기지 말아달라"
[말]
일제는 그의 목숨과 함께
[네임수퍼]
현우 /배우
[말]
반짝이던 재능과 꿈도
함께 짓밟았습니다
/ 그 시절 그렇게 사라져갔을
수많은 '송몽규'들을 생각해봅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수흥 편 자막
(장소)
1925년 3월 16일
만주 고마령
(상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대 참의부의
전체작전 회의가 열렸다
(상황)
현장을 급습한 일본군과 경찰
(상황)
4시간 동안 계속된 사투
(상황)
참의부 간부 42명 전사
(상황)
살아남은 한 남자
(상황)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홀로 압록강을 건넌다
(프로필)
이수흥 (19051929)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의부 특무 정사
(장소)
이수흥 공원
경기도 이천
(말)
만주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대가
(네임슈퍼)
넉살 래퍼
(말)
참혹하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참의부 대원 이수흥
/그는 식민통치의
심장부로 침투합니다
(장소)
1926년 경성
(상황) 총알 박히듯 빠르게 발생
모젤 권총 1정
(발생)브라우닝 구식 권총 1정
(발생)실탄 176발
(상황)
홀로 국내 진공 작전을 개시한 이수흥
(인용)
"안성 갑부 집에 괴청년 갑자기 나타나"
1927.11.01. 동아일보
(상황)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 요구
(상황)
일제 주요기관 습격
(상황)
고관 암살
(인용) 0156 시간대에 나오는 신문 교체 (메일에 관련자료 첨부)
신출귀몰
실색한 경찰 총동원
온 세상을 놀라게 한 권총범
(말)
그의 거사는 연일 호외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말)
그 누구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수흥 의사를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말)
친일 부호와 일제의 두려움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상황)
도피 도중 전해 들은
아버지의 부음
(상황)
그는 비밀리에
장례식에 참석한다
(인용)
"신장 5척(5척→150cm로 체인지)되는 자들을
모조리 조사하라!"
카와마타 이천경찰서장
(상황)
작은 키를 단서로
경찰 3천여 명을 동원
대대적인 수색
(상황)
이수흥은 현상금에 눈먼
밀고자에 의해 체포된다
(상황)
신출귀몰했던 이수흥을 보기 위해
공판장은 만원
(상황) 도장 찍히듯 한 줄씩 발생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 취체령 위반
살인강도, 살인미수 등
(상황)
방대한 양의 사건으로
공판 지연
(상황)
1928년 7월 사형 선고
(인용)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인용)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이수흥 의사의 최후 진술
(말)
1926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3년 후까지
이수흥 의사 관련 기사는 수백 건
(말)
당시 그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
그의 의거는
일제에겐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었지만
(말)
우리 국민에겐
통쾌한 한 방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조지 루이스 쇼> 자막
(말)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구금돼 모진 고난을 겪었던 곳,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 1920년 7월 이곳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네임수퍼)
최원정 / 아나운서
(상황)
1920년 7월
한 남자가 수감되자
유럽이 들끓기 시작했다
(상황)
그의 체포는 영국언론에서 활발한 논란
<주한 프랑스 부영사관 보고서> 1920. 8. 19
(프로필)
조지 루이스 쇼 (1880~1943)
:아일랜드 출생
:선박회사 이륭양행 사장
(상황)
중국 단둥에서 선박회사 이륭양행을
운영했던 조지 루이스 쇼
(상황)
그의 배는 단지 무역선이 아니었다
(상황)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김구
(상황/인용까지 떠있고)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
(인용)
일본 경비선이 따라오면
정지를 요구하나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났다
(프로필)
김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
(상황)
이륭양행의 계림호로 상해 도착
(프로필)
의친왕 이강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상황)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탈출을 감행
(상황)
1919년 4월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도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임시정부로 이동
(상황)
임시정부의 교통국 역할을 한 이륭양행
(상황)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활동을
적극 도왔던 조지 루이스 쇼
(상황)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 일제의 주요기관 폭파계획 참여
(신문 발췌)
이륭양행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원 활약 설
폭탄을 가져왔다
(발췌옆 발생)
유해한 인물
일본 외무성 기록
(강조)
그는 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을까
(상황)
약 800년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출신
(상황)
식민지 국민의 고통을 알고 있던
조지 루이스 쇼
(상황)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이다"
(상황)
1920년 7월
조지 루이스 쇼 전격 체포
(상황)
1932년 6월
조지 쇼의 선박(신우호) 억류
(인용)
영국 이륭양행의 가치
계속 하락
<만주일보> 1934년 6월 24일
(인용)
이륭양행 매도
<동아일보> 1935년 3월 9일
(상황)
일제 탄압으로
사업을 접어야 했던 조지 루이스 쇼
(상황)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네임수퍼)
최원정 / 아나운서
(말)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배에 맞서 함께 싸워준
푸른 눈의 동반자
/ 그는 어려운 시절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던
든든한 지원군이자 친구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정정화 편 자막>
[네임수퍼]
고두심 / 연기자
[상황]
1920년 1월
한 여인이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행방불명된 남편과 시아버지를 찾아 떠난 길이었다.
[인용]
"쓰러져 가는 한 나라의 숨통을 지켜본 소녀가
이젠 여인의 이름으로 그 나라를 떠나가는 길이다
/ 도피도 아니고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맞기 위해 스스로 떠나는 길이다"
정정화 <장강일기>
[프로필]
정정화 (1900~1991)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 조달 특파원
[네임수퍼]
고두심 / 연기자
[말]
집을 나선 지 꼬박 보름 만에 만난
시아버지와 남편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 반가움도 잠시,
그녀는 그곳의 실상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상황]
건물세를 못 낼 만큼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황]
국권 회복의 과제를 떠안은
독립 운동가들의 또 다른 고충
[상황]
하루하루의 끼니
[인용]
"임시정부의 밀사로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조달하라!"
[상황]
편지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국경을 넘은 정정화
[인용]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디에선가
왜경들이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정정화 <장강일기>
[상황]
불에 비춰야 보이는 비밀 편지를
각계 인사들에게 전달한 정정화
[상황]
1930년까지 6번 국내 잠입
/ 상하이(上海)에서 경성까지
총 약 3만 킬로미터를 오가며 지원금 마련
[상황]
1922년 일본 경찰에 발각
[상황]
고초를 겪고도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상황]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上海) 철수
[상황]
피난 중에도
임시정부 식구들의 끼니를 마련했던 정정화
[인용]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일이란
어렵고 힘들었다.
/ 남모르는 가슴앓이로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정정화 <장강일기>
[상황]
1940년, 8년간의 피난 끝에
임시정부 충칭(重慶) 정착
[상황]
정정화, 독립운동가들의 아이들을 위해
유치원 교사로 활동
[인용]('모국의' 그대로 두고 '산과 들', '냄새', '마음을'로 체인지)
"모국의 산과 들, 모국의 냄새, 모국의 마음을
얘기로만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 나는 틈만 나면 조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정정화 <장강일기>
[상황]
그렇게 스무 살 새색시는
젊은 날 25년을 임시정부에 헌신했다.
1945년 해방 후에야
그녀는 긴 타향살이를 마쳤다.
[네임수퍼]
고두심 / 연기자
[말,인용]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정정화 <장강일기>
<나의 독립 영웅> 신팔균 자막
(상황)
1907년 8월 1일
(상황)
일제,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상황)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대한제국군
(상황)
대한제국 최후의 군인
(상황)
군복을 벗고 의병이 되다
(프로필)
신팔균(1882~1924)
대동청년단 조직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네임수퍼)
김인권 / 배우
(말)
무관(武官)의 집안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황실 경호를 맡았던 신팔균 장군
(말)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는
점점 일본의 침략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말)
그는 유명무실해진 군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낙향합니다
(상황)
1910년 만주로 망명
(상황)
독립군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된 신팔균
(인용)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그래서 온 국민을 일제의 사슬에서 구하자!"
신흥무관학교 연설 중
(상황)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
(인용)
'궐기하라 독립군!
/ 살신성인하면
2000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 일가를 희생하라'
(상황)
통합 무장운동단체
대한통의부 출범
(상황)
의용군 총사령관이 된 신팔균
(상황)
평북 창성군 후평 소재 일본주재소 습격
1923년 1월 5일
/초산군 서면 연담리 일경 사살
1923년 6월 28일
/강계 회룡동 부근에서 일제의 경찰대 섬멸
1923년 8월
(상황)
대한통의부의 실력이 강대해져
(후발) 독립단 중 제1위
일본 외무성 기록
(상황) 대한제국군 출신 신팔균의
체계화된 훈련 덕분이었다
(인용)
각 중대 부족한 군인을 추려 가르치니
45개월 만에 모두 성적이 우수
/신팔균 친히 정성을 다하여 가르침
<동아일보> 1924년 08월 10일
(상황)
1924년 7월 2일
중국 마적 300여 명, 독립군 훈련 요새 기습
(상황)
대원들을 피신시키고 선두에서 지휘한 신팔균
(상황)
3시간 교전 끝
(후발)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인용)
야외교습 중 토군(마적)의 습격으로
교전 중 탄환이 다하여 전사
<동아일보> 1924년 08월 10일
(인용)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
임종 직전 신팔균
(강조)
그러나 현장에서 마적으로 변장한 일본군 시체 발견
/
일제가 사주한 공격이었다.
(말)
조국을 지키지 못한
군인이라는 상처를 안고
(말)
신팔균 선생은
한평생 전장에서 살았습니다
(말)
그는 마지막까지
대한제국의 명예로운 군인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박자혜 편 完
(상황)
1928년
경성에 이상한 산파소가 있었다
(인용)
열 달 가야
손님 하나밖에 없고
(인용)
간판 붙여놓은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이다
1928.12.12. 동아일보
(상황)
그러나 손님이 없던 이 산파소에
끊임없이 드나들던 사람들
(인용)
'경성에서 알게 된 산파가 편지를 보내
사회를 위한 일에 흥미 있다는 사람을 소개해줬다'
독립운동가 조만식 / 1925년 군자금 모집사건 신문조서
(상황)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프로필)
박자혜 (1895~1943)
조선 간우회 회장
신채호의 부인
(말)
산모보다 독립운동가들이
더 자주 드나들던
(말)
이 수상한 산파소의 주인은
박자혜
(네임수퍼)
안현모 방송인
(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부인이었습니다
(말)
그녀는 조선총독부 의원의
간호원 출신이었습니다
(상황)
1919년 3월 1일
병원에 부상자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상황)
만세운동 중
일본 경찰에 무참하게 진압당한 사람들
(상황)
간호원 박자혜는
그 아수라장에 있었다
(인용)
"왜 이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가"
(인용)
"왜 일본은 이토록 무자비하게
그들의 외침을 묵살하는가"
(말)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놓으면
조선총독부로 끌려가
(말)
다시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말)
박자혜는 조국의 비통한 현실에
분개합니다
(강조)
"더 이상 일본인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지 않겠다!"
(상황)
1920년 4월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
(상황)
1923년
남편 신채호 의열단 입단
(인용)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조선 혁명 선언', 신채호
(상황)
경성에서 산파소를 하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박자혜
(상황)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접선 장소로 사용
(상황)
남편의 편지를 전해 받고
정보와 물건 전달
(상황)
그녀의 산파소는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였다.
(상황)
남편 신채호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
/수시로 그녀를 감시, 고문했다
(상황)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던 박자혜
/1927년 1월
의열단원들과 함께
직접 거사에 참여한다
(인용)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백주(白晝) 도발한 근래 초유의 사건
1927년 1월 13일 <동아일보> 호외
(상황)
식민수탈의 상징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를 위해 경성에 온 나석주
(상황)
박자혜는 목숨을 걸고 길을 안내했다
(상황)
1928년 4월
남편 신채호
중국 뤼순 감옥 투옥
(인용)
솜 두툼히 넣은 옷 한 벌
보내고 싶지만
(인용)
재료 살 돈이 없어
애간장을 태웠고
(인용)
야위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기 일쑤였다
1928년 12월 12일 <동아일보>
(인용)
'정 할 수 없으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
남편 신채호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
(상황)
신채호 뇌일혈로 의식불명 생명 위독
1936년 2월 19일 <동아일보>
(인용)
여보,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후발)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후발)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인용)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박자혜
(상황)
독립을 2년 앞둔 1943년
(상황)
박자혜는 고문 후유증으로
단칸방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말)
남편 신채호의 명성에 가려져
그녀의 이름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말)
그러나 박자혜,
(말)
그녀는 남편 신채호의 뒤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며
(말)
한편 주도적으로 자신의 투쟁을 했던
당당한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계봉우 자막
(상황)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
1911년 조선교육령 발표
(상황)
한국어와
한국 역사 교육 금지
(상황)
한국 학생들에게
식민사관을 주입한다
(상황) 정체성론을 풀어쓰기 애매해서 내선일체로 변경하였습니다
일선동조론 [日鮮同祖論] : 일본과 한민족의 조상은 같다
내선일체[內鮮一體] :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상황)
이때 식민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역사 교과서가 출간됐다
(인용)
슬프다, 조선의 청년 제군은 합병조약을 잊지 말고
기운을 내고 힘써 국치를 씻어버려야 할 것이다
<최신동국사> '합병의 치욕' 중
(프로필)
계봉우 (1880~1959)
: 국어학자, 역사학자
(말)
국권을 침탈한 일제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빼앗은 것은
(네임수퍼)
강원국 / 작가
(말)
우리의 말과 글이었습니다
(말)
함경남도 영흥에서
사학을 연구하던 계봉우는
(말)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청년 계몽운동에 나섭니다
(상황)
1911년
북간도로 망명
(상황)
북간도 광성학교
교사가 된 계봉우
(상황)
한국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와 국어 교육
(인용)
7~8시간을 가르치고
내일 가르칠 『신한독립사(新韓獨立史)』를 저술하여
등사까지 하고 나면 매일 평균 노력이 10시간 이상에 이르렀다
계봉우 자서전 <꿈속의 꿈>
(상황)
계봉우 집필 <조선 역사>는
단군 시대와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
(상황)
일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
/(후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
(상황)
그의 교과서는
민족교육의 기틀이 됐다
(말)
계봉우는 말과 글을 잃으면
생각을 잃게 되고
(말)
역사를 잃으면
미래마저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말)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당시 독립 운동가와 항일 의병들의 투쟁 또한
(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황)
1914년 6월~8월
한인 신문에 전기<만고의사 안중근> 연재
(상황)
안중근이 결성한 비밀결사
동의단지회의 이름과 취지문을
구체적으로 적은 최초의 자료
+
(발췌, 옆에 자막 발생)
만고의사 안중근
동의단지회
태극기는 발췌만
(상황)
1916년
계봉우 일제에 체포
(인용)
"네가 안중근 전을 이렇게 지었으니
안중근과 같은 놈이 아니겠느냐"
(상황)
3년간 옥고를 치른 계봉우
(말)
육체를 무너뜨릴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상황)
출옥 후에도 이어진
계봉우의 저술 활동
(상황)
연해주 항일민족독립 운동을 기록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상황)
한말 의병의 활동을 적은
<의병전> 저술
(상황)
그의 기록은
후대에 남기는 절실한 당부였다
(인용)
독립은 그리 급속히 되는 일은 아니다
당대에 성공 못 한다면 아들에게 그 책임을 전하고,
(인용)
손자, 증손, 고손, 현손에게까지 그 책임을 전하여
기어이 성공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요, 결심이었다
계봉우의 자서전, <꿈속의 꿈>
(말)
그가 일생을 바쳐 지키려 한 것은
말과 글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말)
말하고 기록함으로써 끝내 이어질
강인한 민족정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임수퍼)
강원국 / 작가
(말)
일제가 그토록 간악하게 없애려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은 그렇게 이어져
지금도 이 땅에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은숙 자막
(상황)
1910년 한일강제병합
(상황)
나라를 팔고 침략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친일파들
(상황)
그 대가로 일왕이 준
귀족 작위와 은사금
(상황)
그들은 일본으로부부동반 단체 관광을 떠났다
(상황)
이 무렵 정반대의 길을 떠난
이들이 있었다
(상황)
전 재산
40만 원(현재가치 약 600억 원) 처분
(상황)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떠난 60명의 대가족
(말,인용)
"갈수록 첩첩산중 칼날 같은 사이에
쌓인 백설이 은세계를 이루었다
(말,인용)
지독한 추위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상황)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내로
항일 투쟁기를 남긴 여인
(프로필)
이은숙 (18891979)
<서간도 시종기> 집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의 아내
(말)
일흔을 넘긴 나이에
그녀가 붓을 든 이유는 단 하나
(말)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네임수퍼)
배우 이주실
(설명)
『서간도 시종기』 / 이은숙 회고록
(말)
나라를 팔아넘긴 친일파는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살았지만
(말)
독립운동가들은 점점
맥없이 잊혀갔습니다
(상황)
명문가 출신으로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남편 이회영
일가의 전 재산으로 설립한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
(상황)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먹이고, 입히니 재산은 금세 바닥났다
(인용)
나날을 굶으며 지내는데,
생불(生佛)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하리오
생각다 못해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고 떠나서 왔다"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상황)
두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막내를 임신한 채 홀로 귀국한 이은숙
(상황)
명문가 안주인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식모살이와 고무공장 노동
(상황)
유곽 기생들의 옷을 수선해
중국에 생활비와 군자금을 보냈다
(말,인용)
"매일 빨래하고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
(말,인용)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드리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상황)
이은숙의 헌신으로
1931년 남편 이회영
/(후발) '항일 구국연맹' 결성
(상황)
무장투쟁단체 '흑색공포단' 조직
(상황)
일제 기관 파괴 및 친일파 처단
(상황)
1932년 11월 도착한 한 통의 전보
(체인지)
남편 이회영 사망
(인용)
"슬프다, 우리 부부 죽어 헤어질 줄 알았다면
생사 간 같이 있지 이 길을 왜 택했으리오"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상황)
하지만 남편의 뒤를 이어
굳건히 독립운동을 이어간 아들들
(상황)
밀정 암살에 가담한
장남 이규학
(상황)
친일파 처단 후 광복까지 복역한
차남 이규창
(인용)
"과거지사 말할 것도 없는 파란(波瀾) 중
이제껏 살아온 게 모두가 몽환이로다"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말)
그녀는 지나간 시간에 대해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말)
꼿꼿이 앉아서 기록 했죠
(말)
눈도, 기력도, 총기도 희미해진
팔순의 나이
(말)
그녀를 일으켜 세운 힘은
잊힌 독립투사들을 기억해달라는
(말)
생애 마지막 절규 아니었을까요
<나의 독립 영웅 문양목 편 자막>
(자막)
1908년 샌프란시스코
/(후발) 한인 사회가 분개하는 사건 발생
(자막)
<이브닝 스테이트먼> 미국 일간지
1908년 3월 20일
(프로필/ 스티븐 사진 아래)
D.W. 스티븐스
대한제국 외교 고문
(자막/ 신문기사 내용 아래 후발)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
(자막)
한국은 일본의 보호 아래 많은 혜택을 받고 있고
한국민들은 일본의 보호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름자막)
이제석/ 광고인
(말자막)
미주의 한인들은 분노합니다
/ 한인 대표 네 사람은 스티븐스를 찾아가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합니다
(자막)
스티븐스는,
조선은 어리석은 황제와 백성 때문에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막말과 함께
기사의 정정을 거절
(자막)
<THE CALL>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
1908년 3월 23일
(자막/ 기사 타이틀 아래)
한국 비방에 싸우다
(자막)
격분하여 스티븐스를 구타한
4명의 한인 대표
(자막/ 문양목 얼굴 클로즈업 되면)
그 뒤에는 문양목이 있었다
(프로필자막)
문양목 (18691940)
샌프란시스코의 독립 운동단체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자막)
1905년
일제 침략에 저항하다
하와이 이주를 결심한 문양목
(자막)
1902년~1905년
하와이 이주 한인은 7,300여 명
(자막)
이주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던
문양목과 한인들
(자막)
40°C 뙤약볕 아래
10시간 이상
혹독한 노동을 견뎠다
(말자막)
하와이 한인들은 점차 미국 본토의 샌프란시스코와 LA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습니다
/ 1906년 문양목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결심합니다
/ 한인들의 힘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막)
1907년
샌프란시스코의 독립운동단체
대동보국회 결성
(자막)
미주 한인 신문
대동공보 창간
(자막)
미국과 한국을 넘어 중국까지
/(후발) 한인들의 활약상을 전파
(자막)
그리고 터진 스티븐스 사건
(자막)
<THE CALL>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
1908년 3월 24일
(자막/ 전명운 사진 옆 기사 타이틀부각)
한인들,
일본제국주의 옹호 발언한 스티븐스 저격
(자막)
변호사 선임에 앞장선 문양목
(자막)
후원금을 모으기 위한 광고 내다
(자막)
1911년 6월
재미 한인 모두가 납부하는
국민 의무금제도 제안
(자막)
의무금은 연 5원
당시 일반 근로자 봉급의 1/4 수준
(자막)
조국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던 한인들
(자막)
세탁, 청소를 하던 가난한 이주 노동자였지만
/(후발) 그는 조국 독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막)
해외 한인들의 기부금은
대한독립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름자막)
이제석/ 광고인
(말자막)
나라 잃은 이주민으로 고달픈 삶을 살면서도
문양목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 머나먼 곳에서도 한결 같았던 그 열망들은
독립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나의 독립영웅> 권기옥 편 자막
(상황)
1932년 1월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후발) 상하이 사변
(상황)
즉각 비행기를 띄워
반격에 나선 중국 공군
(상황)
그들 중엔
한국인 조종사가 있었다
(인용)
중국의 하늘을 정복하는 조선 용사
그중에 꽃 같은 여류 용사도 있어
<동아일보> 1926년 5월 21일
(프로필)
권기옥(1903~1988)
: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
: 중국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
(네임수퍼)
변영주 / 영화감독
(장소자막)
숭의여자고등학교
(말)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그녀의 투쟁은 열여덟부터 시작됐습니다
(말)
어떻게 하면 자신의 힘으로
일제를 부술 수 있을까
(말)
고민하던 권기옥은
몇 해 전 경성에서 봤던 비행쇼를 떠올립니다
(말)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다면 여성이지만 위력적으로
일제와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인용) 사진은 맨 왼쪽 가운데 소녀
어린 마음이었지만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잡지 <여원> 1961년 7월호
(상황)
당시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던
항공학교
(상황) 중국 지도 씨지 중국 보정(바오딩)/ 남원(난유엔) / 관동(관둥) / 운남(윈난)
반짝하다가 보정, 남원이 꺼진다
중국 4개 비행학교 중
2곳에서 입학 거절
(상황) 불빛 꺼지고 윈난으로 쭉 철도 합성
권기옥은 한 달간 중국을 가로질러
윈난성의 비행학교를 찾아간다
(상황)
그녀의 나이 21세였다
(인용)
여자의 몸으로 망국의 한을 품고 국권을 되찾겠다
이 먼 변방까지 왔으니 꼭 입학을 허가해 주시오
윈난성 성장(省長) 탕지야오의 추천서
(상황)
1923년
윈난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
(상황)
우수한 기량으로
훈련 9시간 만에 단독비행 허가
(말)
비행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권기옥은
(말)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 비행기 구입을 건의합니다
(말)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엔 그럴만한 자금이 없었습니다
(상황)
중국 혁명정부 항공대 입대
(상황)
공군 모집 선전비행을
부탁받은 권기옥
(상황)
그녀는 베이징 선전 비행 직후
비장의 결의를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인용, 강조)
"폭탄을 안고 날아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왕궁을 폭파하리라"
(상황)
1935년 베이징의
대학생 시위로 선전비행 취소
(말)
선전비행이 취소되면서
권기옥의 일제 폭격 계획 또한 결국 무산됐습니다
(말)
하지만 조국의 하늘을 지키려던
그녀의 꿈은 끝내 이뤄졌습니다
(상황)
중국에서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49년 귀국한 권기옥
(상황)
우리나라 초기 비행 역사의 주역으로
한국 공군의 창설을 도왔다
(인용)
"청년들이여 꿈을 가져라"
/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
권기옥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남긴 말
<나의 독립 영웅 김란사 편 자막>
(상황자막)
1차 세계대전 종료
1919년 파리 평화회의 개최
(상황자막)
고종은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에 호소할 계획을 세운다
(상황자막)
고종의 명령을 받은 밀사(密使)
/
한 여인이었다
(프로필자막)
김란사 (1872~1919)
: 독립운동가
: 이화학당 총교사
(네임수퍼)
문훈숙 / 유니버셜 발레단장
(말자막)
고종의 밀사였던 여인, 김란사
/
참 멋쟁이셨죠
/
이 여인은 인천항에서 통상업무를 하던
한 관리의 아내였습니다
(말자막)
남편을 통해 신문물을 자주 접한
주부 김란사는
/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자막)
이화학당에 입학 신청을 낸
24세의 유부녀 김란사
(상황자막)
당시 기혼자 입학 불가
(상황자막)
그녀는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를
직접 설득한다
(인용자막)
"내 인생에 빛을 찾을 기회를 주세요.
어머니들이 배워야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라이(Lulu E. Frey)교장의 보고서
(네임수퍼)
문훈숙 / 유니버셜 발레단장
(말자막)
결혼한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아낸 김란사
/
이화학당을 마치고
당시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최초로 갑니다
/
그녀는 자비를 들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습니다
(상황자막)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서
한국 여성 최초 학사 학위 취득
(인용자막)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
<황성신문>, 1909년 5월 5일
(상황자막)
1907년
이화학당 교사 취임
(상황자막)
이화학당의 비밀여성독립단체
이문회를 지도
/
그중엔 유관순도 있었다
(상황자막)
그녀가 학생들에게
수없이 한 말
(인용)
"꺼진 등에 불을 밝혀라"
(말자막)
김란사는 학생들에게 어두운 시대를 밝혀나갈 미래는
스스로에게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
그녀는 이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선
능력 있는 여성을 교육하고
/
더 나아가 여성 독립투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자막)
1910년 한일강제병합
고종의 통역사로 임명된 김란사
(상황자막)
그녀는 고종을 도와
독립 지원 외교를 펼쳤다
(상황자막)
1919년 김란사에게 밀지(密旨)를 내린 고종
(인용자막)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원본을 찾아
파리에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민족운동가 신흥우의 증언
(인용자막)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상황자막)
그러나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로
김란사의 파리 파견 계획 취소
(상황자막)
포기하지 않고
국권 회복을 돕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떠난 김란사
(상황자막)
독립지사들을 위한
환영 만찬 직후
/(후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상황자막)
그녀의 사체는 검게 변해있었다
/
일제의 독살설이 유력하게 퍼졌다
(말자막)
일평생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그 열망을 독립운동으로 이어갔던 여성 김란사
/
그녀의 열정은
독립운동가 유관순을 만들었고
/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이 조국 해방의 주역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조마리아 편 자막>
(상황자막)
1910년 겨울
(상황자막)
여름 옷감을 꺼내든 어머니
(상황자막)
어머니가 지은 건
아들이 입을 수의(壽衣)였다
(상황자막)
아들의 죄명은 살인
(인용자막)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프로필자막)
조마리아 (1862~1927)
:안중근의 어머니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 위원
(네임수퍼)
정성화 / 뮤지컬 배우
(말자막)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어머니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
그녀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어머니였습니다
(상황자막)
중국 하얼빈역 / 1909년 10월 26일
/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상황자막)
어머니는 아들의 변호를 맡을
한국인 변호사를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상황자막)
이를 방해했던 일제
/(후발) 조마리아를 찾아와 위협
(인용자막)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는데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말자막)
일제의 방해에도 어머니는
아들의 변호를 맡아줄 한국인 변호사를 찾는 데 성공합니다
(네임수퍼)
정성화 / 뮤지컬 배우
(말자막)
하지만 일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를 거절합니다
(상황자막)
안중근 사형 선고 / 1910년 2월 14일
(상황자막)
어머니는 동생들을 보내
뜻을 전한다
(인용자막)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이 세상에 나오너라"
(상황자막)
안중근, 공소권 포기 / 1910년 2월 19일
(인용자막)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상황자막)
자식을 보낸 어머니는
슬픔에 빠져있지만은 않았다
(상황자막)
1919년
아들이 독립을 위해 싸운 그곳,
상하이로 떠난 조마리아
(상황자막)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창립
/
모금을 통해 재정 후원
(인용자막/ 기사인용, 작은따옴표를 사용해주세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쉬는 날이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분주히 동포들을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
(상황자막)
그녀는 마지막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생을 마감했다
(말자막)
여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건
아들 중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
어머니의 분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
조마리아, 그녀는 가슴이 찢기는 슬픔을 삼키고
아들의 생애를 끝내 명예롭게 지켜낸
/
우리의 어머니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서원준 편 자막>
[상황]
1933년 6월 평양
/ 한 남자가
조선은행을 기습하려다 발각
/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도주
[인용]
'평양권총사건 속보'
<동아일보> 1933년 6월 8일
[인용]
'전 조선에 자급수배'
<동아일보> 1933년 6월 9일
[프로필]
서원준 (19081935)
:조선혁명군 국내 유격대장
:평양 점원상조회 간사
[말]
평양 시내 총격전 이후 일본 순사부장까지 사망하자
사건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네임수퍼]
김보성 / 배우
[말]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총 3만여 명의 경찰을 동원했습니다
/ 서원준, 그는 사건 바로 몇 년 전까지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상황]
공장부터 상점까지
(후발) 성실히 일하며 가족을 부양한 가난한 청년
[상황]
일본인들은 그런 한국인 노동자들을멸시하며 핍박했다
[상황]
1924년 평양 노동조합
점원상조회에 가입한 서원준
[말]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자들이 가졌던 저항 의식은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으로 전개됩니다
/ 일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동자 조직을 탄압합니다
[상황]
1926년
평양 형무소에 수감
[상황]
1930년 4월출소 후 만주로 망명
[상황]
무장운동단체 조선혁명군 입대
[상황]
(발생,인용)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 5만 원을 모금하라"
[상황]
평안도·황해도 일대 일본인 상가 기습
[상황]
일본인에게 6천 여원 탈취
(현재 가치로 약 8천만 원)
[상황]
1933년 6월
조선은행을 기습하려다 발각
[상황]
도피 중 그가 저격한 일본 순사부장 사망
[인용]
'연 인원 삼만여 명 출동'
<동아일보> 1933년 6월 18일
[말]
일제는 날을 곤두세워 삼엄하게 수색했지만
서원준의 행방은 묘연해져 갔습니다
/ 그의 도피를 한마음으로도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황]
자신의 배를 이용해 도주를 돕고
[상황]
안전한 잠자리를 내어주고
[상황]
가족까지 동원해
그를 장사꾼으로 위장시켰던 사람들
[인용]
'도주 방조한 혐의로 십여 명 청년 검거'
<동아일보> 1933년 6월 6일
[상황]
그들은 모두 옛 노동자 동지들이었다
[상황]
1933년 6월 16일
서원준 체포
[상황, 인용]
마지막까지 당당했다
(인용 발생)'방청객에 미소와 목례를 보내었다'
[네임수퍼]
김보성 / 배우
[말]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후발)겨우 스물 여덟
/푸른 날이었습니다
[말]
저도 늘 의리를 외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삶 앞에서는
/함부로 의리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
서원준, 그는 그야말로
국가와 동료에 대한 의리를 지킨
/진정한 의리남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한시대 편 자막>
(상황자막)
1919년 샌프란시스코
(상황자막)
'포도왕'이라 불리던 부자가 있었다.
(상황자막)
황무지를 일궈 만든
530만㎡ 농장
(상황자막)
농장주는 그 결실을
한국의 독립자금으로 내놨다
(프로필자막)
한시대 (1889~1981)
: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
(말자막)
그 시절 미국에서 큰 부자가 된 한국인이 있었다
/
참 놀라운 일이죠
(네임수퍼)
김준현 / 개그맨
(말자막)
그의 삶은 조국의 운명을 따라 요동쳐
미국까지 흘러갔습니다
(상황자막)
1900년대 초
일제 침략과 가난을 피해
하와이로 떠난 한인들
/
그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가 됐다
(인용)
'장정들은 하루 10시간 노동을 하면 69센트(현재가치 약 1만 5천원)
를 받았고 부녀자들은 50센트를 받았다'
흥사단 <기러기> 1967년 10월호
(말자막)
당시 열다섯 살 소년이었던 한시대는
/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임수퍼)
김준현 / 개그맨
(상황자막)
1913년 샌프란시스코의
명문고를 졸업한 한시대
('한시대씨 형제가 함께 중학을 졸업'은 음영 발췌/ 발췌 밑에 인용 자막발생)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하는 한시대 형제는 대학에 입학코자
<국민보>, 1914년 1월 7일
(상황자막)
하지만 이민노동자였던 그에게
대학 진학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말자막)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 순 없다고 생각한 한시대는
/
땅을 사서 직접 농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합니다
(네임수퍼)
김준현 / 개그맨
(말자막)
그는 딜라노의 은행장을 직접 설득해
1,000달러를 빌립니다
(상황자막)
과일, 정원 묘목 재배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
(상황자막)
대규모 농장의 주인이 된 한시대
/(후발)
한인들을 농장에 고용, 정착을 도왔다
(말자막)
그와 한국인들은 똘똘 뭉쳐
낯선 땅에 한국인의 강인한 뿌리를 내려갔습니다
/
그리고 1917년 9월,
안창호가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에 가입합니다
(상황자막)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의연금을 모금
(상황자막)
재산 상당부분인 665달러를 기부
(상황자막)
미주 한인들의 의연금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사용
(말자막)
그는 다뉴바 한인 국어학교, 태극학교를 세워
한인 2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고
(네임수퍼)
김준현 / 개그맨
(말자막)
한인신문을 찍어낼
인쇄기 구입을 돕기도 했습니다
/
한시대는 타향살이를 하는 미주 한인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습니다
(상황자막)
1941년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제
(상황자막)
미국 내 반일 분위기를 틈타
항일운동을 본격화
(상황자막)
1941년 한인 뱃지를 보급한 한시대
(상황자막)
한국과 일본이 다른 나라이며
독립된 나라임을 미국에 알렸다
(상황자막)
1941년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단체를 통합
(상황자막)
한인경위대, 맹호군을 창설
(인용자막)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싸우겠다"
(상황자막)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전
/(후발)
한국광복군을 지원하려했다
(인용자막)
"법률 없는 우리는 양심으로 법률을 삼고
재산 없는 우리는 노력으로 재산을 만들고
/
또 나라 없는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찾아야
우리 자신이 살 수 있는 것이올시다"
<신한민보>, 1938년 4월 21일
(말자막)
한시대와 미주의 한인들은 머나먼 이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
조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며
광복군이 진격할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
그들의 독립 열망은 광복의 그날까지 이어져
조국 독립의 든든한 지지대가 됐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 조지 애쉬모어 피치 편 자막>
[상황]
1932년, 일본 왕의 생일 연회가 열린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 일본국가가 울려 퍼진 순간
/ 단상에
폭탄이 투척 됐다
/일제 고위관료 다수 살상
[상황]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상황]
의거를 도모했던
김구와 한인애국단원들도
일본경찰에 쫓기게 된다
[상황]
하지만 끈질긴 추적에도잡히지 않았던 그들
[인용]
'피신처를 교섭한즉,
우리를 극히 환영했다'
김구 <백범일지> 중
[상황]
그들을 도와준 이는 푸른 눈의 미국인이었다
[프로필]
조지 애쉬모어 피치 (18831979)
:미국 선교사
:한인구제회 이사
[네임수퍼]
조승연 / 작가
[말]
그는 크게 환영하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한 달간 숨겨줬다고 합니다
/ 피치 씨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도왔을까요?
[상황]
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는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설명]
(첫째 줄 왼쪽 첫 번째) 조지 애쉬모어 피치 (아들)
(둘째 줄 좌측 세 번째) 조지 필드 피치 (아버지)
[상황]
한일 강제병합 이후
중국으로 피신한 한국인들을 도왔던 피치 가족
[상황]
한인 구호 기금 모금
/(발생) 독립운동가들에게
구호 물품과 의연금 전달
[상황]
1916년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한인 자녀들을 위한 인성학교 설립
[상황]
일본, 미국 정부에필드 피치에 대한 제재 요구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인용]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어떠한 탄압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 내가 지원한 돈은 정직한 방법으로 모금되었고
이 돈은 고통 받는 한국인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총영사에게 보낸 필드 피치의 편지
[상황]
아버지를 이어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아들 애쉬모어 피치
[상황]
1932년 윤봉길 폭탄 의거 이후 쫓기던
김구와 독립투사들을 도왔다
[설명]
김철 안공근 안창호 엄항섭
[상황]
0226 #불 켜진 창문 한 컷 보고
0231 #어둠 속 차일본인 스파이에 의해은신처였던 피치의 집 노출
/ 포위망이 좁혀오자
탈출 감행한 일행들
/ 피치부부는
김구를 외국인으로 변장시켜 탈출시켰다.
/ 김구를 놓치고
현상금60만원(현재가치 200억 원)을 내건 일제.
/ 매 순간, 피치부부에게도 위험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상황]
0308 안창호 사진 추가
따로 도주하던 안창호가
프랑스 영사관 관헌에 체포돼 일본에 인계되자
[상황]
피치는 프랑스 언론사에항의편지를 보냈다
[인용]
"안창호는 합법적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정치 난민에 대한 태도는
프랑스 혁명정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
그의 아내 제랄딘 역시 저술활동을 통해
미국사회가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갖도록 호소
[상황]
피치 가족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인용]
"차가운 추위에 슬퍼하는
한국 동포를 위해 구제 사업을 경영한다.
이는 선교사인 나의 신성한 의무다."
<독립신문> 1920.02.07.
[말]
"인간은 존엄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 이 신념을 짓밟는 일본 제국주의에
피치 가문은 대를 이어 저항 했습니다
[네임수퍼]
조승연 / 작가
[말]
이렇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인류가 마땅히 지켜야할 가치를 찾아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육사 자막 수정
(상황)
1927년 10월 18일
일제 수탈의 상징
'조선은행'으로 배달된 폭탄
(인용)
공포적 대계획
현장엔 경관 외 중경상자 다수
<조선일보> 1929.12.28.
(상황)
항일활동을 하던 청년들을
대거 잡아들인 일본
(상황)
한 청년을 배후로 지목한다
(상황) 세로로 발생
이원록
(강조)
264
(상황)
(후발)그의 수인번호는
민족의 가슴에 길이 남은 이름이 된다
(강조)
('264'에서 '이육사'로 체인지)이육사
(프로필)
이육사 (19041944)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학교 1기생
시인, 신문기자
(인용)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청포도>, 이육사
(말)
시인 이육사
/그 이름이 수인번호264번에서 딴 필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제는 왜 폭파사건의 주도자로
이 시인을 지목했던 걸까요?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무장 투쟁가였습니다
(상황)
1925년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가입
(상황)
형제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이육사
(상황)
1932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난징으로 향했다
(상황)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정세와 군자금 전달했던 비밀 요원, 이육사
(상황)
체포와 투옥을 반복
평생 17번 수감
(인용)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절정>, 이육사
(상황)
민족의 비극과
저항의식을 담은 시 발표
(인용)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다"
이육사, <계절의 오행>
(인용)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와 무너진 성채의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이육사, <편복>
(상황)
잦은 고문으로 지팡이 없인
거동조차 힘든 몸
(상황)
하지만 이육사는
무기 반입을 위해
베이징으로 떠난다
(상황)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
(상황)
1944년 1월 6일
/이육사는 지하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상황)
그는 그곳에서
광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말)
일제강점기, 얼어붙은 광야에
독립의 씨앗을 뿌렸던 사람
(말)
그의 시가 유독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말)
그 시와 그의 삶이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병희 자막>
(상황)
저항 시인 이육사
(상황)
일제의 고문으로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감옥에서 사망
(상황)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여인
(말)
아무 걱정하지 말고 눈감고 곱게 가라고
쓰다듬어 주니까 그때야 비로소
/
눈을 감으면서 피고름이 달라붙더라고... 비참하죠
(네임수퍼)
故 이병희 / 독립운동가
(말)
열 번을 죽였다가 살리고, 죽였다가 살리고
그래가면서 고문을 했어
/
그러면서도 웃고...동지들 보고 고맙다고
(프로필)
이병희 (1918~2012)
: 의열단 단원
: 종연방적주식회사 파업 주도자
(네임수퍼)
김영미 / 컬링선수
(말)
이병희 여사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96년 무렵이었습니다
/
광복 50여 년 만이었죠
(네임수퍼)
팀킴/ 컬링선수팀
(말)
그녀는 반세기 동안 잊힌
그야말로 무명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상황)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일제에 잡혀가는 걸 목격했던 이병희
(네임수퍼)
故 이병희 / 독립운동가
(말)
아버지가 나 열 살 때 감옥에 갔었잖아
/
나도 어서 자라서 일본놈하고 대적하자
이거였어
(상황)
열여섯에 생계를 위해
일본인의 방직공장에 취직
(상황)
열악한 노동환경
일본인 관리의 상습적 폭언과 구타
(상황)
파업에 나선
이병희와 500여 명의 여공
(상황)
여공들의 투쟁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네임수퍼)
故 이병희 / 독립운동가
(말)
내가 제 나라 찾자고 운동하는 건, 그야 할 도리니까
국민의 도리니까 해야 한다 그거지
(상황)
이병희는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
/ (후발)
4년 6개월 수감
(말)
고춧가루 물 타서 코에다 들이붓고
(네임수퍼)
故 이병희 / 독립운동가
팔 비틀면 뼈가 다 부서지는 걸
/
그런 고문을 수없이 당하는 거지
(상황)
1940년 중국으로 망명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가입
(말)
그녀는 먼 친척인 이육사와 함께 항일투쟁을 하며
/
동지들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으로 활동했습니다
(상황)
1943년
이육사 일본 경찰에 체포
(상황)
연락책이었던
이병희를 잡기 위해 들이닥친 일경들
(상황)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단 구실로
시간을 벌었다.
(상황)
그리고 독립운동가 600명의 명부를 씹어 삼켰다.
(말)
그 서류는 붙들렸다 하면 600명이 다 총살이야
(상황)
일제는 특별한 죄목 없이
이병희에게 총살형 선고
(상항)
"이병희는 독립운동과 관계없다."
거짓 진술로 그녀를 구원한 이육사
(상황)
이육사는 그녀가 출소하고
닷새 만에 사망
(상황)
이병희는 이육사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했다
(하단)
이병희 여사 생전 영상
(상황)
1945년 독립을 맞이한 조국
/(후발)
이병희의 삶은 여전히 불안했다
(상황)
그녀에게 붙은 꼬리표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운동가'
(네임수퍼)
故 이병희 / 독립운동가
(말)
결국은 6·25 때 다 총살했잖아
/
나도 총살 당할까 봐
아이들 데리고 내가 총살당하면 되겠어?
(네임수퍼)
김영미/ 컬링선수
(말)
한마음 한뜻으로 조국을 위해 싸웠으나
이념이 다르단 이유로 잊혔던 투사들
/
그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고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나의 독립 영웅 최정숙 편 자막>
(상황자막)
1919년 3월, 한 소녀가
속치마를 꺼내 들었다
(인용자막)
왜경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면
시체라도 찾으라고 속치마에 이름 석 자를 써뒀다
(프로필자막)
최정숙 (1902~1977)
:제주도 초대 교육감
:민족교육자, 의사
(네임수퍼)
안현모/ 방송인
(말자막)
소녀가 마치 출사표처럼
속치마에 이름을 새기고 도착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장소자막)
서울 탑골공원
(말자막)
그날은 1919년 3월 1일
이곳 탑골공원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
그 중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로 이뤄진
79명의 소녀결사대도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주모자로 붙잡힌 최정숙
(상황자막)
손가락 사이에
쇠막대를 끼워 비틀기
/
거꾸로 매달려 코에 물 붓기
/
소녀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상황자막)
졸업을 하게 해줄 테니
일본 왕에게 충성하라며 석방
(상황자막)
소녀는 졸업을 거부했다
(인용자막)
나는 졸업장을 받지 않겠다.
일본 국가를 부르며 일장기에 절을 하고
일본인에게 졸업장을 받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을 거다
제남신문, 1973년 9월 24일
(말자막)
당시 그녀는 혹독한 고문으로
장이 파열된 상태였습니다
/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상황자막)
1932년 4월
전주 해성학원 부임
(발생) 민족 교육 시행
(상황자막)
예술제에서 학생들과
<따뜻한 봄바람>
<조국의 산하> 합창
(말자막)
조국을 빼앗긴 설움으로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말자막)
노래가 끝나자 최정숙은
학생들에게 불순한 노래를 가르쳐 선동했다는 이유로
/
일본군에 체포됩니다
(인용)
"내 나라에서 내 나라말로
내 나라 학생에게 노래를 가르친 것이 무슨 죄냐!"
(상황)
사상범으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된 최정숙
(상황자막)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상황자막)
1939년 37세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입학
(상황자막)
42세에 고향 제주에
병원 설립
(말자막)
당시 제주는 중국침략을 위한
일제의 군사기지였습니다
/
강제 징용된 많은 한국인들이
제주도로 끌려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병든 조선인 징용자는
군 병원 마당에 버렸던 일제
(상황자막) 무료로만 후발
자신의 병원에 그들을 입원시켜
/(후발) 무료로/ 먹이고 치료했던 최정숙
(상황자막)
부모의 유산까지 매각, 운영비를 마련했다.
(인용자막)
"다른 사람들은 학교장, 병원장, 교육감을 역임한
내가 집 한 칸도 없다면 비웃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돈 벌 기회가 없었다.
/
병원을 개원했지만 군속들을 돕다 보니
오히려 곤란을 받아야 했고,
3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아왔지만
무보수로 일해 왔기 때문에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제남신문>, 1973년 10월 8일
(말자막)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떤 이는 전선에서,
어떤 이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때
(네임수퍼)
안현모/ 방송인
(말자막)
그녀는 늘 이 땅에 남아있는
민초들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
때론 교사로, 때론 의사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해
그들을 지켰던 사람
/
열여덟 치마폭에 새겼던 그 이름
최정숙을 기억합니다
<나의 독립 영웅 – 문창범,임시정부 편 자막>
[상황]
1919년 3월 17일
거리로 뛰쳐나온
러시아 한인 2만여 명
[상황]
한 남자가 발표한독립선언서 때문이었다
[인용]
"(러시아) 조선인 사이에서 그는 대통령이라 불린다."
住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
[프로필]
문창범 (1870~1938)
:대한국민의회 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
[말]
1919년 3월 1일
한반도를 뒤흔든 독립만세운동은
/대륙과 대양을 건너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습니다
[네임수퍼]
김응수 / 배우
[말]
그는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한인들을 보호해
/일명 '한국인의 대통령'이라 불렸습니다
[상황]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
/2만여 명의 동포 앞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문창범
[인용]
"2천만 조선국민의 이름 아래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상황]
러시아 한인들
집집마다 태극기 게양
/ 문창범의 지휘로 가두시위 전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을 결집해
대한국민의회 조직
[말]
당시 국내외 곳곳엔
이런 임시 정부 성격을 가진 단체가
/무려 여덟 개나 있었습니다
[네임수퍼]
김응수 / 배우
[말]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항쟁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선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황]
1919년 4월 10일
상하이(上海)로 향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상황]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
[강조]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수립
[발췌,상황]
(발췌)'민국 림시 헌쟝'
(발생)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정
[발췌,상황]
(발췌)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쥬 공화제'
(발생)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
[인용]
"과거에 황제는 한 명이었지만,
금일은 이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
[상황]
모든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
(강조발생)대한'제국'('제국'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민국'으로 체인지)
[상황]
민주국가로서 독립을 이루기 위해
각료로 나선 독립운동가들
[상황]
문창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에 임명
[상황]
비밀행정조직망 교통국 신설
연통제 실시
[상황]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연락망 조직
체계적 군자금 모금과 정보 교환
[상황]
하나 된 정부를 필두로
외교활동 전개
[상황]
독립군 양성 및 독립전쟁 지도
[상황]
비밀결사 한인애국단 조직
일제 주요 인물 암살
[상황]
1940년
대한민국 국군의 시초가 된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1941년 12월 대일선전포고(후발)서울진격작전 준비
[네임수퍼]
김응수 / 배우
[말]
1919년 4월 11일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인해
/식민통치로 고통 받던 국민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갖게 됐고
/국민이 주인인 미래,
바로 지금을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100년 전 오늘,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최선화, 양우조 부부 1차 자막
(상황)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상황)
생과 사를 넘는
임시정부 피난 길
(상황)
한 독립운동가 부부의
아기가 태어난다
(인용)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제시라고 지었다."
제시의 일기, 1938년 7월 4일
(프로필)
최선화 (1911~2003)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요원
한국애국부인회 서무부 주임
양우조 (1897~1964)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
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말)
전장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아기가 태어납니다
(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한편 그런 삶이 있었습니다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양우조·최선화 부부
(말)
출산 보름 만에 피난길에 나서며
그들은 일기를 썼습니다
(말,인용)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말,인용)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짧은 한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인용 날짜 써야하지 않을까용?
(상황)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 철수
(상황)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장을 뚫고 전진
(인용)
"천장이 내려앉는 듯 자꾸 떨어져
나는 허리를 구부려 제시의 몸을 방어하며
폭탄 투하가 멈추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제시의 일기> 1938월 12월 5일
(말)
"먹을 것 입을 것
머무를 곳을 제쳐두고
(말)
늘 짐을 쌀 준비를 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제시의 일기> 1939년 9월 19일
(상황)
그러나 죽음은 지척이고
독립의 그 날은 요원해 보였던 그때
(상황)
아이는 희망이 됐다
(인용)
"아이는 넘어지는 걸 겁내지도 않고
넘어졌다고 낙심하지도 않는다.
우리 동포들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제시의 일기> 1939년 12월 28일
(상황)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황)
1940년 5월
흩어져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해
한국독립당 창당
(상황)
1940년 9월
일제에 대항할 군사조직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임시정부와 함께
제시 또한 단단해져 갔다
(상황)
최선화는 임시정부 아이들을 위한
한글 학교를 운영
(인용)
"아이들에게 한글과 역사, 민족혼을 심어주는
임시정부가 운영하는 임시 학교에 가겠다고
제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제시의 일기> 1944년 5월 14일
(상황)
국내로 진격,
일본군을 몰아낼 작전을 세우고 있던
한국광복군
(상황)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
일본 무조건 항복 선언
(말,인용)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제시의 일기> 1945년 8월 10일
(말, 인용)
"조국이 그리워지며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눈앞에 나타났다."
<제시의 일기> 1945년 8월 10일
(말)
독립은 전장에서 자식을 키우면서도
결코 나약해지지 않았던
(말)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말)
양우조·최선화 부부와
임시정부 요원들의 삶을 통해
(말)
그 수많은 희생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독립 영웅> 한형석 자막 수정
(상황)
1940년대 중국
(상황)
이역만리에서
일제와 투쟁했던 한국광복군
(상황)
한 광복군이 평생 간직했다
남긴 유품
(상황)
투쟁의 현장에서 불렀던
군가의 가사였다
(설명)
압록강 행진곡
노래 서문탁
(가사)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가사)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네임수퍼)
김유길
당시 광복군 제2지대원
(강조)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말)
그건 지금 보면 군가지만
(말)우리 그때 부를 때는
그건 군가가 아니고, 주술이야
(상황)
항일전쟁 최전선에서
음악으로 투쟁했던 사람
(프로필)
한형석(19101996)
음악가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예술부장
(네임수퍼)
윤상 작곡가
(말)
전장에서 어떤 이는
편지 한 통에 힘을 얻고
(말)
어떤 이는 든든한
밥 한 그릇에 위로받고
(말)
전우의 따듯한 말 한마디에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습니다
(말)
음악가 한형석, 그는 음악으로
그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황)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자란 한형석
(상황)
뛰어난 재능으로
1931년 상하이(上海) 신화예술대학 졸업
(발췌 '조국의 흙' '태극기')
(인용)
"아버지는 고향에서 가져온
조국의 흙 한 줌과 태극기 한 폭을 손에 쥐어주셨다.
(인용)
나는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산일보 <나의 인생 나의 보람>, 1977
(네임)
한형석 / 아버지 한흥교
(발췌예술구국)
(상황)
아버지를 이어
예술로 나라를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상황)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상황)
1938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조직
(상황)
훈련 환경은 열악했다
(인용)
"식사라고는 한 끼에 만두 한 개,
소금국, 무김치 한 토막이 전부였다.
영양실조에 걸린 훈련생들도 많았다.
그러나 결코 쓰러지는 사람이 없었다."
부산일보 <나의 인생 나의 보람>, 1977
(상황)
1934년 첫 작품
신혁명군가 작곡
(발췌 悠韓)
(강조)
유한
(후발)한국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다
(상황)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유한(韓悠韓)이란 가명으로
작품 활동
(말)
그는 음악으로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습니다
(상황)
1940년 중국 시안
한국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 제작
(설명)
아리랑(1940)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는
한국인 목동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
(인용)
"매일 아침 전장에 울려 퍼지는
그의 아리랑 노랫소리는 중국인들이
한인 혁명가들을 동정하도록 만들었다."
옹화도문잡지, 1947
(말)
중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일제 침략에 고통받는 한국인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말)
이런 연대 의식은 한국광복군이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상황)
1945년 한반도 탈환을 위한한미합작 훈련에 투입된 한형석
(가사)
팔도강산 울리며
태극기 펄펄 날려서
(가사)
조국 통일 찾는 날
눈앞에 멀지 않았다
조국행진곡 한형석 작곡, 신덕영 작사
(상황)
광복군들은 그의 노래를 부르며
조국으로 진격할 그 날을 꿈꿨다
(인용)
"몸은 고달팠어도 우리네 가슴속엔
조국 광복이 가까워졌다는
희망이 가득 차있었다"
부산일보 <나의 인생 나의 보람>, 1977
(말)
그의 음악은 총칼보다 강력했고
그 어떤 어버이의 품처럼 따뜻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최은희 편 자막>
(말자막)
시대에 따라 권력은 자신들의 통치 수단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진실을 은폐해왔습니다
/
하물며 일제강점기엔 어땠을까요?
(네임수퍼)
김빛이라/ 기자
(말자막)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표한
법률 1호는 신문지법이었습니다
(상황자막)
사전검열로 텅 빈 지면을 내는 일이
허다했던 당시
(상황자막)
민간신문 압수,
발매 및 배포금지
/
정간 / 폐간
(상황자막)
그럴수록 기자들은
펜을 더 날카롭게 세웠다
(프로필자막)
최은희 (1904~1984)
:일제강점기 여성 기자
:근우회 집행위원
(네임수퍼)
김빛이라/ 기자
(말자막)
최은희,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여성 기자였습니다
/
당시 그녀의 별명은
'신문계의 패왕,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말자막)
요시찰 인물인 줄 알고 형사들이 날마다
졸졸 따라다니고 그래요
(네임수퍼)
故 최은희 / 독립운동가
(말자막)
감옥에 두 번 가고
경찰서 유치장을 9번 들어갔어요
(상황자막)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 최은희
(상황자막)
학생들을 막기 위해 폐쇄한
기숙사 문을 부수고 탈출
(말자막)
그냥 덮어놓고 도끼나 식칼이나 돌멩이를 가지고
두드리니까 부서졌거든요
(네임수퍼)
故 최은희 / 독립운동가
( 말자막)
그걸 타고 넘어 나오니까
한 300명의 학생이 다 그리로 나왔어요
(상황자막)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합류한 최은희
(상황자막)
경성여고보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수감
(말자막)
학생 시절, 투쟁의 선봉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담대한 기질로 신문사에 입사한 최은희는
/
이제 기자로서
일제의 민족 탄압 야욕을 추적해갑니다
(상황자막)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승하
(상황자막)
일제는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경계
/
육·해군 7,000여 명을
서울에 집결
/
은밀한 검속에 나선다
(상황자막)
최은희는 이를 폭로한다
(다음 내용 발췌/ 자막은 아래 내용으로)
종로경찰서 총출동 백여 명 검거
관계자 90여 명 밤중까지 무릇 10여 회
전부 약 100명의 혐의자를 검거
<조선일보>, 1926년 6월 8일
(상황자막)
성난 민심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상황자막)
그것은 기자로서
그녀의 투쟁이었다
/
이 특종으로 그녀는
'신문계의 패왕'이란 별명을 얻는다
(네임수퍼)
故 최은희 / 독립운동가
(말자막)
나는 무슨 사명감을 가졌는가 하니
내 역할이 단순히 보도한다는데 그치지 않고
/
일종의 독립운동, 민족운동으로
생각하고 그랬어요
(말자막)
최은희는 식민치하에서 고통받는
국민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상황자막)
그녀의 전매특허는
'변장 탐방'
(상황자막)
아이를 업고
거지굴과 매음굴을 암행 취재
(상황자막)
식민치하의 극심한 빈곤과
인권침해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
(네임수퍼)
故 최은희 / 독립운동가
(말자막)
신문기자라는 게 일종의 직업으로 아는데
나는 일종의 한 사명이다
/
민족의 정신을 안양 시키는
내 사명이다
(말자막)
그녀는 진실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없던 식민지 시절,
끝까지 정의를 찾아 '행동한' 기자였습니다
/
모진 탄압 속에서도 오직 하나의 길을 갔던
그녀를 보며
/
언론과 기자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의 독립 영웅 – 가네코 후미코 편 자막>
[상황]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
/ 일왕 암살 기도 1차 공판
[상황]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법정에 선 여인
[인용]
"내 이름은 박문자다"
[상황]
그녀는 일본인이었다
[상황]
그 곁엔 한국인 공범자가 있었다
[프로필]
가네코 후미코 (1903~1926)
:불령사 단원
[장소]
장소 협찬 동작문화재단 사육신역사관
[말]
박문자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본명은 가네코 후미코
/ 어린 시절을 친척 집의 식모로
한국에서 보낸 가네코 후미코는
[네임수퍼]
변영주 / 영화감독
[말]
일제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에게서
멸시받고 학대당하던 자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 그런 그녀에게 1919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인용]
"조선의 만세 운동을 목격한 후
남의 일 같지 않은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
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 中
[상황]
1919년 여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
[상황]
신문 보급소에서 일하며 고학(苦學)
/인생을 바꿀시 한 편을 만나게 된다
[인용]
나는 *********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
나는 *********로소이다
<*********>, 박열
[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
/ 아나키스트였던 가네코 후미코는
/ 박열의 시에서 또 한 명의
강건한 동지를 발견했습니다
[상황]
그의 동지이자
연인이 된 가네코 후미코
[상황]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반일단체 '불령사' 조직(1923년 4월)
[상황]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불령사' 회원들에게 방화, 폭동 등 누명을 씌우려 한 일제
[인용]
'잔재의 혼란 속에서 행동을 개시한 불령선인들'
<오사카 아사히> 호외, 1923년 10월 20일
[상황]
취조 도중 동료의 배신으로
일왕 암살 계획이 발각된다
[인용]
"일왕 폭살은 나의 단독 계획이다!"
박열
/
"아니다! 나도 박열과 함께 계획했다!"
가네코 후미코
[상황]
박열은 사모관대
/가네코는 한복을 입고 법정에 섰다
[인용]
"박열 부부 사형언도"
"문자(가네코후미코)는 웃는 소리로 만세"
[인용]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 中
[상황]
그들은 끝까지 함께였다
[네임수퍼]
변영주 / 영화감독
[말]
다른 민족으로 태어났지만
꿈꾸던 세상은 같았던 그들
/가네코 후미코는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의 끝이
/죽음이라 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신념과 연대의 여정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유자명 자막
(상황)
1920년대
위협적 항일 투쟁, 연달아 발생
(상황)
일본 고위 간부, 친일파 저격
(상황)
주요기관 폭파
(상황)
과감한 작전을 전개한 비밀결사祕密結社(한자는 그림자처럼 겹쳐서 발생)
(상황)
1923년 서울, 도쿄, 만주
일제 수뇌 기관 동시 폭파 계획을 세운다
(상황)
준비한 폭탄이
수백 개에 이르렀다
(인용)
'범인은 의열단'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
(상황)
이 모든 거사는
의열단의 한 비밀 참모가 계획했다
(프로필)
유자명 (1894~1985)
: 의열단 단원
: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네임수퍼)
김영철 / 배우
(이름자막) 사진 옆에 각각 표시
김원봉 / 나석주 / 김상옥
(말)
과감한 무장투쟁으로 굵직한 업적을 남긴
의열단원들입니다
(말)
이들 뒤엔
유자명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
그는 요샛말로 하면 '의열단의 브레인'
(말)
의열단의 투쟁 방향을 정하고
구체적인 거사를 계획한 비밀참모장이었습니다
(상황)
농학자였던 유자명
1922년 의열단 가입
(상황)
1923년 신채호와 함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인용)
강도 일본이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했다.
우리는 강도 일본을 멸망시키는 것이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조선혁명선언>
(상황)
선언서 발표 1년
의열단은 대규모 단체로 성장
(인용)
150명, 그중 무장인원 80명
<조선군 사령부 보고서> 1924년 6월 1일
(말) 한자는 그림자처럼 조금 크게 해서 정의/ 맹렬히 뒤에 발생(의열입니다)
의열단은 '정의義를 위해 맹렬히烈 실행한다'는 공약 아래
(말)
폭력으로 일제를 타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말)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거사는
바로 이런 결의에서 시작됐죠
(상황)
언제든 죽음을 맞을 생각으로
늘 정장을 입었던 의열단원들
(말)
다들 이렇게 양복을 멋있게 차려입으셨네요
(네임수퍼)
김영철/ 배우
(말)
그중에서도 유자명 선생은 나비넥타이를 하셨어요
(상황)
유자명은 의열단의 투쟁 계획 수립,
단원 지도 및 선전 담당
(인용)
"김원봉이 의열단의 실천가였다면 유자명은 이론가였다"
독립운동가 김성숙
(말)
1923년 유자명은 암살과 테러 위주였던
그동안의 투쟁에서 더 나아가
(말)
일제가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만들
치명적인 공격이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상황)
1923년
서울에 36개 폭탄 반입
도쿄에 폭탄 50개 이송 준비
(상황)
서울과 도쿄, 만주의
일제 수뇌 기관 동시 폭파 계획
(상황)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발생
(상황)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상황)
혼란을 무마하려는 일제의 허위사실 유포로
6천여 명의 한인 학살
(상황)
작전에 투입된
단원 대부분도 사망, 체포된다
(상황)
대규모 거사는 실패로 끝난다
(상황)
유자명은 체제를 정비
의열 투쟁을 이어간다
(상황)
1925년 6월 베이징(北京)
밀정 김달하 암살
(상황)
1926년
서울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석주 폭탄 의거 지원
(상황)
그는 광복 직전까지
항일전쟁을 이어갔다
(말)
광복 이후 유자명은
사회주의자로 분류돼 고향 땅을 밟지 못합니다
(말)
하지만 그는 1985년 중국 후난성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중국 국적을 받지 않았습니다
(말)
그는 마지막까지 '조선인'이었습니다
(인용)
3.1운동 그해에 나라를 떠나서 60년
/
만일 남북이 민족 대단결 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
1977년 10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
<나의 독립 영웅 –윤희순 편 자막>
(상황)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상황)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발생
(상황)
거리에 격문이 붙었다
(인용)
왜놈 대장 보거라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네놈들을 잡아서 처단하고 말 것이다
(발생문 옆에 자막 발생)
왜놈 대장 보거라 / 금수들아 받아 보거라 / 경고한다 오랑캐들아
(상황)
경고장은 총 4번 이어졌다
(상황)
격문 끝에
당당히 적은 이름
(프로필)
윤희순 (1860~1935)
: 최초의 여성 의병장
: 조선독립단 단장
(말)
당대의 여성이 썼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투적인 격문을 쓴 그녀는 윤희순
(말)
사대부의 여인이었습니다
(네임수퍼)
이태란 / 배우
(말)
그녀는 국난 속에서 더 이상 여성들이
꽃과 같이 멈춰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
<안사람 의병가> 작사 윤희순
(가사)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가사)
의병 하러 나가보세
의병들을 도와주세
(상황)
<안사람 의병가>를 보급
여성들의 의병 활동 설득
(상황)
그녀의 적극적인 호소는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상황)
윤희순과 30여 명의 여성들
안사람 의병단 조직
(상황)
남성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항일전쟁에 쓰일 탄약 제조
(인용)
안사람 노소 할 것 없이 수천 명이 모여
놋쇠를 모으고 소변을 달여 화약도 만들었습니다
윤희순 자서전, <일생록>
(말)
의병들의 맹렬한 투쟁에도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말)
윤희순 일가는 당시 항일활동의 근거지,
중국 랴오닝성으로 떠납니다
(상황)
만주와 몽골에 흩어진
항일운동가들을 결집
(상황)
1920년
180여 명의 조선독립단 결성
(상황)
큰아들 유돈상과 함께
조선독립단의 수장이 된 윤희순
(상황)
백발을 휘날리며 군사훈련 참가
(상황)
사격술을 가르치며
무장투쟁 요원 양성
(상황)
조카와 며느리까지 동참
(상황)
주변에선 윤희순 일가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라고 불렀다
(말)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나갔던
윤희순의 부대는
(네임수퍼)
이태란/ 배우
(말)
1932년 만주의 중국군과 연합해
일제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상황)
그러나 실패로 끝난 작전
(상황)
다음날 일제는
일대의 주민 3천 명 보복 학살
(상황)
1935년 6월
큰아들 유돈상 일경에 체포
(상황)
고문에 시달리다
한 달 만에 사망
(상황)
인생 40년을 항일 투쟁에
바친 윤희순
(상황)
아들이 죽고 11일 만에
숨을 거둔다
(인용)
"매사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윤희순의 유언
(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말)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개나리처럼
(말)
언제나 앞장서 고난을 돌파하고자 했던 그녀의 의기는
(말)
결국, 얼어붙은 조국에 봄을 불러왔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길용 자막 최종
(상황)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상황)
선두로 달리고 있던
마라토너 손기정
(해설 육성)
"박수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손 군이 결국 먼저 들어오고 있습니다!"
(상황)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손기정
(강조)
하지만
(후발)그의 가슴에 달린 국기는 일장기였다
(엽서의 '슬푸다' 글씨 발췌)
(말)
이것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우승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입니다
(이름)
한상헌/ 아나운서
(말)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을 이뤄냈지만
/조국의 동포들과 그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슬프다'가 전부였습니다
(상황)
한국에 전해진
손기정의 우승 소식
/기사엔 감쪽같이 일장기가 사라져 있었다
(프로필)
이길용 (1899~미상)
기자
(말)
일제의 뒤통수를 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말)
당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기자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기자였습니다
(상황)
1936년 8월
(상황)
베를린 올림픽 중계를
듣고 있던 이길용
(라디오육성)
"(대일본제국의) 손 군이
결국 먼저 들어오고 있습니다!"
(상황)
그는 분노했다
(상황)
1936년 8월 24일
(상황)
일본 신문사를 통해
손기정의 우승 사진을 입수한 이길용
(인용)
"이 나라의 아들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이길용
(상황)
그는 미술 담당자에게
일장기를 지우자고 제안
(상황)
초산으로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인쇄한다
(상황)
발간 다음 날,
총독부의 검열로
해당 일간지 무기 정간
(상황)
일본 경찰
편집국 급습
(상황)
일장기 말살 사건 주동자, 이길용
동료들과 연행
(인용)
"손기정의 우승으로
조선 민중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는데
(인용)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공으로
돌리는데 분개했다." 이길용
(말)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운 건
당시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와 동료들은 기사를 작성할 때
관공서와 교육기관 등에 걸린
(말)
일장기 사진에 일부러
잉크를 떨어뜨려 지우거나
(말)
사진을 다른 사진과 겹쳐 가리는 식으로
일제에 저항해왔습니다
(상황)
이길용은 40일간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인용)
"얼마나 고문을 당하셨는지
어머니가 갈아입을 옷을 전할 때마다
선혈이 흥건한 옷을 되받아 오셨다고 했다."
아들 이태영
(상황)
1941년 창씨개명 거부
/1944년 일본군 징집 거부
(자막 세 판 들어가기가 좀 짧아서 스틸 잡고 아래 자막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강조)
그는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말)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던 시대
(이름)
한상헌 / 아나운서
(말)
그는 기자로서 목숨을 걸고
세상에 진실을 알렸습니다
(말)
그의 기사는 그 진실의 힘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이 됐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정세권 편 자막 수정>
(프로필)
유현준 / 건축가
(말)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도시공간에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말)
일제는 근대 도시 계획이라는 명분 아래
경성을 일본색이 만연한 식민도시로 개조하려 했습니다
(상황)
일본식 집을 짓기 위해
맥없이 헐렸던 경성의 한옥들
(인용)
'멸망하여 가는 경성'
조선인의 경성은 망하고
일본인의 경성은 흥하도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상황)
이때 투쟁하듯 한옥을 지은 이가 있었다
(프로필)
정세권 (1888~1965)
: 건축가
: 건양사 대표
(말)
일제 침략 이후 경성은 청계천 기준으로
한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로 양분돼 있었습니다
(설명) 청계천 기준으로 남북 CG 다른 색깔로 지도에 표시 + 자막 발생
한국인 거주지
청계천
일본인 거주지
(말)
1920년 이후 일본인이 급증하면서
조선총독부가 그 선을 넘자
(말)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일제에 맞서기 시작합니다
(상황)
1920년
주택건축업체 건양사 설립
(상황)
북촌의 땅과 건물들을 사들인 정세권
(상황)
한국인을 위한
주택 건설 사업을 시작한다
(인용)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자!"
(프로필)
유현준 / 건축가
(말)
삼청동에 보이는 한옥이 대단한 것은
/우리 전통가옥이라고 할 수 있는
'ㅁ'자형 주거를
/도시형으로 압축해서
좁은 필지 안에 집어넣었고
/그 안에 전기와 수도시설을 넣은 거죠
/그래서 이걸 만들었기 때문에
(말)
일본의 적산가옥이 이 지역을 다 침입해서
채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거죠
(상황)
익선동을 시작으로
경성 전역에 건설된 한옥촌
(인용)
집을 팝니다
<동아일보> 1930년 12월 7일
(상황)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할부로 주택을 판매했다
(말)
정세권 선생은 한옥촌 개발로 얻은 부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
동포들과 나눴습니다
(상황)
<만주동포구제회> 설립
(상황)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독립투쟁 중 만주에서 순국한 독립군 지원
(상황)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던
조선물산장려회관 건축(1931년)
(상황)
조선어학회관 건축(1935년)
(상황)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 적극 지원
(상황)
사전 발간을 목전에 둔
1942년 10월
(상황)
조선어학회 인사 33명 체포
(상황)
그들과 함께 고문당한 정세권
(상황)
1943년 6월
35,000평 토지를 일제에 강탈
(상황)
"일본식 집을 지어라!"
(인용)
"나는 한국인이다.
일본식 집은 짓지 않겠다!"
(상황)
그는 광복이 오기 전까지
집을 짓지 않았다
(말)
건축은 시대를 담는 프레임
'틀'입니다
(말)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이 무너져버린
식민지배 시대
(말)
건축으로 대한의 정체성을 세웠던 사람
정세권
(말)
그는 암울한 시대,
집으로 미래를 지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부춘화 편 자막 수정>
(상황)
1932년 1월 12일
일본인 신임 제주도지사 순방 당일
/ 행렬을 가로막은
1,000여명의 해녀들
/ 그들은 목 놓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설명)
해녀의 노래
강관순 작사
(가사)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상황)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여인
(프로필)
부춘화 (1908~1995)
: 제주도 구좌면 해녀조합회장
(말)
일평생 숨을 참아가며
뼈가 무너져 내려도
/식구들 배 곯리지 않으면 그만인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딸들이었습니다
(네임수퍼)
김영임 / 국악인
(말)
그런 해녀들이 왜 전복 캐는 갈고리와
호미를 들고 거리로 나서야 했을까요
(상황)
무분별한 잠수기 어업으로
제주 바다를 황폐화시킨 일본
(인용)
'3~4백 척의 일본 배들이
제주 바다를 고갈시키고 있다' 『속음청사』
(상황)
일본 기업과 손잡은 친일파 객주들
/ 해녀들이 채취한 수산물
헐값에 강탈
(인용)
'흉악한 객주. 해녀는 헛수고뿐'
<동아일보> 1920년 4월 22일
(상황)
일본인 제주도지사, 해녀조합 장악
/ 어린 아이나
노인에게도 조합비 수금
/ 해녀 몫은 전체 벌이 중
겨우 2할 남짓이었다
(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그때
한 해녀가 나섭니다
/ 부춘화, 그녀는 낮에는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 글은 물론 민족의식에
눈을 뜬 해녀였습니다
(상황)
1932년 1월 12일
제주 세화 오일장날
/ 일본인 신임 제주도지사의
시찰 경로를 입수한 부춘화
(상황)
빗창과 호미를 들고
순방행렬을 가로 막았다
(인용)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을 몰아내라!"
(후발)"해녀 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상황)
칼을 휘두르며 진압한 일본 경찰
(인용)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
(상황)
갖은 고문에도 끝까지
배후를 자처한 부춘화
(인용)
"모든 것은 내가 단독으로 주도했다!"
(상황)
해녀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고딕)
총 가두시위 238회
/ 연인원 17,000여명 참가
(고딕 강조)
여성이 주도한 최대 규모의 항일항쟁
'제주잠녀항쟁'
(상황)
일제는 결국
해녀의 요구에 응한다
(상황)
50세 이상 해녀와 미성년자 해녀조합비 면제 (후발)부정 중개업자 10년 동안 활동 금지
(후발)경쟁 입찰에 의한 공동판매 부활
(말)
일제는 해녀들이
맨몸으로 거대한 바다와 맞서는
(네임수퍼)
김영임 / 국악인
(말)
진정한 투사들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 바다의 노동자이자
한나라의 국민이었던 그들은
/ 그렇게 꼿꼿하게 불의에 맞서 싸웠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남자현 편 자막>
(상황자막)
1932년 9월 중국 하얼빈
(상황자막)
한 여인이 손수건을 펼쳤다
(인용자막)
무명지(無名指/ 약지)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상황자막)
혈서를 쓰기 위해 펼친
그녀의 왼손엔 손가락이 세 개뿐이었다
(네임수퍼)
송경아/ 모델
(말자막)
다시 세 번째 혈서를 쓰기 위해 나선 그녀는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대모'라고 불렸습니다
(프로필자막)
남자현 (1872~1933)
: 서로군정서 대원
(상황자막)
항일의병이었던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만주로 떠난 남자현
(상황자막)
만주 무장투쟁단체 서로군정서
최초의 여성 대원으로 활약
(상황자막)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제
/(후발)
중국 북동부지역에 '만주국' 설립
(상황자막)
1932년 국제연맹은
사태 파악을 위해 조사단 파견
(네임수퍼)
송경아/ 모델
(말자막)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
어떻게 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남자현 그녀는
/
다시 한번
피 끓는 열망을 써 내려가기로 합니다
(인용자막)
"무명지(無名指/ 약지) 잘린 손가락을 붓자루처럼 들고
겨레의 오직 한 가지 소원을 적어보려 한다."
(발췌자막)
'대한독립원(大韓獨立願)'
대한의 겨레는 독립을 원한다
(상황자막)
그녀는 잘린 손가락과 혈서를
인력거꾼에게 전달
(상황자막)
그러나 일제에 발각 /(후발, 강조) 전달 실패
(말자막)
그녀는 더욱 분연히 일어섭니다
/
조국독립을 위해 이미 세 손가락을 버린 그녀,
이제 일생을 걸기로 합니다
(상황자막)
깨끗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남자현
(상황자막)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만주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암살 계획
(상황자막)
거사 이틀 전
변장하고 무기를 운반
(상황자막)
그러나 밀정의 신고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
(네임수퍼)
송경아/ 모델
(말자막)
당시 그녀의 나이는 61세
(말자막)
노파가 일제의 고위관리를 처단하려고 한
이 사건은 일제에게는 치욕이었습니다
(상황자막)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에 수감
(상황자막)
잔혹한 고문을 견디며
곡기를 끊고 일제에 저항
(인용)
조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상황자막)
사경을 헤매던 남자현
(상황자막)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옥
(상황자막)
그녀는 눈을 감을 때까지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했다
(인용)
조선이 독립되는 날
내게 있는 돈을 정부에 보내라
(상황자막)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장에서
남자현의 독립축하금이 전달된다
(상황자막)
그녀가 눈을 감은지 13년 만이었다
(네임수퍼)
송경아/ 모델
(말자막)
두 개의 손가락만 남았던
그녀의 왼손을 생각해봅니다
/
극한의 고통 속에서
듬성듬성 잘려나간 그 손은
/
침탈당하고 빼앗겼다 끝내
두 동강 나버린 조국의 모습이 아닐까요?
/
그 처연한 손을
다시 어루만져 되돌리는 것
/
그날의 희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독립 영웅 – 오광심 편 자막>
(상황)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머물던 중국 난징
(상황)
한 여인에게 특명이 내려진다
/ '만주의 조선혁명군 지도부에 전하라'
(상황)
무려 200페이지의 문서였다
(상황)
그물망처럼 촘촘한 검문을 뚫고
1,500km를 간 여인
(상황)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여인의 손엔 문서가 없었다
(상황)
여인은 구술로
비밀문서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인용)
'일본 경찰이 첨단 기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머릿속에 간직한 보고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남편 김학규 <백파자서전> 중
(프로필)
오광심 (1910~1976)
: 한국광복군 대원
: 조선혁명군 대원
(말)
200쪽 분량의 문서를
사나흘 만에 외워서
(프로필)
황석정 /배우
(말)
일제의 검문 망을 돌파했던 여인
오광심
/대체 어떤 문서였기에
이런 작전을 펼쳤던 걸까요
(상황)
만주사변 이후
한중연합으로 200여 차례 항일전쟁
(상황)
혁혁한 공을 세운 조선혁명군
(상황)
오광심은 부부 독립군이었다
(프로필)
김학규 (1900~1967)
: 조선혁명군총사령 참모장
: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말)
조선혁명군은 오랫동안의 교전으로
인적, 물적 타격이 모두 컸습니다
/지도부는 당시 난징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상황)
전권대표로 급파된 김학규, 오광심 부부
(상황)
변장을 하고 검문을 피해 난징 도착
(상황)
하지만 난징에선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협의 중
(상황)
김학규는 서둘러 만주의 조선혁명군 본부에
보고서를 썼다
(상황)
상황을 알리고 새 지령을 받기 위해
아내를 보내기로 결정
(상황)
보고서를 휴대한 채로
검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오광심
(상황)
사나흘 만에 200페이지를 모두 외웠다
(인용)
'혹시 잊어버릴까 차 안에서
기차에서, 산에서, 길을 걸으며 매일 암송(暗誦)'
남편 김학규 <백파자서전> 중
(상황)
그녀는 외워둔 보고서를
글로 옮겨 제출했다
(인용)
'서명을 하여 보고한 바 본부에서는 대단히 만족'
남편 김학규 <백파자서전> 중
(상황)
1940년 9월. 거듭된 통합 노력 끝에
한국광복군 출범
(상황)
오광심,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자 광복군 입단
(말)
그녀는 무력으로 승부를 가르는 전장에서도
여성은 분명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필)
황석정 /배우
(말)
그 신념은 광복군 총사령부가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상황)
1940년 11월 시안으로 이동한 광복군
(상황)
제3지대 대원으로, 가장 시급한 과제인
대원 모집 활동에 나선 오광심
(상황)
안후이성에서 중국방송을 이용해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 학도병 회유
(상황)
청년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
광복군에 합류했다
(상황)
3년 동안 160여명 병사 영입
광복군 전체 실적의 50% 차지
(상황)
때론 누나, 어머니처럼
세심하게 그들을 격려하고 보살폈던 오광심
(인용)
학도병 출신의 제3지대원들은
누구나 오광심에게 '동지'란 호칭 대신
'선생'이라는 존칭을 썼다
제3지대원 김우전의 증언
(말)
당당한 지도자의 한 명으로
광복군을 지켰던 오광심
(말)
그녀는 삭막한 전장에서
여성의 힘을 보여준
/존경받는 여성 광복군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임천택 편 자막>
(상황자막)
1920년대, 태평양 건너 쿠바에서
한국의 노래가 퍼졌다
(노래제목)
<한반도가>, 안창호 작사 / 장사익 노래
(가사자막)
동해에 돌출한 나의 한반도야
/
너는 나의 조상나라이니
(상황자막)
조국의 노래를
지구 반대편 쿠바에 퍼뜨린 사람
(프로필자막)
임천택 (1903~1985)
: 민성국어학교 교장
: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서기
(말자막)
1905년, 부자가 돼 돌아오겠단 희망을 품고
(네임수퍼)
김태원/ 가수
(말자막)
한인 1,033명이 멕시코행 선박에 오릅니다
(상황자막)
선박용 밧줄의 재료인
에네켄(용설란) 농장에서 일했던 한인들
(인용자막)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들은 에네켄(용설란) 가시에 찔리고
긁혀 피가 멈출 날이 하루도 없었다
멕시코 이주민 최병덕의 증언
(상황자막)
농장 주인은 채찍질하며
한인들을 노예 취급
(발췌자막)
묵국(멕시코) 이주민의 참상
한인은 7등 노예가 되어
소나 말과 같고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차마 못 볼 지경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
(말자막)
1909년, 처절했던 4년간의 계약이 종료됩니다
(네임수퍼)
김태원/ 가수
(말자막)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못합니다
/
그사이 조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돼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1921년
노동조건이 낫다는 소문을 듣고
쿠바로 간 임천택과 한인들
(상황자막)
쿠바 일본 영사관, 일본 국적 강요
(상황자막)
한인들은 끝까지 저항
/(후발) 무無국적을 선택했다
(상황자막)
일제에 대항해 쿠바 한인회 설립
(상황자막)
1925년
임천택은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한다
(상황자막)
한국의 언어와 역사
민족정신을 교육
(상황자막)
<조선의 노래>, <한반도가> 등
한글로 필사한 노래집 발간
(상황자막)
한인들은
임천택이 엮은 조국의 노래를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다
(말자막)
그즈음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합니다
/
발신인은 '김구'
(네임수퍼)
김태원/ 가수
(말자막)
편지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이 적혀있었습니다
(상황자막)
일주일에 겨우 2~3달러를
벌었던 쿠바 한인들
(상황자막)
숟가락과 그릇까지 팔아
독립자금을 지원
(발췌자막)
독립자금 246원 5전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수석
김구 선생에게 직접 부쳤습니다
<쿠바 이민사>, 임천택
(상황자막)
1937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1,489달러를 독립자금으로 송금
(말자막)
침탈당한 조국은
그들을 돌봐줄 여력이 없었지만
(네임수퍼)
김태원/ 가수
(말자막)
임천택과 한인들은
이국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조국을 위해 썼습니다
/
일평생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나긴 유랑을 했던 그는
/
숨을 거둔 지 20년이 지나서야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당시 쿠바로 떠난 288명의 한인 중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상황자막)
그들이 조국을 떠난 지 114년
(상황자막)
오늘도 쿠바에는
그때의 아리랑 가락이 남아있다
<나의 독립 영웅 –스코필드 편 자막>
(상황)
1920년 한 외국인이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당했다
(이름자막)
사이토 마코토 / 제3대 조선총독
(인용)
"그는 교활한 음모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
(상황)
그는 순순히 떠나지 않았다
(상황)
은밀하게 무언가를 숨겨
떠난 캐나다인
(상황)
항일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
바로 거기 있었다
(프로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1889~1970)
: 캐나다 선교사
: 의학자
(말)
3.1 만세운동을 기록한 이 귀한 사진들은
바로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름자막)
김호영 / 뮤지컬 배우
(인용)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만세를 부를 줄은 몰랐다
(인용)
나는 파고다 공원, 종로, 덕수궁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이름자막)
김호영/ 뮤지컬 배우
(말)
선교사이자 의사로 한국에 온
캐나다 사람, 스코필드
(말)
독립 열망으로 가득 찬 한국인들의 만세시위에
그는 크게 감동합니다
(말)
하지만 한 달 뒤
그를 감동시켰던 그 거리는
(말)
끔찍한 학살 소식으로 뒤덮입니다
(상황)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현재 경기도 화성)
(상황)
30여 명의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 모은 일제
(상황)
출입문을 잠그고 무차별 난사
(상황)
3.1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상황)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마을 전체를 불태운 일제
(인용)
"그 이튿날 여기서 30리 밖까지
재가 날아가고 송장 탄내가 나더래요..."
생존 주민 정동례 증언
(상황)
4월 18일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간 스코필드
(상황)
마을은 처참했다
(상황)
그는 일제의 극악한 만행을
사진으로 기록
(인용)
악마같은 일본군들은 교회 건물에 불을 질렀고,
주민들을 모두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총살하였다
<제암리의 대학살>, 1919년 4월
(상황)
참상을 담은 보고서
<제암리의 대학살> 작성
(설명) A4 용지 여백은 지워주세요
제암리의 대학살 (THE MASSACRE OF CHAI AMMNI)
(상황)
외국의 동료들을 통해
해외언론에 제보한다
(상황)
세계 언론은
일제를 거세게 비난
(상황)
일제는 사태수습을 위해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해임
(이름자막)
김호영 / 뮤지컬 배우
(말)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에도
스코필드는 국내외 언론을 통해
(말)
일제의 강압과 만행을 고발합니다
(말)
그는 항상 기고문에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담았습니다
(상황)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던 스코필드
(상황)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을 돌봤다
(인용)
스코필드 박사가 우리를 방문해 약을 넣어주며
나와 내 친구들을 위로해 주었다
유관순 / 독립운동가
(인용)
진심으로 우리를 지원해준 외국인은
스코필드 박사가 유일하다
이갑성 / 민족대표 33인
(말) 한자 석호필 뒤에 흐리게 해서 크게 깔아주세요
스코필드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 (石虎弼)
(이름자막)
김호영 / 뮤지컬 배우
(말) 한자는 흐리게 해서 앞 글자에 깔아주세요, 삼행시 느낌
그는 그 이름처럼
(石)바위처럼 굳은 의지로 한국의 독립을 외쳤고
/
(虎)호랑이같이 무서운 기세로
일제에 맞섰으며
/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弼)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말)
그가 남긴 기록들은 역사의 증거로 남아
그 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상황)
일제에 추방당했던 그는
1958년 8월 한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인용)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나의 독립 영웅 안희제 편 자막>
(상황자막)
1919년 부산
(상황자막)
자본금 100만원으로 (현재가치 약 340억 원)
세워진 무역회사가 있었다
(상황자막)
그러나 회사는 늘 적자였다
(발췌자막)
전부 개인의 대부금
은행에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매일신보>, 1925년 9월 23일
(상황자막)
회사의 이름은 백산(白山)
/(후발)
창립자의 호를 딴 이름이었다
(프로필자막)
안희제 (1885~1943)
: 백산상회 설립자
: 기미육영회 조직
(네임수퍼)
김응수/ 배우
(말자막)
자본금 수백억 규모로 세운 회사가
얼마 가지 않아 적자에 허덕였다
/
도대체 경영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
경상도에서 소문난
천석지기 집안의 아들이었던 안희제
/
그는 국권침탈 직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고 돌아와 돌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상황자막) 사진 우측 아래에 작은 출처 마크가 있습니다!
곡물과 해산물을 파는 작은 상점,
백산상회를 열었던 안희제
(말자막)
그는 파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해갔습니다
/
그 이유는 1919년 세상에 드러납니다
(상황자막)
독립 만세운동 주도를 위해
(후발) 부산항을 통해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
(상황자막)
그들의 거점이 된 백산상회
(상황자막)
독립운동가들의 거처 제공
/ (후발)
전국적 봉기를 위한 자금 지원
(상황자막)
전국 곳곳의 백산상회는
만세운동을 확산하는 구심점이었다
(네임수퍼)
김응수/ 배우
(말자막)
버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은 회사에
이득이 남을 리 없었습니다
/
부채는 쌓여갔지만
그는 더 과감하게 나섭니다
(상황자막)
경남지역 부자들의
자금을 모은 안희제
(상황자막) 신문에 난 백산상회 글씨에 표시
백산상회를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확장
(상황자막)
거래로 위장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투쟁자금과 정보 전달
(인용자막)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을 안희제가 보냈다"
백범 김구의 증언
(상황자막)
1919년 11월 기미육영회 조직
인재양성에 앞장선 안희제
(상황자막)
지원을 받은 유학생 다수가
독립운동가로 활동
(상황자막)
일제는 안희제를 주시
(상황자막) 하나씩 발생
장부 검열/ 수색/ 고문으로 탄압
(인용자막)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까지 몰래 사찰하고 감시했다"
(말자막)
1928년 백산상회는 계속되는 적자와
일제의 집요한 감시로 문을 닫습니다
/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안희제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떠납니다
* 멘트 중 1933년 삭제/ 공훈록과 안희제 기념회의 만주로 떠난 시기가 다릅니다..
(상황자막)
1933년 이주 한인들을 위한
발해농장 설립
(상황자막)
발해학교를 세워
한인 2세들 민족교육
(상황자막)
1942년 체포
(상황자막)
그는 가혹한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다
(후발) 광복을 2년 남긴 날이었다
(인용자막)
"일본의 패망이 박두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네임수퍼)
김응수/ 배우
(말자막)
안희제 선생은 일평생
독립운동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
그는 모든 것을 내놓고도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진정 정의로운 자산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백용성 편 자막>
(상황자막)
2009년 사찰 보수 중
벽 속에서 발견된 보따리
(상황자막)
90년 만에 세상에 나온 태극기였다
(말자막)
일제강점기, 수많은 승려들이
법복을 입은 채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네임수퍼)
법륜 스님
(말자막)
불교계에선 두 명의 인사가
민족 대표로 앞장섰습니다
/
시인으로도 유명한 만해 한용운,
그리고 바로 이 분이었습니다
(프로필자막)
백용성 (1864~1940)
: 승려, 민족대표 33인
(상황자막)
1911년 조선총독부 건너편에
사찰 <대각사>를 세운 백용성
(상황)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회동
(상황자막)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
(상황자막)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나선 백용성
(이름 부각)
(인용자막)
"이름을 적은 순서가 곧 죽는 순서라고 생각했다"
민족대표 33인 김병조 목사의 아들 증언
(상황자막)
백용성, 현장에서 체포
1년 6개월 수감
(상황자막)
그의 뜻을 계승해
승려들 봉기
(상황자막)
일장기 위에 파란 염료를 덧칠해 만든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에 나선다
(상황자막)
일본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
(상황자막) 괄호의 지역명은 뒤에 흐린 글씨로
범어사(부산), 해인사(합천), 동화사(대구)
/ (후발)
전국 각지에서 불교계 만세운동 전개
(말자막)
백용성 조사는 불교가 식민통치를 받는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네임수퍼)
법륜스님
(상황자막)
그리고 중생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상황자막)
경남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
/(후발)
승려들의 노동 공동체 조성
(인용자막)
우리는 괭이를 들고 호미를 가지고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하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자
(네임수퍼)
법륜스님
(말자막)
불가의 무소유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사원의 경제활동을 장려한 백용성 조사
/
승려들의 농장엔 비밀이 있었습니다
(지도 CG)
화과원 군산 상해임시정부
<함양> 만주 독립군
+ (상황자막)
농장수입을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자금으로 송금
(상황자막)
독립운동가 양성
가족 생계지원
(상황자막)
독립운동의 버팀목이 됐다
(상황자막)
1911년 일제
불교 억압을 위해 사찰령 선포
(상황자막) 쾅쾅쾅 느낌
사찰 재산권 박탈
/(후발)
사원 내 집회 금지
/ (후발)
조선 총독이 주지 임명
(발췌자막)
파렴치한 마구니의 무리가
마음을 오욕에 물들이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멸한다
<건백서(建白書)>, 백용성 / 1926년 5월
(상황자막)
일제에 맞서
17년간 불경의 한글화 작업
(상황자막)
화엄경, 금강경 등
20여 종의 경전 한글 번역
(상황자막)
국민들의 정신적 광복을 도왔다
(인용자막)
"강대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주인국이 되어라"
백용성 조사 유훈
(말자막)
그는 국민으로서
일제의 불의 앞에 물러서지 않았고
/
종교인으로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 했습니다
(네임수퍼)
법륜스님
(말자막)
백용성 조사, 그는 믿음과 행동이 하나였던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향화 자막 完
(상황)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
(상황)
갑작스러운 사망에
독살설이 퍼졌다
(상황)
이때 소복 차림으로
덕수궁 앞에 나타난
스무 명의 여인들
(인용)
시위하듯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인용)
"우리는 비록 비천한 몸이로되
/ 대한의 백성 된 자로서그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
(인용)
"고종의 승하 소식에
소복과 나무 비녀 차림으로 상경"
<매일신보>, 1919년 1월 29일
(상황)
그들은 기생이었다
(프로필)
김향화 (1897미상)
수원예기조합 기생
(네임수퍼)
지숙 / 레인보우
(말)
일제가 점령한
경성 한복판에서
(말)
보란 듯이 망국의 설움을
분출했던 여인들
(말)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그래서 가장 힘없던 기생들이었습니다
(말)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들의 삶에도
처참한 치욕으로 다가왔습니다
(상황)
조선 왕조의 별궁이었던
수원 화성행궁
(상황)
주요 건물을 훼손
식민통치시설로 사용한 일제
(상황)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봉수당, 병원으로 개조
(상황)
기생들은 이곳에서
일제에게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상황)
조선의 유서 깊은 행궁을
치욕의 장소로 바꾼 일제
(말)
일제는 조선의 궁중 문화를 해체하면서
관기 제도도 함께 폐지합니다
(말)
천한 기생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상황)
1907년
관기 제도 폐지
(상황)
궁녀의 지위를 잃고
요릿집에서 기생으로 일하기 시작한 관기들
(상황)
1908년 9월
'기생 및 창기 단속령' 제정
(상황)
영업허가부터 위생검사까지
일제는 그들을 속속들이 통제한다
(상황)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분연히 일어선 기생들
(인용)
'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불온'
<매일신보>, 1919년 3월 25일
(상황)김향화는 용기를 얻는다
(말)
그 날은 일제의 관리들에게
위생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상황)
일본경찰서 건너편 검사소에 도착한 기생들
(상황)
김향화는 33인의 동료들과 함께
치마 속에 감췄던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육성)
대한 독립 만세!
(상황)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들
그 자리에서 모두 체포
(상황)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지켜본 사람들
만세 대열에 합류
(상황)
수원의 만세시위는
밤까지 이어졌다
(상황)
주모자로 지목된 김향화
징역 6개월 선고
(상황)
하지만 기생들의 독립만세 운동은
전국 각지에 들불처럼 퍼진다
(인용)
"우리는 일본 기생들과 다르다
내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한 사람,
한 여자란 말이다."
해주 기생들이 재판정에서 한 말
(말)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천대받고 차별받았지만
(말)
민족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섰던
이 땅의 민초들
(말)
일제가 간과했던
그 나약한 존재들은
(말)
하나로 뭉쳐 역사를 바꾼
거대한 힘을 이뤄냈습니다
(상황)
수원예기조합 기생 김향화
그녀는 역사의 당당한 주역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정숙 자막
(상황)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상황)
평화 시위를 하는 군중을
총칼로 학살했던 일제
(상황)
무차별 검거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감옥
(상황)
옥중 생활은
비참했다
(인용)
"두 평도 못 되는 방에
열아홉 명이나 생선 엮이듯"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심훈
(인용)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
<미국 상원 의사록> 1919년 10월 13일
(상황)
그들의 옥바라지를 자처한
여인이 있었다
(프로필)
이정숙 (18961950)
간호사
혈성단애국부인회 조직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경성지부장
(말)
일제는 3.1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했습니다
(네임수퍼)
배우 이태란
(말)
평화 시위에 나선 우리 국민들은
무참한 폭력에 피를 흘려야 했죠
(말)
1919년 여학교 졸업반으로
병원에서 간호 실습을 하고 있던 이정숙은
(말)
그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목격합니다
(상황)
간호사들과 함께
시위 현장으로 달려간 이정숙
(상황)
일제의 총칼에 짓밟혀생사를 넘나들던 부상자들
(상황)그녀는 동료들과
고통에 아우성치는 이들을 치료했다
(말)
고통받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나라를 빼앗긴 처참한 현실에 눈뜬 이정숙은
(말)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그들을
돕기로 결심합니다
(인용)
"간호부 이정숙은
만세 사건으로 입감된 자와
그 가족을 구제할 목적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 조직"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상황)
3.1운동 직후
최초의 항일여성단체
혈성단애국부인회 조직
(상황)
가난한 애국지사들에게
사식 차입
(상황)
만세운동 후 희생된
독립투사 가족들의 생계 지원
(상황)
비밀리에 100여 명의
회원을 포섭
(상황)
전국 13도에 조직망 설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확대 재조직
(인용)
"국가를 가정과 같이 사랑하자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구성원이다"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취지>
(상황)
단 2개월 만에
현재 가치 약 2억 4천만 원의
군자금 마련
(상황)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로 전달
(상황)
독립전쟁을 대비한 적십자부 설치
(후발)이정숙은 적십자부장으로 선출된다
(말)
대한애국부인회는 단지 자금을 마련해
독립운동을 보조하던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말)
결사부와 적십자부를 신설해
임시정부의 독립 전쟁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말)
이정숙이 맡은 적십자부에 소속된 간호원들은
백의의 전사로서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상황)
1919년 11월 28일
동료의 배신으로 조직원 80여명 검거
(상황)
공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발췌 및 인용 자막)
"방청석은 금시에 만원"
"굳게 다친 문 밖에 몰려 앉아
심문하는 소리를 들으려 한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9일
(상황)
이정숙 징역 2년 구형
(인용)
"이정숙은 얼어붙은 발이 덧나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고통 중"
<동아일보> 1920년 5월 26일
(상황)
그러나 출감 후 그녀는
다시 일어서 투쟁의 현장으로 갔다
(인용)
"참말 감옥은 꿈과 같은 별세상입디다
복역 중 경험을 많이 얻었으며
출옥 후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29일
(말)
국권을 빼앗기고 총칼에 짓밟히며
모두가 힘들었던 그때
(말)
그녀는 늘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말)
고통 받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치유와 희망을 주려 했습니다
(말)
바로 그런
이해와 보살핌으로
(말)
독립운동 전선은끊임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박용만 편 자막>
[상황]
1928년 베이징
[상황]
한 독립운동가가
독립군의 총에 암살됐다
[인용]
중국에서 생긴 참극(발췌)
'사살당한 박용만'(발췌+자막)
<동아일보> 1928년 10월 27일
[프로필]
박용만 (1881~1928)
: 미국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네임수퍼]
박혜진 / 아나운서
[말]
박용만. 그는 미주의 한인들에게
안창호, 이승만과 함께
/ 3대 지도자로 꼽히던 인물이었습니다
[상황]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
[상황]
해외에 세운 한국 최초의 사관학교
(후발)한인소년병학교
[상황]
10대 학생들부터
50대 노동자까지
[상황]
다양한 연령층의 생도들
[발췌]
"내 비록 늙었으나 왜놈에겐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 총알만큼 뜨겁지 않겠는가."
52세 최고령 생도 조진찬
<신한민보> 1911년 5월 17일
[말]
그는 일찍부터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1912년 하와이로 간 그는
독립전쟁을 위한 범민족적 조직을 결성합니다
[상황]
해외 한인의 준정부 격인
대한인국민회 조직
[설명]
안창호 /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박용만 /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상황]
1914년 6월
근대군사조직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상황]
창설 첫해 240여 명 지원
[강조]
그러나
[발췌, 강조]
'하와이 한인들 간에 싸움이 확산되다'
[상황]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대립
[인용, 이승만]
"박용만의 군사 투쟁은 돈키호테식 병정놀이" 이승만
[인용, 박용만]
"모든 국민은 군인이 되어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 박용만
[상황]
당파 싸움에서 밀려난 박용만은
결국 하와이를 떠난다
[말]
중국으로 간 그는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 부대들의 역량을 집결해
/ 독립전쟁을 일으킬 구상을 합니다
[네임수퍼]
박혜진 / 아나운서
[말]
그리고 독립군의 기지 개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 하와이와 중국, 러시아를 오가며 동분서주합니다
[상황]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경성으로 향했던 박용만
[상황]
그의 경로에 의심을 품은 동료
[상황]
조선 총독의 밀정으로 오인
[상황]
그를 암살한다
[상황]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박용만
[상황]
하지만 그는 암살 직전까지
중국군에 한인 학병단 지원을 요청했었다
[발췌]
"총사령관의 부대에 한인 학병단을 설치하고
일제에 대항하는 군사훈련을 받도록 합시다."
중국 국민혁명당 참모에게 보낸 편지
[상황] **편집 수정 요망
한인소년병학교 출신 졸업생들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
"비록 그는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 그와 뜻을 함께했던 사관생도들은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습니다" 보이스 오버
[네임수퍼]
박혜진 / 아나운서
[말]
/ 침략자들에 맞서
체계적인 구상과 실행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사람
/ 박용만, 그는 올곧은 신념으로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끌어나갔던 선구자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윤봉춘 편 자막>
(상황자막)
1931년 2월 경성
(상황자막)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신문의 큰무덤으로)
<큰무덤> 감독 인터뷰
(+)
(말자막)
웅덩이를 파고요
그 웅덩이에다가 앉혀놓고 목을 푹푹 땄습니다
/
그렇게 해놓고는 그냥 무덤을 크게 쌓아놓거든요
/
그거를 간도에서 뭐라고 하냐면
큰 무덤이라 합니다
(상황자막)
1920년 간도
독립군 색출을 핑계로
무차별 학살을 벌인 일제
(상황자막)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 3,700명의 주민 살해
(상황자막)
<큰 무덤>의 주연배우는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
(프로필자막)
윤봉춘 (1902~1975)
: 영화감독, 배우
(네임수퍼)
이명세/ 영화감독
(말자막)
윤봉춘 감독은 식민치하의 조선을
현실보다 더 현실같이 그려낸 영화감독이었습니다
/
나운규 감독과 함께 민족주의 영화를 제작했던 그는
독립군 출신이었습니다
(상황자막)
1920년 동창 나운규와 함께
독립군의 비밀단체 도판부 가입
(상황자막)
국내진공작전을 돕기 위해
무산령 터널 파괴를 계획
(상황자막)
1921년 윤봉춘 체포
(상황자막)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상황자막)
고문으로 한쪽 청력을 잃고
늑막염에 걸린 윤봉춘
(말자막)
고문 후유증으로
무장투쟁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
동창 나운규 감독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영화로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
(상황자막)
3.1 만세운동 당시
유관순의 활약을 다룬 영화 <유관순>
(상황자막)
생생한 고문 장면은
경험을 바탕으로 재연
故 윤봉춘 인터뷰
(+)
(말자막)
바가지에 물을 퍼서
그 물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습니다
/
숨이라도 쉬면 코에 고춧가루하고 짠 게
들어가면서 칵칵 재채기가 나고
/
눈에도 들어가고 귀에도 들어가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들어가
/
그래도 그냥 견디는 거야
(말자막)
당시 일본에 적대적인 내용의 영화는
상영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으로 제작을 통제했습니다
/
그러나 윤봉춘 감독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네임수퍼)
이명세/ 영화감독
(말자막)
그는 더 적극적으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합니다
(상황자막)
식민치하 부녀의 비극을 그린
<도생록(1938)>
(상황자막)
일제와 한국의 상황을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에 빗댄 <신개지(1942)> 등
(상황자막)
민족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서러움을 대변
/(후발)
항일정신 고취
(상황자막)
1940년 일제
조선영화령 선포
(상황자막)
한국 영화인들을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 제작에 동원
(말자막)
많은 영화인들이 친일파로 변절했지만
그는 끝까지 일제의 선전 도구가 되길 거부했습니다
(네임수퍼)
이명세/ 영화감독
(말자막)
그는 해방 이후 윤봉길,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 민족혼을 그려냈습니다
/
윤봉춘 감독의 영화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의 기록으로
대한민국 영화사에 남았습니다
故 윤봉춘 인터뷰
(+)
(말자막)
목숨이라는 건 살면 살아진단 말이에요
'먹고살기 위해서 변절을 한다'하는 거는 인간이 아니다
/
나는 영화인으로서 자부해왔고
우리 예술인들도 물론 순수 예술인도 좋지만
/
목적의식이 있는 예술인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독립 영웅> 고려독립청년당 자막
(상황)
# 0007
1944년 인도네시아
(상황)
암바라와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
(상황)
부대원들이 수송 트럭을
탈취한 사건 발생
(인용)
# 0021
군무원 3명이 경기관총 1자루, 총알 2천 발과
소총 세 자루를 가지고 탈주했다
헌병 대원 다나카 도시오 수기
(상황)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육성)
나는 일본군의 조선인 군무원이었습니다
(프로필) 종편본에 23명으로 들어가있음
고려독립청년당 (19441945)
: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 군무원 26명
(말)
대한민국을 점령한 일본은
1930년대 이후 침략 야욕을 본격화합니다
(말)
만주와 중국에 이어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고
(네임수퍼)
배우 / 박성웅
(말)
1941년엔 이를 견제하는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말)
거대한 전쟁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상황)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끌려간 한국 청년 1,408명
(상황)
연합국 포로를 감금한
5개 포로수용소 감시역 군무원 배치
(말)
포로 감시원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은 포로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네임수퍼)
배우 / 박성웅
(말)
그들은 철도, 비행장 등
부상과 사망사고가 빈번한 건설 현장에
(말)
포로들과 함께 내몰립니다
(상황)
질병과 굶주림/(후발) 일본군의 학대
열악했던 포로수용소 생활
(육성)
#0151
'너희들은 *********와 똑같다'
그런 욕을 하니까 욕에 대한 반발로
(네임수퍼)
故 이상문 / 고려독립청년당원
+
(육성)
# 0158
점호 시간에 일체 대답하지 않고
"멍멍" 개 짖는 소릴 해버렸어
(상황)
# 0205
1944년 11월 25일
'불순분자'로 분류한 한국인 200여 명
훈련소로 소집
(상황)
근접 폭탄 투척 및 육탄공격법 교육
총알받이로 사용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상황)
# 0217
훈련 마지막 밤인
1944년 12월 29일
(상황)
한국 청년들은 피로 결의한다
(인용)
# 0224
강도 일본에 주권을 침탈당한 지 30여 년,
고려독립청년당은 3천만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분연히 궐기하노라
고려독립청년당 선언문
(상황)
인도네시아 항일단체
고려독립청년당 결성
(말)
고려독립청년당 결성 일주일 후
(네임수퍼)
박성웅/ 배우
(말)
일본군은 포로와 군무원들을
싱가포르로 전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말)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세 명의
고려독립청년당 당원들은 의거를 결심합니다
(상황)
암바라와에서
일본군 수송 트럭을 탈취한 세 사람
(상황)
수용소 소장의 관사 습격
/(후발) 헌병 대장 등 일본군 12명 사살
(상황)
세 사람은 모두 자결한다
(육성)
그때의 그것이 마지막 총성이야
(네임수퍼)
故 이상문 / 고려독립청년당원
+
(육성)
# 0327
내가 들었다는 그 말이죠. 그 총소리를
(말)
살아남은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은
광복 후 일제의 포로감시원이었단 이유로
(말)
전범 용의자가 돼 수감됩니다
(네임수퍼)
故 이상문 / 고려독립청년당원
+
(육성)
꿈을 꿔요. 네가 살아있으니까 증인 아니냐
(육성)
살아남은 사람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해주시오
(상황)
이상문 선생은 1976년부터 30여 년간
16번 독립유공자 서훈을 청원
(상황)
고려독립청년당의 독립운동은
광복 63년 만인 2008년 인정받는다
(말)
일제의 총알받이로 끌려가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네임수퍼)
박성웅/ 배우
(말)
전범이라는 누명을 썼던 한국의 청년들
(말)
뒤늦게 찾은 그들의 명예를
지키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병로 자막
(신문내용 발췌/ 옆 자막)
의열단 사건 내용 발표
/
폭탄 36개 권총 5정 등 압수
/
파괴용 암살용 방화용 세 가지
(+) 하단에 떠있고 위 자막만 바뀌는 것으로
<동아일보> 호외 1923년 4월 12일
(상황)
1923년 8월
의열단원 10명이 일제의 법정에 섰다
(인용)
'폭탄을 수입하여 관공서 파괴 수단으로'
<매일신보>, 1923년 8월 12일
(상황)
수세에 몰린 그들의
대변인이 된 이가 있었다
(신문내용 발췌/ 옆 자막)
"국가 심리로 보면 죄라 하겠으나
민족 심리로 보면 죄가 아니오
만약 일본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동아일보> 1923년 8월 13일
(프로필)
김병로(1887~1964)
변호사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말)
일제의 법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범죄자였습니다
(네임수퍼)
박준영 / 변호사
(말)
일제는 정확한 물증이나 재판 없이도
(말)
그들을 구금하고 즉결심판했습니다
(말)
김병로는 그렇게 궁지에 몰린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변호사가 됐습니다
(상황)
1923년
5명의 한인 변호사와
<형사공동연구회>를 설립한 김병로
(상황)
애국지사들 무료 변론
(말)
1923년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
김상옥은 일경들과 대치 끝에
자결했지만
(말)
일제는 사건에 연관된 이들을
모조리 체포했습니다
(말)
그중엔 김상옥을 숨겨줬던 여인,
이혜수가 있었습니다
(상황)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고 수감된 이혜수
(상황)
변호를 맡은 김병로는
일제의 허를 찌를 대책 고안
(상황)
1923년 12월
들것에 실려 법정에 등장한 이혜수
(신문내용 발췌/ 옆 자막)
피고는 '병인 마차'를 타고
겨우 재판정에 와서
침상 위에 누워 신음
<동아일보> 1923년 12월 26일
(상황)
동정 여론으로 술렁인 법정
(말)
병상의 여성을 가뒀다는
비난 여론을 의식한 재판관은
(말)
이혜수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얼마 뒤 석방합니다
(네임수퍼)
박준영 / 변호사
(말)
여론을 교묘히 이용해 법정의 분위기를 몰아간
변호사 김병로가 이룬 승리였습니다
(상황)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발발
(상황)
일제, 만세운동 참여 학생들 무력진압
/ (후발) 언론 통제
(상황)
변호를 맡은 김병로에게도
함구령을 내리며 위협
(상황)
김병로는 일제의 지령을
역이용한다
(인용)
"경찰 당국으로부터 함구령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말)
'아무 말 할 수 없으니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말)
김병로의 이 한마디는 민족 감정을 고조시켜
재판에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상황)
여론이 집중된 가운데
진행된 재판
(상황)
김병로는 학생들의 무죄 주장
(인용)
"격문 내용이 과연 무엇이 불온한가
출판법도 보안법도 걸리는 것이 없으니
전부 무죄 판결을 내려 조선의 인심을 안정케 하라"
(상황)
학생 대부분 집행유예 판정
(상황)
6.10 만세 운동, 암태도 소작쟁의 등
10년간 100여 건의 항일운동 변론
(신문내용 발췌/ 옆 자막)
"이천만 조선 민족 전체가 독립사상을 가졌는데
체포하는 것은 억지로 법의 그물에 잡아넣는 것"
<조선일보> 1923년 5월 14일
(말)
짓밟힌 정의,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지만
(말)
죄인으로 매도당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말)
김병로는 조국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네임수퍼)
박준영 / 변호사
(말)
그는 법정 투쟁으로
정의를 구현한
(말)
민족의 변호인이자 대변인이었습니다
(인용)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나의 독립 영웅 –백정기 편 자막 수정>
(상황)
1946년 6월
(상황)
귀국하는 세 독립운동가를
맞이하기 위해 부산으로 간 김구
(상황)
그들은 모두
유해로 돌아왔다
(상황)
"조선 민족 불멸의 독립 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이 세분이 으뜸일 것입니다." 김구의 삼의사 추모사 中
(상황)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 대장을 처단한 윤봉길
(상황)
일왕에게폭탄을 던진 이봉창
(상황)
그리고
(프로필)
백정기 (1896~1934)
:흑색공포단원
(말)
1931년 상하이上海에서
항일 무장투쟁단체가 조직됩니다
(말)
그 이름은 흑색공포단
(네임수퍼)
박재민 / 배우
(말)
백정기는
이 단체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상황)
일제 요인 암살
(상황)
친일파 격살
(상황)
일본 영사관 등
주요 시설 폭파
(네임수퍼)
박재민 / 배우
(말)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에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이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의 독립군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말)
주중駐中(그림자) 일본공사는 일본 정부의 밀명을 받아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상황)
4천만 엔을 주고
중국 친일파를 매수한
(후발)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상황)
1933년 3월 17일
요릿집 육삼정에서 비밀회의 계획
(상황)
정보를 입수한 흑색공포단
(상황)
일본공사 암살 계획
(인용)
"나의 구국 일념은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백정기
(상황)
흑색공포단은 육삼정에 폭탄을 던져
그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말)
백정기는 밤낮없이 조직원들과
폭탄 투척 연습을 하며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상황)
1933년 3월 17일
(인용)
"죽어서 저승에서 만나자"
(상황)
거사 당일 오후 8시
상하이上海 육삼정
(상황)
일본영사와 중국 친일파의
비밀회담
(상황)
건너편 건물에 매복해있던 백정기
(상황)
거사 실행 직전
(상황)
일본경찰이 급습한다
(상황)
거사를 돕기로 했던 일본 밀정의 배신 때문이었다
(상황)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테러단'
<동아일보> 1933년 11월 11일
(상황)
기사를 통해 폭로된
비밀회담의 또다른 목적
(상황)
만주 포기를 회유하려했던 일제의 야욕에
중국인들은 분노한다
(상황)
일본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백정기, 무기징역 선고
(인용)
"나는 얼마 살지 못 할 사람이니
모든 것을 내게 떠넘기라.
/대신 그대들은 자주독립을 위해 매진하시오."
(상황)
주동자를 자처하며
젊은 동지들을 보호했던 백정기
(상황)
동지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옥고로 세상을 떠난다
(네임수퍼)
박재민 / 배우
(인용)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를 바라오."
백정기 의사 유언
(말)
그가 목숨을 걸고 투신한 의거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음모가 폭로됩니다
/중국인들의 항일 의식은
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중국에서 활동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도 도움이 됩니다
(말)
백정기, 그는 죽음으로 항일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연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심훈 편 자막(수정)>
(상황)
1932년 한 시인이
시집을 완성했다
(상황)
발표를 앞둔 그때
(고딕 강조)
'치안 방해'
/'불온한 단어 삭제'
(인용)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을 통해
민중을 동요시킬 수 있다!"
(상황)
일제는 출간을 금지한다
(프로필)
심훈 (1901~1936)
:시인, 소설가
(시, 인용)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네임수퍼)
안도현 / 시인
(말)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말)
일제강점기
이토록 생생한 언어로
/시대를 이야기한 사람
심훈
(말)
무엇이 두려웠기에 일제는
그의 시집을 출간 금지시킨 걸까요
(상황)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승하
(상황)
국장이 준비되고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
(상황)
심훈은 시를 지어 낭송했다
(시, 인용)
큰길에 넘치는 백의白衣의
물결 속에서 울음소리 일어난다
/총검이 번득이고
군병의 말굽 소리 소란한 곳에
/분격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땅에 엎디어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심훈 <통곡 속에서>
(말)
순종의 상여가
떠나는 날
(말)
심훈의 시는 그 슬픔을 분노로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상황)
서울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6.10 만세운동
(상황)
전국으로 퍼져 제2의 3.1운동으로 전개
(상황)
민족의 독립 열망을 분출했다
(말)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네임수퍼)
안도현 / 시인
(말)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작가는 새로운 활로를 찾습니다
(상황)
1928년 신문사에 입사
소설 연재 시작
(상황)
독립운동가 남녀의
사랑을 그린 <동방의 애인>
–<조선일보> 1930년 10월~12월
(상황)
독립운동가의 옥중투쟁을 통해
강렬한 항일의식을 표현 <불사조>
<조선일보> 1931년 8월~12월
(상황)
매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주목했던 독자들
(상황)
하지만 인기가 높아지면
매번 연재를 중단시킨 일제
(상황)
낙향을 결심한 심훈
(상황)
충남 당진에
집을 지었다
(설명)
필경사
(시, 인용)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시, 인용)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을 백주에 폭로하자!
심훈 <필경>
(상황)
그는 투쟁하듯
집필에 집중했다
(상황)
1935년, 소설 <상록수>
공모전 당선
(상황)
농촌계몽운동 확산에
동력이 됐다
(인용)
"주인공의 씩씩함을 배워
팔을 걷고 나설 젊은이가 수많이 있을 줄 압니다"
(상황)
그는 언제나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 인용)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 <그날이 오면>
(말)
농부가 쟁기로 묵을 땅을 갈아
비옥한 토지를 얻는 것처럼
(말)
그는 펜으로 시대의 절망을 뒤집어
새 시대를 꿈꾸게 한 투사였습니다
(말)
그도, 우리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그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규창 편 자막>
(상황)
1932년 11월
중국 다롄(大連)항에서 체포된 65세의 노인
(상황)
일제의 고문으로
나흘 만에 옥사(獄死)
(인용)
'안면에 출혈이 낭자하였고
포대에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
목격자 증언
(상황)
노인은 독립운동가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었다
(상황)
한 사내가
죽음의 배후를 찾아 나선다
(프로필)
이규창 (1913~2005)
: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
: 남화한인청년연맹
(장소자막)
국립서울현충원
서울시 동작구
(말)
이규창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6천석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군을 양성했던
/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이었습니다
(네임수퍼)
남성진 / 배우
(네임수퍼)
故 이규창 / 독립운동가
+
(말)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 했습니다
그저 속이 상해서
/
그렇다고 내가 배가 고프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거고
/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뭐를 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
아버지도 아무것도 없으시니까
(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략자에 맞서 싸웠던 아버지가
(네임수퍼)
남성진/ 배우
(말)
그 누구도 아닌 동포의 밀고로 사망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상황)
밀정을 추적한 이규창
결정적 정보 입수
(인용)
"이규서와 연충렬이 일본영사관에
'이회영이 다롄(大連)항을 경유해 만주로 간다'고 밀고"
(상황)
그는 두 사람을 찾아가
자백을 받아낸다
(인용)
"모든 사건을 왜놈에게 밀고하니
왜놈은 얼마나 쾌재를 부르짖을 것인가 치가 떨렸다"
이규창 자서전, <운명의 여진>
(상황)
1932년 12월
밀정 이규서, 연충렬 처단
(말)
일제가 매수한 밀정들은
당시 독립 전선에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네임수퍼)
남성진 / 배우
(말)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의 측근이었던 그들은
(말)
일제에 정보를 흘려 항일투쟁을 막거나
독립 전선을 분열시켰습니다
(상황)
아버지 이회영이 활동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단원이었던 이규창
(상황)
동료들과 친일파,
밀정 처단에 주력
(상황)
임시정부 출신 친일파
조상섭의 집을 습격
(상황)
독립자금 강탈
(상황)
일제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제공한
/(후발)
밀정 이용로 처단
(상황)
거사 후 그는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다
(인용)
목상에 뉜 후 손발을 묶고 면상에 물을 쏟아
기절하면 정신 차리게 한 후 반복
이규창 자서전, <운명의 여진>
(상황)
이규창 13년형 선고
(상황)
경성감옥에서 인쇄공장으로
사역(使役)을 나간 이규창
(상황)
간수의 눈을 피해
독립 염원을 담은 전단 150장 인쇄
(상황)
수감자들을 통해 감옥 전체에 배포
(인용)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일본제국의 패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
(상황)
글은 갇힌 그들을 깨어있게 했다
(상황)
2개월 뒤 발각
/(후발) 4년간 독방 수감
(상황)
그는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말)
감옥에서 풀려나자 그는
일본 경찰과 총독부 관리를 찾아가 암살합니다
(네임수퍼)
남성진/ 배우
(말)
그는 일생 끈질기게 불의에 맞선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인용)
"마지막 순간까지 변심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위대한 독립운동이다"
이규창
<나의 독립 영웅 나석주 편 자막>
[상황]
1919년 3월 황해도
[상황]
한 부호의 집에 들이닥친
권총 강도단
[상황]
그들의 태도는
이상하게 공손했다
[인용]
"저희는 독립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입니다.
저희가 나가면 권총강도에게 협박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프로필]
나석주 (1892~1926)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부 경호원
:의열단원
[발췌]
'육혈포를 가진 복면강도 6명
부호를 협박하고 6백 여원을 강탈'
<매일신보>
[네임수퍼]
김영철 / 배우
[말]
나석주, 그는 독립 자금을 내어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도행세를 하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
하지만 친일파들에겐 냉정했습니다
[상황]
무장단체 대한독립단원과 합세
평산平山 경찰 주재소 습격
[상황]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악질 친일파 은율殷栗 군수를 처단
[인용]
'나석주는 힘이 장사
체포하려던 경관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달아나'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 호외
[상황]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상황]
김구가 지휘하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에 임명
/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했던 나석주
[네임수퍼]
김영철 / 배우
[말]
그가 중국에서 임시정부 일을 돕고 있는 사이,
한반도에선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었습니다
/
111년 전, 바로 이곳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선봉에 섰죠
[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강탈하고
/
소작료를 못 낸 이들에겐
비싼 이자를 붙여 고통을 줬습니다
/
나석주 의사에게 특명이 내려집니다
[인용]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라!"
의열단 김창숙
[인용]
"평소 꿈꾸던 일입니다.
일찍이 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나석주
[상황]
1926년 12월
국내 잠입
[상황]
거사를 치르기 직전
신문사에 편지를 보낸 나석주
[발췌, 말]
"최후 힘을 진력하여 휴대물품(폭탄)을
동척회사 식산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습니다."
나석주 유서
[상황]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상황]
식민착취에 앞장선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상황]
불발不發
[상황]
망연자실할 시간이 없었다
[상황]
다음 목표인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향한 나석주
[상황]
1층에서 일본인 1명
권총으로 사살
/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도망가는
토지 개량부 간부들 사살
/
기술 과장실에
마지막 폭탄 투척
**** 피디님, 또다시 불발은 안넣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
[상황]
뒤쫓는 경찰들과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
/
일본 경찰 7명 사살
[상황]
완전히 포위되자
/
나석주는 최후의 계획을 실행한다
[인용,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네임수퍼]
김영철 / 배우
[말]
폭탄은 비록 터지지 못했지만,
/
그날의 의거는 일제의 비열한 식민통치를 뒤흔드는
민심의 거대한 폭발로 남았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종일 편 자막>
(상황자막)
1919년 2월
서울 종로의 한 인쇄소
(상황자막)
밤이면
비밀스러운 인쇄가 시작됐다
(인용자막)
2월 25일
2만 5천 매 인쇄 완료
(인용자막)
이틀 후
1만 매 추가 완료
(상황자막)
대한의 자주독립을 선포할
3.1 독립선언서였다
(프로필자막)
이종일 (1858~1925)
: 민족대표 33인
: 보성사 사장
(말자막)
무려 3만 5천 장이었습니다
(말자막)
여드레 밤을 꼬박 새워
한 장 한 장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이종일
(네임수퍼) 얼굴 보이면
류근/ 시인
(말자막)
그는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일찍부터 민족 계몽운동에 나선 지식인이었습니다
(상황자막)
1898년 8월
최초의 한글 신문
<제국신문> 창간
(인용자막) 발췌아니고 신문 위로 인용자막
한일 의정서,
결국 침략의 제 1보
<제국신문>, 1904년
(상황자막)
일제, 제국신문 무기정간 명령(1904년 10월)
(상황자막)
이종일은 여러 번 옥고를 치르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인용자막)
"기왕에 죽는 목숨이라면
살아서 나라를 되찾는 데 신명을 바치겠다"
(상황자막)
일본 귀족 작위를 내려
이종일을 회유하려 한 일제
(인용자막)
일제의 작위를 거절했다
우리 동포로서 이 같은 수치가 또 있겠는가
<묵암비망록>, 1910년 10월 20일
(상황자막)
1911년 이종일,
인쇄・출판사 <보성사> 인수
(상황자막)
<보성사> 지하 창고에
무기와 군자금을 비축
(말자막)
1919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승하하자
(말자막)
독립운동가들은 전 국민이 함께하는
만세 시위를 계획합니다
(네임수퍼)
류근/ 시인
(말자막)
같은 날, 같은 시각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선언과 함성으로 뒤흔들기 위해선
(말자막)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지로
배급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상황자막)
2월 27일
8일 만에 선언서 3만 5천 장 인쇄 완료
(상황자막)
이종일과 보성사 직원들은
선언서를 은밀하게 운반
(상황자막)
일경의 검문에 붙잡힌다
(인용자막)
"성주 이씨 족보요!"
(상황자막)
일경들은 수레의 책들을
걷어내기 시작
(상황자막)
선언서가 드러난 순간
/(후발) 두 번 깜빡일 때
정전 발생
(말자막)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집에 숨깁니다
(네임수퍼)
류근/ 시인
(상황자막)
구들장을 파서
독립선언서를 보관
(상황자막)
선언서를 운반할 독립운동가들은
색종이를 들고 그의 집을 방문
(인용자막)
"노란종이는 3천 장, 빨간 종이는 2천 장, 연녹색이 천 장
할아버지께서 '종이를 가져오면 독립선언서를 나눠줘라' 했죠."
이종일 후손 박인성
(상황자막)
일제의 눈을 피해
전국으로 퍼진 독립선언서
(인용자막) 날짜, 프롤 자막과 같은 모양
1919년 2월 28일,
준비 상태는 물론 만점이다
내일만은 실수 없이 거사에 성공해야 한다
꿈을 잘 꾸자
이종일 <묵암비망록>
(네임수퍼)
류근/ 시인
(말자막)
3월 1일, 이종일은 100여 부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민족대표들이 모인 태화관으로 갔습니다
/
그때, 전국 각지에선 그가 찍어서 보낸
독립선언서를 든 사람들이 집결지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상황자막)
독립선언서 낭독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이종일
(상황자막)
처절한 고문을 견뎠다
/(후발)
그의 나이 62세였다
(상황자막)
3년 만에 출옥.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쳐 빈곤했지만
일제의 회유에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발췌자막)
이종일 선생
영양부족으로 영원의 길을 떠나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1일
(말자막)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네임수퍼)
류근/ 시인
(말자막)
그는 굶주림 끝에 생을 마쳤습니다
/
최후의 순간까지도
민족의 대표로서 지조를 지키며
/
그 무엇에도 무릎 꿇지 않았던 이종일
/
그는 불굴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진정한 민족대표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이혜련 편 자막>
[상황]
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 편지를 썼다
[인용]
"나와 당신이 이름은 부부이나일평생 단란한 가정생활을 못 하였으니
한 집에 모여 고락을 같이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상황]
편지는 미국으로 갔다
[인용]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
[상황]
그녀는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아내였다
[프로필]
이혜련 (1884~1969)
: 안창호의 부인
: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네임수퍼]
정재순 / 배우
[말]
일제강점기, '민족의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안창호
/
그의 뒤에는 아내 이혜련이 있었습니다
[상황]
1902년, 결혼 다음 날
미국으로 떠난 부부
[상황]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며
학업을 병행했던 남편
[상황]
하지만 부부의 미국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황자막]
1910년,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만주로 떠난 남편 안창호
[상황]
미국인 가정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진 이혜련
/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 안창호에게 독립자금을 보냈다
[인용]
"돈 백 원을 전보로 부쳤는데
실수 없이 잘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속히 들어오시기만 바라나이다."
<이혜련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1년 6월 3일
[상황]
아내의 지원으로 세계를 누비며
독립운동을 이어간 안창호
[상황]
1919년, 조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의 열기가
이혜련이 있던 미국까지 전해진다
[설명 박스자막]
이혜련이 직접
태극기를 만들었던 재봉틀
[말]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든 이혜련은 동포들과 함께 거리로 나섭니다
[상황]
미국 정부와 동포들에게
대한 독립을 호소
[상황]
교포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부인친애회 조직
[발췌]
구제합시다!(신문에서 발췌해주세요)
[인용]
"우리 부모국에서는 자유를 위하여피 흘리며 원수의 손에 죽고 상하고... 가족들은 누가 구호하오리까?" <신한민보>, 1919년 7월 1일
[상황]
이혜련은 미주 한인조직을 통합
독립의연금 모금을 주도
[상황]
그녀가 모은 자금은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달된다
[네임수퍼]
정재순 / 배우
[말]
안창호는 그 정성을 동력 삼아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강조]
37년간 12개국 120여 개 도시 순회(한 단어씩 빠르게 쾅쾅쾅 발생)
/
세계 각지에 흩어진 동포들을 결집시켰다
[말]
마음 한 편에선
늘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인용]
"당신, 아이들과 같이 있지 못해마음이 때로 처참합니다.
/우리의 바라는 일에
터가 잡히는 것을 보면 위로가 되겠습니다."
<안창호가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1925년 5월 23일
[상황]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
[상황]
일본왕의 생일 연회에
폭탄이 투척된다
[상황]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일본경찰에 체포된 안창호
[상황]
가장 고통스런 순간
그는 혼자였다
[인용]
"늘그막에나 아이들을 데리고한집에 모여 고락을 같이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
당신의 손으로 지어주는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안창호가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1936년 8월 7일
[상황]
수차례 수감생활 반복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생을 마감한다
[말]
일평생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했던 부부
[네임수퍼]
정재순 / 배우
[말]
결국 한 집, 한 상에서 밥 한 끼 먹는
그 작은 소원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
하지만 이혜련 그녀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인용]
"당신은 우리 아이들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아버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상덕 자막
(상황)
1949년 1월 서울
(상황)
몇 명의 남자가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의뢰한다
(상황)
그들은 경찰이었다
(상황)
암살 대상은
한 독립운동가였다
(프로필)
김상덕(1892~1956)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화부장
반민족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네임수퍼)
배우 윤주상
(말)
왜 경찰이 테러리스트를 매수해서까지
그를 죽이려 했던 걸까요?
(말)
독립운동가 김상덕은
광복 후 3년 만에 조직된
(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습니다
(상황)
1949년 1월 6일
친일청산을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
(상황)
전국 곳곳에
친일 반민족행위자 제보함 설치
(상황)
국민들의 울분으로 가득 찼다
(인용)
'갓 쓴 영감이 의분 상경
반민자를 고발'
(발췌된 헤드라인 옆에 강조체로 발생)
'민족의 열망 일제 앞잡이에 엄한 형벌'
(상황)
반민특위 활동 사흘 만에
친일재벌 박흥식 체포
(상황)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변절한 최린 체포
(상황)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변절
창씨개명, 학병 지원을 권장했던 이광수
(인용)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매일신보> 창씨와 나 1940년 2월 20일
(이광수 사진에 도장찍히듯이)
체포
(말)
처음부터 나라를 판 자도,
변절을 한 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말)
그들은 민족의 심판대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인용)
"난 나라를 위해서 했다.
혹독한 일본 경찰보다
내가 나은 것 같아서
이게 무슨 죄가 되느냐"
친일 고등계 형사 김태석
(인용)
"반민법은 온 국민을 그물로 얽어매는 법
그렇다면 온 국민이 친일파다!"
일제 밀정 이종형
(상황)
김상덕은 이들을 단죄해야
진정한 광복이 온다고 생각했다
(발췌된 헤드라인 옆에 강조체로 세로로 발생)
"민족을 판 자 누구냐?"
(인용)
"일제의 아부자들은 제압을 당해야하고
응당 벌을 받아야 옳다!"
반민특위 개식사 <자유신문> 1949년 1월 6일
(상황)
경찰과 군대,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강조)
총 688명
검거 및 조사
(말)
당시 반민특위는 그 어떤 외압 없이
조사와 처벌을 할 수 있도록
(말)
산하에 특별검찰부와 경찰부,
재판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말)
위기감을 느낀 군과 경찰,
정부의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해체를 시도합니다
(상황)
친일경찰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암살 계획
(상황)
1949년 6월 6일
(상황)
친일경찰 긴급 체포를 빌미로
반민특위 습격
(상황)
친일 행적 서류 탈취
반민특위 직원 구타 체포
(상황)
반민특위 특별경찰대
강제 해산
(상황)
1949년 7월 6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 국회 통과
/반민족행위 공소시효 2개월 후로 대폭 축소
(상황)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의원들
공산당으로 몰려 체포
(상황)
반민특위는 결국 해체된다
(상황)
친일경찰 노덕술 무죄
(상황)
친일문학가 이광수 불기소
(상황)
반민특위로 처벌받은 친일파
단 14명 뿐
(상황)
1950년 봄
그마저도 모두 풀려났다
(말)
바로 이곳이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말)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죠
(상황)
반민특위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2018년도 호텔이 건설되면서 철거됐다
(말)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역사의 굴레로 남아
(말)
우리의 더 아픈 미래가
될지 모릅니다
<나의 독립 영웅 유일한 편 자막>
[상황]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상황]
1945년 미국
일본 공격 작전 「냅코 프로젝트」 추진
[상황]
목숨 걸고 한반도 침투를 준비한비밀 요원들
[발췌+강조고딕
"암호명 A"
"열성적인 애국자"
[상황]
암호명 A
(후발) 그는 한국인이었다
[프로필]
유일한 (1895~1971)
: 미 육군전략처(OSS) 한국 담당 고문
: 유한양행 초대 회장
[네임수퍼]
박호산 / 배우
[말]
1945년 미군과 연합한 한반도 수복 작전에서
암호명 A라 불렸던 특수공작원, 유일한
/
그가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져
/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
그는 사업가였습니다
[상황]
어린 나이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苦學 을 한 유일한
[상황]
식품 가공회사를 차려
큰 성공을 거둔다
[말]
사업차 중국을 방문한 길에
잠시 고국에 들른 그는
[네임수퍼]
박호산 / 배우
[말]
20여년만의 귀향길에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상황]
식민지배 속 극도로 열악했던 보건・의료 환경
[기사인용]
'각종 전염병 유행
환자 60명 중 10여 명 사망'
<동아일보>, 1927년 11월 3일
[기사인용]
'일종의 빈민병
완전한 치료방법도 없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13일
[상황]
제약시장은
일본자본에 잠식돼있었다
[상단]
당시 일본 기업들이 했던 과장 광고
[발췌]
'지금 곧 낫는 치통약'
/
'먹기만 하면 낫는 류마티스'
/
'사람을 젊어지게 하는 약'
[상황]
사업 정리 후
전 재산으로 의약품을 구입해
귀국한 유일한
[상황]
1926년 서울에
제약회사 창립
[상황]
의약품 자체 개발
[상황]
약품에 구체적인
질환과 효능 명시
/
'폐결핵, 일반 허약자
임산부 빈혈에 효능'
[말]
하나의 민족운동으로 시작한
그의 제약 사업은 일제의 견제 속에서도
/
일본 제약회사를 제치고
당대 최고의 제약회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그는 그렇게 얻은 부를
결코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황]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일한
[상황]
재미 한인군사 조직
맹호군 창설 (1942년)
[상황]
한반도수복을 위한
한미연합작전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상황]
암호명 A,
특수 공작원으로 직접 참여
[상황]
그의 나이 50세였다
[인용]
"유일한은 한국인을 위한 한국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미 정보국 OSS 기밀문서
[상황]
비밀작전 실행을 앞두고 찾아온 광복
[상황]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조국의 미래에 투자한다
[말]
유일한 생전 육성인터뷰
한국에 와서 보니까
제일 불쌍한 것이 한국 청년들이에요
/
유일한 생전 육성인터뷰
왜인가하니 머리가 좋아도 비용이 많이 들어
고등학교를 못가는 사람도 많고요
[상황]
개인 소유주식을 처분
유한공업고등학교 건립
[상황]
학비 및 기숙사 숙식비 무료
[상황]
그는 마지막까지 가난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떠났다
[네임수퍼]
박호산 / 배우
[말]
조국을 위해 뜨겁게 싸운 독립투사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앞장서 실천한 경영인, 유일한
/
그는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연미당 편 자막>
(상황)
1927년 3월 20일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황)
결혼식이 열렸다
(상황)
하객은 애국지사들
(+)
(얼굴 아래 이름자막) 너무 지저분하면 삭제
이동녕 / 좌측 남자어린이 옆
김구 / 결혼한 두사람 사이에
안창호 / 김구 오른쪽 남자
이시영 / 오른쪽 맨 끝 남자
(상황)
신랑과 신부는 독립운동가였다
(프로필)
엄항섭 (1898~1962)
: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장
(프로필)
연미당 (1908~1981)
: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
: 한국독립당 당원
(말)
화사한 꽃 대신 커다란 태극기를 걸고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말)
신랑은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보좌하던 엄항섭
(네임수퍼)
염혜란 / 배우
(말)
신부는 독립운동가의 딸로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던 연미당이었습니다
(말)
이들의 결혼생활은
임시정부의 투쟁사와 그 궤를 같이했습니다
(상황)
1931년 엄항섭,
무장결사 한인애국단 가입
(상황) 뒤에 사진들 나올 때까지 계속 떠있고
김구와 함께
일제 주요 요인 암살 계획
(이름자막)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 일왕
(이름자막)
시라카와 요시노리 /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상황)
거사에 쓰일
특수 물품을 제작한 연미당
(상황)
폭탄의 점화선은 살리고
몸체는 가리는 보자기였다
(상황)
보자기로 싼 폭탄을 들고
훙커우(虹口) 공원으로 향한 이는 윤봉길
(상황)
일제의 상하이사변 승전기념 행사
단상을 향해 폭탄 투척
(상황)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요인 2명 사망
다수의 일본군 중상
(상황)
일제는 상하이 한인들을
무차별 체포
(상황)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폭파의 배후가 임시정부라는 성명문 작성
(상황)
1932년 5월 10일 각국 언론을 통해
거사직전 윤봉길의 사진과 함께 일제히 보도
(말)
성명서가 발표되자 비난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죄 없이 체포한 한인 대부분을 석방합니다
(네임수퍼)
염혜란 / 배우
(말)
그리고 더욱 집요하게
임시정부 요인 검거에 나섭니다
(상황)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27년간 7번 청사를 옮긴 임시정부
(상황)
4,000km를 이동하며
주석 김구를 보호한 두 사람
(상황)
연미당은 임시정부의 살림과
요인들의 건강을 챙겼다
(상황)
폐결핵을 앓던 이동녕
/(후발) 총격으로 부상당한 김구를 돌본 그녀
(상황)
부부는 서로보다 동료가 먼저였다
(상황)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한 임시정부
(상황)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부부는 모두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참여
(상황)
엄항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약상 선전,
독립자금 모금
(상황)
연미당은 공연단을 꾸려
항일전선의 독립군 독려
(상황)
중국 방송을 이용,
일본군에 끌려온 한국 청년들에게
광복군 합류를 권유했다
(상황)
1945년 8월 15일 광복
(상황)
1950년 5월 27일
엄항섭과 연미당은
마침내 혼인신고를 한다
(상황)
결혼 23년 만이었다.
(상황)
한 달 뒤, 6.25 전쟁 발발
(상황)
전쟁 중 납북된 엄항섭
/(후발) 1962년 사망
(상황)
연미당은 오랫동안 남편을 기다렸다.
(네임수퍼)
염혜란 / 배우
(말)
그 험난한 투쟁을 하면서도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은
(말)
광복된 조국에서 예기치 못하게 헤어져
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말)
조국의 독립과 자신들의 행복을 맞바꾼 부부
엄항섭, 연미당
(말)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볼 때입니다
<나의 독립 영웅> 박재혁 자막
(상황)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상황)
중국 고서(古書)상이라는 한 남자가
하시모토 서장을 찾아왔다
(인용)
"서장님이 보면 깜짝 놀랄만한 고서가 있소"
(상황)
책을 하나씩 꺼내자
드러난 폭탄
(상황)
하시모토와 그의 거리는
겨우 2척에 불과했다
(프로필)
박재혁 (18951921)
의열단원
(네임수퍼)
배우 / 송창의
(말)
그와 하시모토 서장의
거리는 두 척,
(말)
기껏해야 60cm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말)
목숨을 내놓고 적장과 대담하게
독대한 호기로운 청년
(말)
그는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단원이었습니다
(상황)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 13인의 한국인 청년
<의열단> 결성
(상황)
일제에 대항할
강력하고 조직적인 무장투쟁 결의
(인용)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
/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신명(身命)을 희생한다'
(상황)
제1차 계획은 수탈의 중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폭파
(상황)
상하이(上海)에서 국내로
폭탄 반입 계획
(상황)
계획 발각
/
폭탄 압수
(상황)
사건에 개입한 의열단원
20여명 전원 검거
(말)
창단 이후 첫 번째 거사에서
20명의 단원들이 검거된 난감한 상황
(말)
부산 경찰은
단원들을 간악하게 고문하고
(말)
밀정을 매수해
거사를 무산시켰습니다
(말)
단장 김원봉은
특단을 내립니다
(상황)
싱가포르에서 무역상을 하던
신입 단원 박재혁에게 전보를 친 김원봉
(인용)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죽이되 그냥 죽일 것이 아니라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밝히시오"
김원봉
(상황)
고서(古書)상으로 위장하고
폭탄을 숨겨 국내로 잠입한 박재혁
(상황)
이동 도중 동지들에게 편지를 부쳤다
(인용)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가 뜻대로 잘되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의 염려 덕택인가 합니다'
(말)
얼핏 상인의 편지처럼 위장했지만
그것은 동지들에게 남기는
최후의 한마디였습니다
(인용)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하고
하시모토 서장을 독대한 박재혁
(인용)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폭탄투척 직전 박재혁
(인용)
'부산경찰서 폭탄 소동'
'선혈이 낭자하여 마루바닥을 붉게 물들여 매우 처참했다'
<부산일보> 호외 1920년 9월 14일
(상황)
하시모토 서장은
병원으로 호송 중 사망
(상황)
중상을 입은 박재혁
혹독한 고문에도 단독거사였음을 주장
(인용)
'사형언도'
<독립신문> 1921년 4월 9일
(상황)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날,
그는 단식 끝에 사망한다
(말)
박재혁의 의거는
의열단이 성공한 첫 번째 거사였습니다
(말)
이후 의열단은 주요 기관 폭파,
요인 암살 등을 성공시키며
(말)
일제에 위력적인 무장투쟁을
이어갑니다
(말)
그의 거사는 강력한 항일무장결사가
출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경고였습니다
(인용)
'파괴·흉폭 행위를 실제화시키는 자는 오직 의열단뿐'
<고등경찰요사>
<나의 독립 영웅 –장도빈 김숙자 편 자막>
(상황)
1912년 10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상황)
한 남자가
집요하게 땅을 팠다
(상황)
마침내 드러난 거대한 돌
(후발)1,000년 전 발해 시대 유적이었다
(인용)
"지금 잠시 일제의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우리에겐 고구려와 발해의 영광이 있다"
(상황)
1919년 3월 1일 서울
(상황)
한 여학생은
전교생의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상황)
그것은 일제에 보내는
민족자존의 선언이었다
(상황)
1920년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프로필)
장도빈 (1888~1963)
:역사학자
:교육자
(프로필)
김숙자 (1894~1979)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원
(말)
식민통치는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심한 모멸감을 안겨줬습니다
(말)
장도빈, 김숙자
두 사람은 민족의 존엄을 세우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연히 투쟁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네임수퍼)
바다/ 가수
(상황)
대한매일신보 논설 기자였던 장도빈
(정보)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강조고딕쾅쾅 박히는 효과)
일제 침략 비판
(후발)민족의식 고취
/날카로운 논설로 일제에 맞섰다
(인용)
"국민 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장도빈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18일
(상황)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 탄압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로 명칭 변경
(상황)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
(상황)
장도빈은
또 다른 투쟁을 결심한다
(상황)
1912년 10월
러시아로 망명
(상황)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 유적 발굴 시작
(상황)
발해시대 사찰의 주춧돌 발견
(상황)
실증에 근거해
<국사國史> 발행
(상황)
우리 민족이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렀던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임을 강조
(말)
그는 외세의 수많은 침략을 끝내 이겨내고
대륙까지 호령했던 선조들의 역사가
(네임수퍼)
바다 / 가수
(말)
식민통치로 고통 받는 당시의 국민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상황)
고구려 시조 주몽 일대기를 쓴
<동명왕실기>
(상황)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당위를 담은 <발해태조>
(상황)
1937년까지
총 30여권의 역사서를 간행
(상황)
민족의 저력 증명,
국난극복 의지를 고취시켰다
(말)
고독한 투쟁에
한결같은 벗이 되어준 이는 아내였습니다
(네임수퍼)
바다 / 가수
(말)
얼굴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상황)
3.1 만세운동 이후
대한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있던 김숙자
(상황)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1만 명 부인들의 독립호소문과 연명서 작성
(상황)
비밀리에 회원들과
군자금 모금을 주도
(발췌+인용)
'여자 정치범 검거' (신문에서 발췌)
/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
(상황)
(상황)
당시 그녀는
임신 7개월이었다
(상황)
임산부를 발로 걷어차며
고문했던 친일경찰
(상황)
그녀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상황)
남편 또한
일제의 위협에도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상황)
광복 이후 그가 남긴 책들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기초가 됐다
(인용)
"역사교육은 애국심을 함양함으로써
민족, 민주 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말)
그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는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말)
'대한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
(네임수퍼)
바다 / 가수
<나의 독립 영웅 한징 편 자막>
(상황자막)
1930년대
한 잡지에 이색적인 광고가 실렸다
(발췌자막)
방언 수집
잡지 <한글>, 1935년 10월호
(손글씨 자막)
니 얼굴보난 호모리 더 먹어야될키야
제주도 사투리
(손글씨 자막)
느그 어미 몸은 괘안나?
경상도 사투리
(손글씨 자막)
꾀병이랑게, 아버지 암시롱도 아니여
전라도 사투리
(상황자막)
전국에서 5,000여 명 사투리 제보
(상황자막)
각 지역의 사투리를
표준말로 옮겨내던 이가 있었다
(프로필자막)
한징 (1886~1944)
: 한글학자
: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
(말자막)
각 지역의 사투리를 모은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우리 언어를 지켜나갔던 한글학자들의 모임
/
조선어학회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말자막)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며
우리의 말과 글을 탄압하던 그때
(네임수퍼)
타이거JK/ 가수
(말자막)
그들은 우리 언어를 지킬 전 국민적 계획을 추진합니다
(상황자막)
1929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 108명
우리말 사전편찬 결정
(상황자막)
신문사 편집 기자였던 한징
사전 편찬위원으로 합류
(상황자막)
표준어 제정에 큰 역할을 한다
(인용자막)
"한징씨 집안이 서울에 오래 살아 정확한 발음을 안다
발음과 한자어 주석에 공적이 크다"
조선어학회 동지 이중화
(말자막)
조선어학회에서 표준어를 발표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엔 표준 언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네임수퍼)
타이거JK/ 가수
(말자막)
그들은 500년간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말을 기준으로
6,231개의 표준어를 발표하고
/
본격적인 우리말 수집에 나섭니다
(상황자막)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해
사전에 수록하기로 한 조선어학회
(상황자막)
조사 항목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시골말 캐기 잡책> 편찬
(상황자막)
전국 14개 학교, 500여 명의 학생들을 동원
사투리 수집
(상황자막)
기관지 <한글>에 광고를 실어 전국민의 동참 유도
/
(발췌)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각 지방 방언을 수집
이것을 장차 정리하여 사전어휘로 수용할 예정입니다
(상황자막)
지역의 말을 적극적으로 보내온
전국의 독자들
(발췌자막)
"백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힘 있는 데까지 적어드리려 합니다"
길주 성진 지방의 방언 투고자, 김여진
(상황자막)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민족의 말 모으기에 동참했다
(말자막)
형체가 없던 말은 글로 옮겨져
점차 민족정신을 모으는 구심점으로 위력을 갖춰갔습니다
/
그 힘이 커질수록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감당해야 할 압박은 커져갔습니다
(상황자막)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매일 드나들며 감시한 일본 형사들
(상황자막)
회원들은
발각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
(상황자막)
한징은 밤이면
인쇄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
(상황자막)
가난했지만, 사명감으로 이겨냈다
(인용자막)
"말과 글은 민족정신이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상황자막)
회원들의 노력으로 모인
약 3만 2천매의 원고와 20만 장의 어휘카드
(상황자막)
그것은 민족정신의 총합이었다
(상황자막)
사전편찬을 앞둔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 33인 체포
(상황자막)
한징은 잔혹한 고문을 견디며
일제에 저항
(인용자막)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네임수퍼)
타이거JK/ 가수
(말자막)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식민지배를 받고도
자국의 언어를 온전히 보전한 나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습니다
/
그들이 완성해낸 <큰 사전>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민족정신을 담아 지킨 귀중한 큰 그릇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저보성 편 자막>
(상황)
1932년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
(상황)
일본 왕의 생일 연회에
폭탄이 투척 된다
(상황)
폭탄을 던진 사람은 윤봉길
(상황)
의거를 계획한 이는 김구였다
(상황)
현상금 60만원(현재가치 약 200억 원)을 내건 일제
(상황)
절체절명의 순간
한 중국인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프로필)
저보성 (1873~1948)
:중국 국민정부 비상국회 부의장
:상하이 항일구원회장
(말)
김구에게 엄청난 현상금이 걸리자
밀정들은 사냥개처럼 그의 주변에 득실댔습니다
(네임수퍼)
김형석 / 작곡가
(말)
일촉즉발의 상황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저보성이라는 이름의 중국인이었습니다
(상황)
윤봉길의 거사 직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추적하던 일제
(상황)
김구는 외국인으로 변장
추격을 따돌리고 상하이 탈출
(상황)
저보성은 자싱嘉興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처 마련
(정보)
김구 은신처
자싱嘉興, 메이완지에梅灣街 76호
(정보 – 왼쪽 끝에 서있는 남자** )
진동손저보성의 수양아들
(상황)
자신의 수양아들 집에
김구를 숨겼다
(상황)
김구 체포를 위해
밀정 300여 명을 포섭한 일제
(상황)
전방위적 수색
(상황)
기습에 대비해
미리 집을 개조했던 저보성
(상황)
2층 마루를 들어 올리면
1층으로 통하는 비상탈출구
(상황)
언제든 배를 타고 탈출 가능했다
(인용)
"(신변이) 불안하다고 느껴질 때는
남호라는 호수의 배 안에 은신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동료 정정화 <장강일기 中>
(상황)
귀가할 땐 표식으로
안전 여부 확인
(상황)
흰색 옷감은 '안전'
(후발)검은 적삼은 '위험'
(상황)
저보성은 치밀하게 김구를 보호했다
(말)
저보성의 배려로
김구는 은신처와 항저우를 은밀하게 오가며
/임시정부의 일을 처리했습니다
(네임수퍼)
김형석 / 작곡가
(말)
그의 행방이 묘연할수록
일제는 집요하게 그를 추적했습니다
(상황)
수색 반경을 넓혀은신처 인근까지 포위망을 좁혀온 일제
(상황)
위기를 느낀 저보성은
며느리를 동원
(정보 – 오른쪽 앞줄 앉은 여자)
주가예저보성의 첫째 며느리
(상황)
사돈의 별장으로 김구를 안내
(상황)
그녀는 목숨을 걸고
김구를 돌봤다
(인용)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김구 <백범일지>
(네임수퍼)
김형석 / 작곡가
(말)
중국인이었던 그는 왜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도왔던 걸까요?
(상황)
1932년
일제 상하이 점령
(상황)
대륙의 자존심은 짓밟힌다
(상황)
그때 상하이에서 열린일본 왕의 생일 연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윤봉길
(상황)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했다"
중국 국민당 주석 장개석
(상황)
항일을 한·중 공동 목표라 자각한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
(상황)
장개석은 당 간부 저보성에게
특명을 내린다
(인용)
'김구를 보호하라'
(상황)
중국 국민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교역할을 했던 저보성
(상황)
임시정부는 중국과
본격적인 항일연합전선 구축
(상황)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함께 싸웠다
(상황)
중국의 항일단체 동북의용군 회장이었던 저보성
/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
(상황)
충칭에 안착한 김구는
광복까지 무사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말)
그로 인해 우리는 위기 속에서도
민족의 지도자를 잃지 않았고
(네임수퍼)
김형석 / 작곡가
(말)
일제의 서슬 퍼런 추적과 감시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나의독립영웅> 김동삼 자막
(상황)
1914년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
(상황)
비밀 농장이 있었다
(인용)
'(백두산 서쪽) 소배차라는 곳에 무관학교의 분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원병상의 수기
(상황)
밤이 되면 농부들은
독립군이 되었다
(프로필)
김동삼 (18781937)
백서농장 장주庄主
서로군정서 참모장
(말)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이곳은
(말)
독립군 최초의 군영이었습니다
(말)
이 비밀스러운 농장의
농장주였던 김동삼
(말)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상황)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김동삼
/
졸업생 385명을 이끌고 백두산에 백서농장 건립
(상황)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와
항일전쟁을 위한 훈련을 이어갔다
(말)
당시 만주와 연해주 곳곳에선
무장독립운동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말)
김동삼은 힘을 모으기 위해
백서농장과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규합해
(말)
서로군정서군으로 재편합니다
(설명)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상황)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강조)
지역별 통합 독립군 출범
(상황)
만주 독립군의 기세가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
(상황)
1920년 대대적인 토벌 작전 개시
(상황)
1920년 10월 21일
북로군정서가 머물던 청산리
/일본군과 전면전 발발
(강조)
독립군 2,500여명 vs 일본군 25,000여명
(상황)
김동삼은 서로군정서군
300여명을 이끌고 지원
(강조)
6일간의 전투 결과
/
일본군 사상자 1,600여명
(상황)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말)
한국 독립전쟁 사상
가장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말)
일제는 만주의 한국인 3,700여명을
무차별 학살하며 잔혹한 보복전을 벌입니다
(말)
김동삼의 가족은
핵심 표적이었습니다
(상황)
친동생을 비롯한
김동삼의 일가친척 일본군에 참수
(인용)
"총검으로 전신을 난자당한 주검을 수습하니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다" 김동삼의 가족 증언
(말)
아우의 비참한 죽음에도
김동삼은 애통해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말)
그는 참변 도중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모으기 위해 나섭니다
(상황)
1922년 민족 단일의 독립군
대한통의부 출범
(상황)
김동삼은 만주의 독립군을 국내로 침투시켜
일본 경찰을 기습한다
(인용)
'대한통의부의 실력이 강대해져
독립단 중 제1위'
일본 외무성 기록
(상황)
1931년 일제, 중국 침략
만주사변 발발
(상황)
김동삼, 한중연합군 결성 추진 중 체포
(상황)
잔학하게 고문하며
관련자 명단을 요구한 일제
(인용)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죽는다감옥에서 죽는 것도 과분하다"
(상황)
그는 죽는 날까지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않았다
(말)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민족의 저력을 믿었고
(말)
그 힘을 모아 일어섰던
독립군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인용)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김동삼의 옥중 유언
<나의 독립 영웅> 이태준
(상황)
1922년
헝가리의 한 폭탄 기술자가
베이징(北京)에 갔다
(인용)
"김원봉이라는 이를 찾고 있소"
(상황)
그가 찾던 이는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장 김원봉
(상황)
그를 보낸 이는
몽골에서 활동하던 한 의사였다
(프로필)
이태준 (18831921)
: 의사
: 한인사회당, 의열단
(말)
'한 의사가 의열단장에게 폭탄 기술자를 보냈다...'
(말)
첩보 영화 속 한 장면 같은데요
(네임수퍼)
태인호/ 배우
(말)
몽골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의사 이태준
그는 평범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상황)
1914년
몽골로 간 이태준
(상황)
의학교 시절부터 교류하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비밀군사학교 설립 계획
(상황)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무산
(상황)
그는 몽골에 병원을 연다
(말)
당시 몽골에선
전염병이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말)
근대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국민의 70%가 늘 감염에 시달렸죠
(말)
황제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용)
"몽골 울란바토르(庫倫) 국왕은 중병에 걸려서
러시아 의사에 진찰을 받아도 도저히 회복할 희망이 없다"
<권업신문> 1914년 6월 28일
(상황)
몽골의 전염병을 전멸시킨 이태준
(상황)
몽골 황제 보그드(Bogd) 칸의
어의(御醫)로 임명
(상황)
1919년 7월 27일
몽골 국가 훈장 수상
(인용)
"우리의 보그드(Bogd) 칸은 당신을 칭송하고 격려
고려 국적민 의사 리다인(이태준)"
(말)
몽골에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그는 늘 조국을 생각했습니다
(네임수퍼)
태인호/ 배우
(말)
이태준은 의사로 일하며 번 돈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에게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인용)
"상하이(上海) 우리 정부에서 보낸 특사 한형권에게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이태준. 독립운동가 김규식에게 보낸 편지 중
(상황)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특사 김규식에게 중국 화폐 2천원(현재가치 약 2억 8천만 원) 지원
(상황)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활동기지였다
(상황)
동의의국(同義醫局)
=>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
(지도 CG)
몽골을 중심으로 연해주, 중국 장가구, 상해 임시정부 이어주는
(상황)
중국에 있던
비밀기지와 긴밀하게 연락
(상황)
해외 독립운동을 잇는 거점 역할
(말)
조직의 항쟁을 주로 뒤에서 지원해왔던 그는
1920년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상황)
러시아 혁명정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40만 루블(현재 약 510억 원) 가치의 금괴 지원
(상황)
비밀연락원으로 일부 금괴의
운반책임을 맡은 이태준
(상황)
1차로 약 47kg(현재 약100억원 가치)의
금괴를 분산 운반
(상황)
장자커우(張家口)에서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까지 (약 2400km)
(상황)
러시아 반혁명군과
일제의 감시를 뚫고 금괴 전달
(말)
상하이에서 이태준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납니다
(말)
당시 의열단은 입수한 폭탄의 질이 좋지 않아
무장투쟁에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말)
이태준은 김원봉에게 믿을만한
폭탄 기술자를 소개해줄 것을 약속합니다
(상황)
김원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몽골로 돌아간 이태준
(상황)
일제와 결탁한
러시아 반혁명파 부대에 체포
(상황)
잔인하게 처형당한다
(상황)
얼마 후,
김원봉을 찾아온 한 헝가리 청년
(상황)
이태준이 생전 약속한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
(상황)
그가 만든 폭탄으로
의열단, 종로경찰서 폭파에 성공
(말)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약속은 지켰습니다
(말)
일평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독립의 초석이 되고자 했던 사람
(말)
그는 헌신적인 진료로
한국의 위상을 세운 의사이자
(네임수퍼)
태인호/ 배우
(말)
조국에 신의를 지킨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의 독립 영웅 김지섭 편 자막>
(상황자막)
1923년 9월
관동(關東)대지진 발생
(상황자막)
일제는 혼란한 민심을 잠재우려
간교한 소문을 퍼뜨린다
(발췌자막)
강도, 능욕, 방화
조선인의 폭동이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23년 9월 10일
(상황자막)
분노한 일본인들
죽창, 일본도 등으로 한국인 6600여명 무차별 학살
(인용자막)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隅田川)과 아라카와강(荒川)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인용자막)
"수천 우리 동포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원수를 보복하기 위해 동경으로 간다"
(프로필자막)
김지섭 (1884~1928)
: 의열단원
(네임수퍼)
류수영/ 배우
(말자막)
대대적인 복수극을 결심한 그는
당시 중국에 지휘부를 두고 있던
/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단원
김지섭이었습니다
/
그가 노린 건
몇 달 뒤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였습니다
/
그곳엔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 등 일제의 수뇌부가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상황자막)
1923년 12월 20일
(상황자막)
석탄 운반선에 잠복
(후발) 일본으로 향한 김지섭
(상황자막)
의열단이 지원한
폭탄 세 개를 숨겼다
(상황자막)
그러나
/
보름 만에 상황 돌변
(상황자막)
일본 제국의회 중단
(말자막)
하지만 동포들의 한을 안은 채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네임수퍼)
류수영/ 배우
(말자막)
그는 일본 열도를 뒤집어놓을 계획을 세웁니다
(인용자막)
"5천만 일본인이
'신의 거처'라고 하는 궁성을 파괴 하겠다"
(상황자막)
왕궁 입구와 연결된
이중교(二重橋)로 향한 김지섭
(상황자막)
다리를 향해 첫 번째 폭탄을 던졌다
(상황자막)
불발
(상황자막)
일제히 달려든 근위병들을 뚫고
폭탄 두 개 추가 투척
/(후발)
끝내 터지지 않았다
(네임수퍼)
류수영/ 배우
(말자막)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김지섭의 의거는 일제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
'조선인이 일본의 궁에 침입해
신과 같은 존재인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
/
그 사실만으로도
일본 열도는 요동쳤습니다
(상황자막)
경시총감, 경무부장 등
일본 경찰 수뇌부 줄줄이 파면
(상황자막)
1924년 9월 16일 공판
(상황자막)
그는 재판장에게 당당하게 진술
(인용자막)
"우리 조선 민중은 굶어 죽고 맞아 죽는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 것은 넘치는 영광이다
(인용자막)
아주 죽여주든지 무죄로 하라"
(말자막)
일제는 김지섭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합니다
(네임수퍼)
류수영/ 배우
(말자막)
그에게 고문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거사에 실패하고도 살아있다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인용자막)
'십 년 동안 꾸민 일이 하룻밤에 헛되었도다
훗날 내가 한 일을 거울삼아 그대는 공을 이루라'
김지섭의 옥중 시 <실패입옥>
(상황자막)
1928년 2월 20일
그는 수용소에서
돌연 숨을 거둔다
/
그의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네임수퍼)
류수영/ 배우
(말자막)
그의 항쟁 이후
일본의 왕을 노린 의거가 잇따라 발생합니다
/
김지섭, 그의 의거는
한국침략의 죗값을 일본의 왕에게 직접 물으려 한
/
사상 최초의 투쟁으로,
일제에 강력한 경고가 됐습니다
(인용자막)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절대로 요구하며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김지섭. 공판 中
<나의 독립 영웅> 김진우 자막
(상황)
1926년 조선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
(상황)
심사위원들을 매료시킨
한 점의 서예
(한지 위에 발생/ 예서체 느낌)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
(상황)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 같고,
수많은 집의 호걸은 하루살이 같다
<삼몽사(三夢舍)>, 임진왜란 승병장 서산대사의 시
(상황)
일제와 친일파를 비하한 시에
상을 줄 수 없었던 심사위원들
(상황)
작가가 서예와 함께 출품한
묵죽화(墨竹畫)에 특선을 수여
(상황)
그는 붓을 든 투사였다
(프로필)
김진우 (18831950)
: 서예가, 서화가
: 상하이 임시정부 강원도 대표
(말)
일제의 부역자들을 향해
이토록 강렬한 경고를 보낸 이는
(말)
당대 최고의 서화가 김진우
(네임수퍼)
이재성 / 아나운서
(말)
그는 23년간 항일투쟁에 청춘을 바친
의병 출신이었습니다
(상황)
연해주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귀국한 김진우
(상황)
1917년 서울 종로,
작은 서화상을 차린다
(상황)
옛 서예가의 작품집을 보고
서화를 독학
(상황)
항일정신을 새긴 자신만의
사군자를 완성해나갔다
(인용)
죽간이 창처럼 곧고 댓잎은 칼처럼 삼엄
일제를 향한 저항 의식의 표출
(말)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진우는 한 쌍의 묵난화를 그린 후
(말)
'4252년 초여름'이라고 적습니다
(그림 발췌 후 옆 자막)
4252년
(말)
단군기원의 연호를 적은 것이죠
(말)
마치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출사표처럼
그림을 완성한 그는
(말)
서화상을 접고 상하이(上海)로 떠납니다
(상황)
임시정부 요인으로 총칼 대신 붓을 쥐고
독립 의지를 담아 작품 활동
(상황)
그림은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이 됐다
(인용)
임시정부에서 대(竹)를 그려
중국 사람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댔다
독립운동가 이종률
(상황)
1921년
국내 잠입 중 일경에 체포
(말)
김진우는 알몸으로 두들겨 맞다
기절하기를 반복하면서도
(말)
서화가로서 중국을 여행한 게 전부라며
끝까지 어떤 정보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상황)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 일제
징역 3년 선고
(상황)
옥에 가둬도
그의 붓을 꺾을 순 없었다
(인용)
감옥에서 왕골과 짚으로 붓을 만들어
맹물로 마룻바닥에 한없이 죽 치는 연습을 했다
(상황)
1923년 5월 출옥
(상황)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서화가로 본격적 활동
(상황)
칼날처럼 날카로운
대나무 그림을 출품
(상황)
조선총독부 기관지조차
그의 그림을 호평
(인용)
"김진우씨의 <추죽(秋竹>)이 이목을 끌고 있다
여름 바람이 새로운 잎을 굳세게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번뇌가 불타오른 것"
(상황)
전국의 부호와 지식층으로부터
기증금 쇄도
(상황)
김진우는 그 돈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상황)
1932년 일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목록에서
사군자 제외
(상황)汚名 한자는 흐리게 뒤쪽으로 발생
창씨개명까지 강요하자
김진우는 작품에 오명汚名을 새길 수 없다며 절필한다.
(상황)
마지막 묵죽화는
칼날을 세운 듯 삼엄한 모습이었다
(말)
칼날처럼 붓을 세워
일제에 맞섰던 화가 김진우
(네임수퍼)
이재성 / 아나운서
(말)
그의 작품들은 전쟁을 겪으며
안타깝게도 대부분 소실됐지만
(말)
그가 목숨을 걸고 그려낸 민족정신만은
늘 푸르른 대나무처럼 굳건하게 기억돼야 할 것입니다
<나의 독립 영웅 장덕준 편 자막>
(상황자막)
1920년 10월
만주 지린성(吉林省) 청산리
(상황자막)
독립군, 일본군에 대승
(상황자막)
일제, 보복으로
만주 한인 약 3,700명 학살
(상황자막)
이 참상을 알리기 위해
나선 이가 있었다
(프로필자막)
장덕준 1892~1920(?)
: 동아일보 논설위원
: 특파 기자
(장소자막)
신문 박물관 / 서울시 종로구
(말자막)
장덕준은 3.1 독립운동의 성과로 세워진
한 민족 계열 신문사의 창간인이자
(네임수퍼)
정준희/ 언론학자
(말자막)
뜨거운 피를 가진 기자였습니다
/
민족을 대변하겠다며 나선 그는
시작부터 거침이 없었습니다
(상황자막)
1919년, 범국민적 평화 시위
3.1만세운동 발발
(발췌자막) /
"천박한 망동"
<요미우리신문>, 1919년 3월 12일
"악랄한 야심교(천도교), 선동자는 미 선교사"
<일본 국민신문>, 1919년 3월 7일
(상황자막)
장덕준, 일본 언론을 정면 비판
(발췌자막)
'조선소동의 근본 원인은
참정권, 언어,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한 데 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
(발췌자막)
'일본인은 조선의 정신과 독립사상을
추호도 타격할 수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9일
(말자막)
장덕준 기자는 일제의 통치자가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네임수퍼)
정준희/ 언론학자
(말자막)
상당히 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른 언론이나 신문에도 영향을 미쳐서
/
일제 통치의 부당성에 대해서 항거하는 목소리가
/
더욱 강하게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자막)
식민지배의 실상을 보도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취재
(상황자막)
일본인에게 차별, 학대당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르포
(상황자막)
<삼민생(三民生)> 기고
(발췌자막)
'신사를 건축하기 위해 가옥을 파괴'
<동아일보 '삼민생(三民生)'>, 1920년 6월 7일
(발췌자막)
'노상에서 행인의 신체를 수색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함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삼민생(三民生)'>, 1920년 6월 16일
(상황자막)
그는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현장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네임수퍼)
정준희/ 언론학자
(말자막)
그는 진실의 힘으로
나락에 빠진 국가의 운명을 바꾸려 했습니다
(상황자막)
1920년 8월 중국을 방문,
순방 차 들른 미국 의원단을 만난 장덕준
/
일제의 부당 침략 폭로
독립 지지 호소
(상황자막)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서울 도착
/
사설로 이를 알린 장덕준
(상황자막)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 현실을 호소했다
(인용자막)
"이곳에서 보고 들은 조선 민중의 행동을 무심히 넘길 수 없을 것
적지 않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말자막)
일제는 지속적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 행위를
부정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신문을 정간시킵니다
(네임수퍼)
정준희/ 언론학자
(말자막)
마치 무장해제 당한 군인처럼 무력했던 그때,
만주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상황자막)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일제, 만주의 한국인 수천 명 학살
(상황자막)
정간 중임에도
홀로 만주로 떠난 장덕준
(인용자막)
"어찌 보도기관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하루를 살아도 정의를 위해 살다 죽어야 한다"
(상황자막)
11월 6일 룽징(龍井) 도착
그는 신문사에 끔찍한 참상을 전한다
(인용자막)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냐?' 고
쫓아와 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
(상황자막)
그리고 4일 후
그는 행방불명된다
(발췌자막)
"이른 아침,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답니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30일
(말자막)
언론과 지식인의 변명은 늘 구차합니다
/
총칼로 탄압하는데 무조건 저항하는 게 능사냐고 했습니다
(네임수퍼)
정준희/ 언론학자
(말자막)
그랬던 이들 대부분은 오히려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 대가를 챙겼습니다
/
기자 장덕준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
거짓에 맞서 발로 뛰어 진실을 발굴했고
궤변에 맞서 참된 논변을 펼쳤습니다
/
그는 가장 참담했던 시절,
언론 본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한
/
진정한 기자였습니다
(상황자막)
장덕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국 언론인이었다
<나의 독립 영웅> 이효정 자막
(상황)
1930년대
일본 자본에 잠식당한 서울
(상황)
여성들은
참혹한 노동환경에 내몰렸다
(인용)
'5시 기상, 13시간의 노동을 매일 거듭'
<동아일보> 1933.9.8.
(강조)
500여 명의 여공
(후발)한 여성을 따라 총파업에 나선다
(프로필)
이효정(19132010)
: 경성 트로이카 파업위원회 위원
: 항일 운동가
(말)
노동권은 물론 인권마저도
무참히 짓밟히던 일제강점기 여공들은
/
대부분 10대 소녀들이었습니다
/
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선 이효정은
/
10대 시절 3.1운동 이후
가장 거대한 항일항쟁이었던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이었습니다
(상황)
1929년
광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간
학생 항일시위
(상황)
거대한 독립 열망은 서울을 뒤흔든다.
(육성)
"동덕여고보가 안국동 네거리에서
(만세운동)하는 거 다 들려요 공부시간에도"
/"공부가 되나요. 흥분이 되고..."
(상황)
전교생 항일 운동을 주도한 이효정
(강조)
출석 거부
(강조)
시험 거부
(강조)
백지동맹 주도
(상황)
결국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이효정
(상황)
모진 고문에 시달린다
(상황)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새로운 항일운동을 이어간다
(말)
그녀는 항일운동을 함께 하던
옛 동지들을 통해
/
학교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
일본 기업에 착취당하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참상을 접하게 됩니다
(상황)
일본인 관리자의
상습적인 폭언과 구타, 차별
/
여공들은 만연한 임금체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돼 있었다
(말)
그녀는 세 명씩 무리를 지어
조직원을 모으는 노동운동단체
/
경성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듭니다
(육성)
"우리 노동자하고 농민들이
너무 착취를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노동운동)을 했죠"
(상황)
여공들에게 노동 평등과
노동자 권리에 대해 교육했던 이효정
(인용)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획득'
(후발)'하루 7시간, 주 40시간 노동제 쟁취'
(후발)'노동자에 대한 일체의 속박 거부'
(상황)
1933년 9월 21일
여공 500여 명과 종연방적 총 파업 주도
(인용, 발췌)
'이효정' '대활약'
(상황)
한 달 후
일본 경찰에 체포
(육성)
"때리는 거야 뭐 말할(것도 없죠).
경찰서에 갔다하면 맞아야 해요"
(상황)
출옥 후에도
노조와 경성트로이카 사이
비밀 연락 담당
(상황)
1935년 9월 27일
일제의 집중 감시에 발각
(상황)
주동자 명단을 요구하며
잔혹하게 고문한 일제
(상황)
하지만 그녀는 13개월 동안
/
끝내 동지의 이름을 팔지 않았다
(말)
그 모진 고문을 이기고 살아
끝내 독립을 맞이했지만
/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낙인 때문에
/
광복 60여 년이 지나서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2006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은 이효정
(육성)
"꿈같죠."
/
"자고 나도 꿈같고,
또 자고나도 꿈같고…"
(말)
하지만 일평생,
뜨거웠던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말, 인용)
<일흔에서 여든을 살면서>
故 이효정 시집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
이 세상 어디에라도
꼭 쓰일 데가 있다면
/
주저 없이 바치리라
<나의 독립 영웅 – 황학수/ 배선두 편 자막>
(장소)
독립기념관
(말)
그때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네임수퍼)
배선두 / 한국광복군
(말)
다만 죽더라도 내 나라를 위해서
의미 있게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싸웠습니다
(말)
나는 광복군이었습니다
(상황)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
한국광복군 창설
(상황)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이를 주도한 이가 있었다.
(프로필)
황학수 (1877~1953)
:한국광복군 총사령 대리
:대한제국 육군 부위
(말)
황학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으로 활동한 유일한 군인입니다
(상황)
일제에 굴욕적인 강제 해산을 당한 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해온 황학수
(상황)
광복군 총사령으로
신병들의 정신교육과 군사훈련 담당
(인용)
포고문
'대한 독립을 남을 의뢰하지 안코 우리의 힘으로 완셩'
<신한민보> 1940년 6월 20일
(상황)
당시 일제는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집
(상황)
중일 전쟁에 총알받이로 투입했다
(말)
내가 있던 게 히노키 사단이라고
거기 우리 한국 아이들이 한 100명인가 있었을 거라
(네임수퍼)
배선두 / 한국광복군
(상황)
황학수는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침투
(상황)
강제 징집돼 끌려온 한인 병사들 회유
(말)
지금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고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고
(네임수퍼)
배선두 / 한국광복군
(말)
그거는 참말로 천지에
듣도 보도 못한 소리거든
(말)
어떻게 해서라도 내빼서
(임시정부로) 가야 되겠다
(상황)
한국 청년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
광복군을 찾아갔다
(상황)
1940년, 30여 명으로 출범한 광복군
1945년에는 700명까지 급증
(말)
임시정부라고 하는 데 가니
문 앞에는 중국 경찰 한 대여섯이 서 있고
(말)
제일 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거 보고는 '아,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말)
참 임시정부라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서글프고 기가 막히더구먼
(네임수퍼)
배선두 / 한국광복군
(말)
먹는 거를 옳게 먹을 수가 있나
두루마기 입은 것도 전부 보면
/기워 넣은 거 그런 걸 입고 다니고
(말)
아, 이 영감들이 이런 참 고생을 하는구나
(상황)
1945년 임시정부는
최후의 작전을 수립
(상황)
미군과 연합, 총력을 다해
국내 진공을 준비한다
(상황)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 무조건 항복
(상황)
그토록 고대하던 광복이 왔다
(말)
임시정부가 눈물바다가 됐어
(말)
국내 침투하려고 훈련 다 받아서
다 해놨는데 일찍 손을 들어버리니 허탈했다니까
(상황)
황학수는 1945년 12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발생)
그의 나이 69세,
일생을 바쳐 되찾은 나라였다.
(말)
후세들이 그때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세월도 이겨냈으니
(네임수퍼)
배선두 / 한국광복군
(말)
그 무엇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