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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추모 엽서 세트
자료형태 우편 시대/연도 1980년대 / 1987년
규격 가로10.5cm×세로15.0 cm / 15.8cm×11.6cm
한줄설명 6·10대회 전 날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엽서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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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제작한 그림엽서 5매와 봉투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최병수, 그대가는가/ 홍황기, 일어나는 산/ 한솔, 분단조국 4379/ 최병수,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한솔 등이 인쇄되어 있다. 뒷면에는 작가와 작품 제목이 적혀있고, 우측하단에 고 이한열 추모사업회 글씨와 솜씨공방의 마크가 찍혀있다. 봉투 앞면에는 이한열 열사 장례식 사진이, 봉투 뒷면에는 고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 기획·제작 솜씨공방이 적혀있다. 솜씨공방은 민중미술을 생활예술로 보급하기 위해 두렁의 이준호가 설립한 공방이다.


이 자료는 기증자의 부군(당시 연세대학교 86학번 재학)이 소장한 것으로, 서랍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던 자료를 발견해 19876월 항쟁 등 민주화운동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된 시민항쟁이다. 1985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 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19874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호원조치를 발표하였다. 5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정권차원에서 은폐·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야당과 재야, 종교계들이 힘을 모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였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6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10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1987년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은 1987610일 개최 예정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198769‘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후 시위에 참여했다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다 75일 사망하였다. 당시 세브란스 병실을 학우들이 조를 짜서 지키며 만일의 경찰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고, 198779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운구행렬이 지나는 동안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모였다.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사건은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켰고 6월 민주항쟁을 확산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78월에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모여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었고, 이 엽서세트는 그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886월에는 이한열추모사업회로 명칭을 바꿨고, 2010년에는 사단법인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출범하기도 하였다. 200669일에는 이한열기념관을 설립하여 그의 유품과 6월 민주항쟁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3 : 서울의 봄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 돌베개. 2010

서중석 외, 6월민주항쟁: 전개와 의의한울아카데미. 201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http://archives.kdemo.or.kr

이한열기념사업회 http://www.leememorial.or.kr

6월항쟁 공식 홈페이지 https://www.610.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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