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금고 (旭 金庫)와 절미통(節米桶)
현금 사용이 현저히 줄고 카드나 휴대전화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한 간편결제 등의 지불 방식이 일상화된 오늘날에는 월급이든 사업소득이든 은행계좌로 입금되는 것이 일순위이고 여차하여 현금이 생기더라도 일단 계좌에 넣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현금 없는 버스’가 정착된 것은 물론이고 붕어빵도 현금 없이 계좌 이체로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은행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의미의 금융기관이 도입된 것이 개항 이후, 실제 우리 국민들이 유의미하게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 이후였다. 불과 반세기 전 사람들, 오늘날 70대 이상의 국민들은 은행 거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돈을 모아본 경험이 있다는 말인데, 은행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근대적 의미의 금융기관이 생기기 전 사람들은 돈 또는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자원이 생기면 누군가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곳에, 찾을 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도록 잘 보관해야 했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금고를 사용하였다. 잠금장치도 있고 금고 자체의 장식적 효과로 부를 자랑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숨기는 것보다 소문내는 게 자산을 보호하는 데 더 효과적이기도 했다.
초록색의 육중한 철제 금고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금고 제작사 아사히에서 출시한 것이다. 3중 쌍닫이문형태로 실제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며 밑면에 바퀴가 달려 있다. 앞면에는 금고에 보통 있는 손잡이·다이얼식 잠금장치·열쇠 구멍 등이 있다. 다이얼식 잠금장치에는 일본어 가타카나(カタカナ)가 양각되어 있다.
첫 문을 열면 중간 문의 오른쪽 문에 열쇠 구멍과 덮개가 있고, 내부는 목재 서랍과 문이 있는 3단 수납함이 있다. 금고의 두께를 보더라도 일반적인 물품을 숨겼다고 보이진 않는다. 이 금고는 제일은행의 전신이었던 조선저축은행의 행원이었던 조부의 금고를 박재희 씨가 기증하였다. 금고가 있던 가정집이 흔하지 않던 시절 기증자의 집안에서는 이 금고에 부동산 문서나 여러 귀중품을 보관했다.
화폐만이 아닌 다른 재화도 자산으로서 보관하였다. 쌀이 남아도는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쌀을 절약하기 위해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낸 쌀을 담아 보관하던 절미통이 쌀을 절약하던 시대의 자료이다. 몸체와 뚜껑으로 이뤄진 목재 직육면체의 절미통은 모서리 한 곳과 바닥면의 네 모서리 부분에 판이 덧대어져 있다. ‘띄끌 모아 태산’ ‘절미상(節米想, 쌀 아낌을 생각한다)’ 등의 각종 절약 문구가 씌어진 절미통은 종이 통장조차 사용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모든 금융 거래가 가능해진 요즘 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3-2016 기증자료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목돈의 꿈: 재테크로 본 한국현대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