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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연해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 100년의 걸음을 따라가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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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연해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영상 – 100년의 걸음을 따라가다


이명주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 학예연구사

올해 2019년 대학생 근현대사 탐방 경연대회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념해서 ‘100년의 걸음을 따라가다’라는 주제로 특별히 학생들과 함께 해외탐방으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1.

주진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거기서 활동하셨던 분들이 왜 거기까지 가야 했을까, 어떤 사람들이 갔을까, 거기서 그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그런 것을 이번에 블라디보스토크 답사를 통해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책으로, 이성으로만 느끼지 말고, 가슴으로 한번 느끼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요. 여러분 삶 속에서 역사가 함께 살아 숨 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해인학림 팀 / 김성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연해주라는 지역이 현재는 러시아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와는 어떻게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하였습니다.


돌아봄 팀 / 김희연(연세대학교 사학과): 아무래도 독립운동 자체가 연해주에서도 상당히 많이 일어났었는데 그런 점에 비해서 거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개인으로 여행 갔을 때는 갈 수 없는 부분, 갈 수 없는 장소들을 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삼삼오오 팀 / 신원이(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저희끼리 나름대로, 어떻게 고려인들의 정서를 느낄 것인지 그분들이 독립 운동했던 그 정신들을 어떻게 또 가서 느낄 수 있을 것인지 나름대로 이야기도 많이 했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발자국 팀 / 이규현(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저희가 실제 현장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직접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나 역사에 관해서 체험할 수 있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탐방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행일치 팀 / 백승주(경희대학교 행정학과): 내가 그 당시에 살았으면 나는 이랬을 수 있을까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춘래불사춘 팀 / 양수영(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요즘 한국 사람들한테는 관광지로 많이 놀러 가는 추세인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가는 건 우리 역사를 배우고, 그리고 또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한 목적이기도 해서 이후에 갈 사람들을 위해서 저희가 발자취를 잘 남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2.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으로 현재는 시내의 중심이가이다. 항일언론기관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사, 민족학교의 계동학교, 권업회와 성명회가 조직되었던 곳이다.


권현준(현지가이드): 이 비석은 강제 이주 전에 이쪽에서 살고 계셨던, 개척리에 살고 계셨던 분들을 1864년도부터 2014년도까지 1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놓은 기념비입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1864년을 첫 이주로 생각해요. 그게 갑자년이에요. 그래서 갑자도강이에요. 갑자년에 강을 건너서 이 지역에 왔다. 무슨 강을 건넜겠어요? 두만강을 건너온 거죠. 두만강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 아주 가까운 지역인 지신허 라고 하는 곳에다가, 첫 번째 이주민들이 열 몇 가구가 넘어왔다고요? 열세 가구가 넘어왔어요. 열세 가구가 넘어와서 이주의 역사가 시작이 됐고 그것을 기려서 2014년도가 150주년이 되는 거죠. 이 지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사셨는데 이 지역만이 아니라 저 뒤에 보시면 뭐 돌아가고 있죠. 저기도 마을이 또 있었어요. 저건 정말 바다에 붙어있는 마을이에요, 딱 바다에. 항구가 확장이 돼요. 항구가 확장되니까 쫓아내야 돼요. 그래서 1911년도에 쫓아내가지고 어디로 보냈다고요? 신한촌으로 보낸 거죠. 여기는 바닷가고 산동네로 보낸 거죠.
여기에 신문사가 2개 있었어요.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 이 해조신문을 만든 분, 해조신문의 물적인 토대를 낸 분이 최재형과 쌍두마차인 최봉준이에요.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에서 두 군데가 핵심인데,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라는 곳 크라스키노. 두 군데가 핵심이에요. 최재형은 연추 쪽에서 핵심이에요. 여기의 핵심은 최봉준이에요. 해조신문사가 1년 정도 하다가 없어지고 대동공보가 2,3년 정도 있었는데 거기서 뭘 논의했다고요?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논의하고 먼저 안중근에게 정보도 주고, 안중근을 보내자고 모의했던 곳이 또 이 지역 대동공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위치였는지는 지금 규정이 되어있지 않아요. 그런 아주 중요한 곳이 되겠죠.
권업회라는 것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권업회. 권업회는 동네마다 쉽게 말하면 한인 교민회 같은 거예요.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정치적인 의견도 표출하고 실업도 장려하고 새로 이민 오면 이민 온 사람들에게 어느 가게가 목이 좋다더라 어느 부동산이 좋다더라 이렇게 소개도 하는 권업회가 만들어져요. 권업회가 이 지역에서는 핵심적인 교민 보호단체예요. 권업. 이름은 권업, 권장한다 실업을, 장사를 권장한다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단체죠.



발자국 팀 / 강진현(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다니면 다닐수록 고려인이 얼마나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과 비중을 차지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어쩌면 블라디보스토크, 이 연해주를 저희가 왜 와야 되는지를 느꼈습니다.

 

3.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위생상 이유로 개척리의 한인들을 이주하도록 했다. 이에 한인들은 개척리 북쪽 언덕으로 이주해 신한촌을 건설했다. 신한촌은 한인사회의 중심지가 되어 독립운동의 중추기지 역할을 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저희가 묵념을 먼저 드리고, 제가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지역으로 오셔서 독립운동도 하시고, 또 이국땅에 오셔서 많은 설움, 고난 받으시면서 이곳에 터 잡으셨던 많은 우리 고려인들을 위해서 잠깐 묵념을 드리겠습니다. 자 일동 묵념.

 


돌아봄 팀 / 전혜현(연세대학교 사학과): 신한촌 같은 경우에는 그 지역에 새로운 한인들의 마을이라는 그런 이름을 붙여서 그 의지를 가지고, 그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구축을 하셨잖아요. 타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서로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해방 후에 어떤 나라를 꿈꾸면서 살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것 같아서 그 장소가 기억에 남습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항구 가까이에 개척리라고 하는 곳에다가 터를 잡으셨는데, 1911년이 되니까  일본의 압력에 의해서, 물론 이제 명분은 조선인들이 바닷가에 모여서 더럽게 사니까 장티푸스나 전염병을 러시아 사람들에게 옮길 염려가 있다고 해서 아예 집단 이주를 시켜버려요. 집단 이주 시킨 곳이 바로 여깁니다. 이분들이 쫓겨  와서 이름을 지은 이 마을이 바로 신한촌 이예요. 새로울 신(新) 자, 한국에 한(韓) 자, 마을 촌(村) 자. 쫓겨는 왔지만 여기서 새로운 한국을,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 보자는 뜻을 가지고 지은 이름이 신한촌이죠.
기둥 3개의 의미는 뭐냐 하면 3개 중에 하나는 남한, 지금 대한민국. 3개 중에 하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야기해요. 나머지 하나의 기둥은 뭘까요? 바로 고향을 떠나서 해외에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인을 포함한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갖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해외동포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는 표석을 세울 수가 없어요. 왜? 여기 계셨던 분들이 17만 명이 그대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가 되다 보니까 우리는 여기를 비옥한 옥토로 만들어 놨는데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 이주되고 여기가 싹 도시개발이 되는    바람에 흔적이 남아있지 않죠. 게다가 어디가 어디인지 그곳에 살았던 분들의 기억이 전승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디 몇 번지, 어느 지역, 어느 집터, 이런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은 것에서 또 하나의 안타까움을 이곳 신한촌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인학림 팀 / 김성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숙연해지기도 하고, 결국 노력해야 되는 건 보는 쪽 아닌가. 사실 이런 게 보는 사람이 없으면 잊히는 거잖아요. 보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관리가 될 거고.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계속 많이 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 좀 있네요.
(이동 중 욱일기 장식 차량 발견)
돌아봄 팀 / 허유빈(연세대학교 사학과): 실화?!
돌아봄 팀 / 전혜현(연세대학교 사학과): 아, 진짜.
돌아봄 팀 / 허유빈(연세대학교 사학과): 길가다가 이걸 발견할거라고는 진짜. 끔직해.
돌아봄 팀 / 전혜현(연세대학교 사학과): 너무 별로네요.

 

4.
서울거리 2A 번지 판은 신한촌이 과거 한인의 집단거주 구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유일한 증거이며, 국내에는 1992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서울 거리라고 하는 안내판 봤죠? 서울 스카야는, 서울의 길이다, 혹은 서울의 거리다, 이런 뜻인데요, 신한촌에서 거주하시던 그 당시 분들이 서울 스카야에 몇 호에 누가 살았다, 최 아무개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최 아무개뿐만이 아니라 서울 스카야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많이 여기들 살았겠구나 하는  흔적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명인 거죠. 집들이 되게 많았을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지금은 그나마 남아있는 집이 한 집 정도, 빈산에다가 집을 짓고 살라고 하니까 우리가 집 짓고 살면서 거리도 만들고, 거리에다가 우리 조상분들이 서울 거리로 지명도 만들어서 살았던 건데, 지금 지명은 아니고 그 당시 지명이 되겠죠. 


삼삼오오 팀 / 민혜원(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저는 신한촌에 있는 서울 거리가 인상 깊었는데요. 서울 거리에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 한 채가 사라지면 서울 거리도 사라진다고 들었거든요. 관심을 갖고 관리라던가 기억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행일치 팀 / 최수민(경희대학교 행정학과):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더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국민적이나 국가적인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5.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1873-1935) 선생이 말년을 보낸 집터이다. 이동휘 선생은 대한광복군정부와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등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엘레나 상점. 과거에는 이동휘 선생님이 마지막에 돌아가셨던 이동휘 집터. 일단 아쉬운 게 표석이 없어요 표석이. 그런데 집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표석조차 없다는 게 안타깝고요. 그 정도로 방치가 되어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중국이라든지, 관내라든지, 이런 데에 비해서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도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거죠.

 

 

 

 

 

 

 

김시덕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 과장
이동휘 선생은 여러 군데에서 활동을 했고요. 나중에는 초대 국무총리도 했지만, 얼마 전까지는 이동휘 선생이 살았던 집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발견된 지가 얼마 안 되었고요. 이동휘 선생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런 쪽에 많이 연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했던 일정 기간 동안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공산주의 활동을 하고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어떤 업적을 기리거나 독립운동으로서의 사적을 만들어내는데 굉장히 소홀했기 때문에, 그리고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아직 표석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 곧 표석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6.
포석 조명희(1894~1938)는 충북 진천 출신의 대표적인 카프 작가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뒤 우수리스크 부근 육성촌,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한글신문과 잡지 편집을 담당하기도 했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상징하는 교육자이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문학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발자국 팀 / 이규현(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저는 국문학 전공을 하고 있고, 조명희 선생님에 대해서 배우기는 하지만, 사실은 전공자들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점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사실 일정표 받았을 때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생각 외로 굉장히 알려지지 않고 초라하고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실제로 많이 안타까웠어요.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소련으로 1920년대 후반에 망명을 옵니다. 의식적으로 망명을 해오는 거죠.   지주와 소작농의 모순이 있고 피지배 민족과 지배 민족의 모순, 이중 모순이라고 하는데 그 두 가지를 풀기 위해서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게 소련이었던 것  같아요. 이 분 역시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는 그 당시에 일본의 스파이다,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합니다. 이 분이 가장 최근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어요. 올해 3월에, 2019년 3월 1일에 받았어요. 가장 최근에 서훈이 된 분인데, 이곳은 개인 사유지가 되어가지고 우리가 가볼 수가 없대요 지금. 엘레나 상점도 그렇고 서울 거리에 있는 집터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다 중요한 독립운동의 현장이긴 하지만 개인 사유지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직접 만져볼 수가 없는 상황인데 30년대 40년대에, 특히 30년대에 국내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한 분들 웬만하면 다 서훈을 받았어요.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서훈을 못 받는 기준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최근에서야 뒤늦게 받았다는 것에서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거죠. 정말 이 지역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정말 그동안 너무 없었다고  하는 점이 다시 한 번 알려지게 됐고.

 

해인학림 팀 / 최진영(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우리 역사와 관련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많은 지원을 받아서 잘 정리가 되어있고 가꿔져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개인 사유지에 있어서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리고 생각보다 길거리 한복판에, 도로변에 있어가지고 접근하기가 힘들다거나 옆에 차가 다녀서 오래 머물기가 힘들다거나 하는 점들이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대부분들 상해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 중국 쪽으로 많이 독립운동 답사를 가는데 오히려 이 연해주 쪽 지역도 중국 못지않게 독립운동의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이 연해주 지역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또 학생들과 함께 탐방하게 되어서, 그 점에서 너무 뜻깊다고 생각을 합니다. 

 

발자국 팀 / 조경혜(서경대학교 아동학과): 과거의 100년부터 지금의 100년까지 이어가는 그런 발자취 자체가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 없어지면 저는 사실 끊긴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희에게만 이렇게 끝맺는 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100년 전에, 200년 전에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아픈 일은 잊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또 어떻게 전달할지 우리가 함께 고민해보면서 이것이 좋은 역량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7.
1918년 이후 이곳에 일본군 병영이 있었으며, 이곳에 있던 일본군들이 1920년 4월 신한촌 일대의 한인들을 급습하여 몰살시켰다. 또한 신한촌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1937년 강제이주 당한 역이기도 하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일본군이 1920년 4월에 참변을 일으켜요. 4월 참변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때 조선인, 우리 한인들이 많이 죽어요. 상당히 많이 죽어요. 그 희생당할 때 출동한 부대가 바로 이 역에 주둔했었죠. 부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이 다 군부대예요. 역 자체가 군부대기 때문에 이 역에서 주둔하던 일본 군대가  출동해서 한인 마을들, 우리가 아까 봤던 신한촌이라든지 우리 걸어왔죠. 아주 가까운 거리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한촌에서 학살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17년이 지나갔어요. 그때부터 러시아에 스탈린이 들어와 가지고 강제이주를 시키는 역이기도 합니다 여기가. 4월 참변에 의해서 많은 한인들이 일본 군대에 의해서 희생당한 그 부대가 출동한 역이기도 하거니와, 스탈린   체제에서는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 이주를 당한 슬픔의 역이다. 두 가지의 비운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는 곳이 바로 이 역이 되겠습니다.  

 

언행일치 팀 / 박연수(경희대학교 행정학과): 그 기차에 탔던 우리 고려인들이 우리가 앉는 일반적인 침대석이나 의자가 아니라 정말 창고 같은 그런데 앉아서 두 달을 먹을 것도 없이 갔다는 것에 있어서 너무 비통했고.

 

8.
1920년 4월 참변 때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러시아인과 한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자 다 같이 묵념.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이 있었죠. 그때부터 소비에트 정권 시작이 아니고, 혼란기죠.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붉은 군대,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싫어했어요. 가장 반대했던 사람들이 또 일본입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에요. 5년 동안 계속 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지는 거죠. 그 전쟁에 일본인들은 백의파, 하얀 군대, 차르군대를 응원했던 거고, 죽이고 죽이는 공방전 상황에서 1919년에 바로 한국인들이 열심히 만세운동 벌여가지고 일본인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에는  붉은 군대와 한인들이 같이 공동운명체가 된 거죠. 그 와중에서 내전중이니까 당연히 일본인 민간인도 죽게 되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도 미워 죽겠는데, 명분이 마침 생긴 거에요. 러시아에 있는 일본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그래서 보복 차원에서 우리가 군대를 대규모로 출동시킨다, 라고  한 게 바로 1920년 4월 참변이 되는 거죠. 그래서 1920년 4월에 참변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역시 또 러시아인 붉은 군대뿐만 아니라 우리 한인들도 대량으로 학살을 당한 것이 바로 4월 참변입니다. 

 

9.
일본 총영사관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항일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일본의 대표적인 기구로 지하에는 한인독립운동가들을 투옥했던 감옥이 있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이쪽 건물,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건물이거든요. 여기가 일본 총영사관 건물이죠. 연도가, 우리가 강화도조약 체결한 때가 1876년이죠? 그때 이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무역사무소로 처음 출발했다고 해요. 이 건물 보시면 오른쪽 정문 위에 무늬가 있는데 국화꽃무늬에요. 여기에도 영사관을 볼 수 있고, 용정 있잖아요. 만주 길림 용정시, 거기 가도 총 영사관 건물이 아주 크게 있어요. 그리고 북경에 가도 일본 총영사관 건물이 남아있어요. 거기서 명목상으로는 일본인들, 범죄를 저지른 자국민들을 가둬놓는 감옥이 다 있습니다 지하에. 그렇지만 일본인들만 감옥에 넣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도 비밀리에 잡아다가 고문하고 조사하고 감옥 보낸 곳이 이 총영사관이에요. 보나 마나 지하에 감옥 있을 거에요. 이육사 선생님도 독립운동하시다가 북경에서 잡혀요. 그리고 어디서 돌아가시냐 하면 북경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돌아가세요. 겉으로는 일본인들을 위한 외교활동과 교민 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잡아가고 밀정들을 파견해서 밀정들이 신한촌까지 와서 첩보활동을 해요. 신한촌에서 3.1운동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러시아 정부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일 만세운동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걸어서 어디로 갔겠어요? 여기에요. 일본 물러가라. 일본 총영사관이 여기 있기 때문이죠. 신한촌에서 걸어서 항일운동, 만세운동을 벌일 때 최종 목적지가 여기가 되는 거죠. 



10.
1937년 스탈린의 철저한 계획 아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집단 이주 시켰던 역이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여기에는 우리밖에 안 오는 이유가 있죠, 왜? 우리의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이 오는 거죠. 그분들이 다 이 철도를 타고 간 거예요. 그런데 갔을 때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어요. 그냥 잠깐 가나 보다, 전쟁이나 사변 일어나서 잠깐 가나 보다 해가지고 짐 보따리를 챙기지 못했어요. 만약에 카자흐스탄까지 간다고 했으면 이불도 챙기고 솥단지도 챙기고 그릇도 챙기고 또는 씨앗, 우리가 벼농사를 지었으니까, 씨앗 같은 것도 챙겨서 왔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맨몸으로 간 거에요, 맨몸으로. 가다가다 죽는 거죠.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한 만 명 정도가 죽었고, 만 명 정도가, 그다음에 도착은 했지만 이미 병에 걸렸잖아요. 한두 달 정도 기차 타고 왔으면. 그러니까 그   다음에 또 7천 명 죽고, 그 다음에 한 5천 명 죽고 이런 거죠. 그래 그래서 어찌어찌 카자흐스탄까지 가신 거죠. 그것도 기적 같은 거죠. 

 

 

춘래불사춘 팀 / 김태민(전남대학교 원예생명공학과): 이 사진이 이렇게 보시면... 이렇게 추측은 하고 있습니다. 여기 와서 직접 보니까 그때 당시에 여기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 열차를 타라고 해서 그냥 타고 끌려가면서 친척들도 죽고 결국 도착한 곳은 황무지고 지금까지 살아계시는 게 저는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춘래불사춘 팀 / 여채훈(전남대학교 원예생명공학과): 진짜 멀리 왔다.
춘래불사춘 팀 / 김태민(전남대학교 원예생명공학과): 그렇지. 저는 그중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있는)아흐마드야싸비라는 고려인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가서 고려인 할머니들이 제가 엄청 대단하다고 느꼈던 게 그분들은 다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가지고 계신 우즈베키스탄인인데, 자신의 손자에게도 계속 한글을 가르치면서 지키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게 엄청 멋있었어요. 할머니분들께서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그것을 충분히 포기하셨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계속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계속 자손들한테 한국을 가르치고 한국의 문화를 가르쳐 가는 모습이 저로서는 엄청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돌아봄 팀 / 김희연(연세대학교 사학과): 강제 이주의 역사를 따라갈 수 있는 공간들이 저는 굉장히 인상이 깊었는데 아무래도 강제 이주됐다는 역사를 좀 더 피부에 와 닿고 실감할 수 있는 부분에서 아주 인상 깊은 경험이었고, 그런 강제 이주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질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고려인 역사관도 저에게 크게 와 닿았던 거 같아요.

 

11.
한인이주 140년을 맞아 2009년 동북아평화연대의 지원으로 고려인문화센터 1층에 설립된 역사관이다. 2016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이 전면 보수하여 재개관했다.

 

발자국 팀 / 이규현(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에 관한 팻말 중에서도 ‘아이가 굶주림과 괴로움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 죽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열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창밖으로 던지는 것 밖에 없었다’ 라고 써져있더라고요. 그 부분이 제일 안타까웠던 게,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한 명 두 명의 역사에만 집중을 할 뿐이지 창밖으로 죽은 시체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혹은 죽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은 알지 못하잖아요. 

 

김시덕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 과장
전로한족중앙총회라던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최상위의 이야기만 하고 있거든요. 이들을 지탱하고 있었던 밑에 엄청나게 많은 한인들, 몇 십만 명이 되었든 백만 명이 되었든 그 한인들의 경제적 토대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도 그렇고 여기 전로한족중앙총회라던가 대한국민의회라던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누가 지지해주고 그 운영을 누가 담당했느냐 라는 거죠.  

 

돌아봄 팀 / 김희연(연세대학교 사학과): 그러한 역사를 잊지 않을 수 있겠다는 그런 희망을 저는 봤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지금도 잘 되어있지만, 더 노력해서 더 많은 것들을 조성하면서 또 앞으로의 100년에 있어서 그러한 역사들을 토대로 화합을 할 수 있는, 재외 동포들과 우리나라에 있는 역사들을 모두 화합할 수 있는 그런 100년이 앞으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12.
1913년 소련지역 한인들이 설립한 사범대학으로 당시 해외에 있던 유일한 조선인 대학이었다. 1937년 강제이주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여기는 고려사범대학 자리라고 해요. 조선인들, 고려인들이 만든 최초의 해외에서 만든 학교, 대학교가 되겠죠. 학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래서 학교는 단순히 교육을 시키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독립 군자금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기부처, 모금처가 되는 거죠.  

 

춘래불사춘 팀 / 양수영(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됐어?) 옛날 사진이랑 비교해보려고 제가 준비해 왔어요. 감독님이 또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으시니까요.
춘래불사춘 팀 / 여채훈(전남대학교 원예생명공학과): 이번에 사진을 준비해서, 이런 옛날 사진에 비해서 어떻게 현실에서는 변했는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탐방을 진행했어요. 생각보다 많이 보존이 안 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었고 이게 뭐다, 이게 어떤 유적지라는 것을 알기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었고.

 

13.
강제이주 이전, 계봉우 등 지식인들이 교사로 활동하며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던 학교이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아까는 고려 사범학교였고, 대학교 과정이고, 여기는 모범 한인 중학교, 중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권현준(현지가이드): 맨 처음에 8호 중학교로 발표되었던 곳이 이쪽이고요, 책자 안에 있는 그 사진 있잖아요, 그 사진은 이 뒤편으로 10분만 넘어가면 골목 안에 있는 집입니다. 그게 왜냐하면, 지금 갖고 있는 지번이랑 옛날에 문서상에 남아있던 지번이랑은 굉장히 다른 상태거든요. 지형도 많이 변화하고.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지 않으니까 옛날 자료를 토대로 해서 이 근처에 뭐가 있었고, 그걸로 유추해서 여기가 거기일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해인학림 팀 / 김성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렇게 그 100년의 의미라는 게 이곳이 역사적으로 중요했고 한때 잊혔지만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100년의 의미이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라고 느꼈습니다.

 

14.
1917년 고려족 중앙총회에서 설립한 학교로 1920년 일본군에 의해 4월 참변으로 폐쇄되었으나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 정식 설립되고 강제이주 전까지 운영되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고려사범전문학교. 교사 양성하는 학교인데. 기록에 의하면 1917년도에 만들어졌어요. 고려족중앙총회에서 돈을 모금했습니다. 성금을 모금해서 1917년에 만들었는데 한 3년 정도 운영되다가 일본에 의한 4월 참변 때 학교가 폐쇄되죠. 소련 정부가 확실하게 들어선 20년대 중반에 다시 학교를 복원을 해요. 그런데 또 다시 학교가 폐쇄돼요. 또 언제 폐쇄될까요? 1937년도에 강제이주당할 때 또 폐쇄가 돼버리죠. 그래서 이제 없어졌어요. 그 당시 세계정세, 세계사적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학교라고 할 수 있죠. 조명희 선생님, 조명희 선생님이 이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답니다. 이 지역은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인 현장이기는 한데 지금은 흔적이 없는. 지금은 흔적이 없는 곳으로 되어있습니다.  

 

돌아봄 팀 / 허유빈(연세대학교 사학과): 저는 아쉬웠던 점이 연해주에서 굉장히 다양한 교육 활동이 있었는데 그런 학교 터들이 전부 다 건물이나 원래 모습은 사라진 채 그 위에 다른 건물이 세워지고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모습이었던 점이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했을 때 역사라는 것이 기억되고 전달되려면 그것의 바탕이 되는, 그렇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바로 교육 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활동의 산실이었던 곳들의 제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게다가 심지어 어떤 곳들은 위치도 정확하게 모르고 이 부근이다 이런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는 부분들이 있어서 참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15.
소련지역에서의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1918년 6월 제2차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통해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인 1919년 3월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여기는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었던 장소이죠. 총회를 결성했던 회합장소가 되는 거죠.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니까 사회가 혼란스럽잖아요. 여기가 누가 주인이 될지 모르잖아요. 빨간 군대가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다시 하얀   군대가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정치적 공백기가 이 지역에 발생해요. 그 정치적 공백기가 되니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야 되겠다 라고 해서 결성하는 게 바로 전로한족중앙총회. 전로라고 하는 건 뭐예요. 전 러시아. 러시아 전체에서의 한족, 우리들의 총 모임이다, 이런 뜻이죠. 3.1운동 당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데, 상해에다가 임시정부를 만들까 노령에다가 만들까, 상식적으로는 노령에다가 만드는 게 맞아요. 왜냐하면 10만 명의 한인들이 있는데 여기에. 양보하자, 그 결의를 하는 거죠. 양보하자. 그래서 우리가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하겠다 그런 결의도 하는데, 2차 회의에서 합의를 해요. 가자. 그래서 우리가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자. 라고 하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돌아봄 팀 / 김희연(연세대학교 사학과): 연해주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활동을 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상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안타까웠고 상해만큼 친근하게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역사 서술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
최재형 선생(1860~1920)은 한인 사회를 이끄는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권업회 총재, 임시정부 초대 재무국장을 역임했다. 1920년 4월 참변으로 순국하였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이게 페치카예요. 붙박이 난로, 벽에 있는 붙박이 난로를 페치카라고 해요. 최재형 선생님에게 페치카라는 별명을 우리 한인들이 붙여준 건데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의미죠. 여기 보이시죠? 동의회가 있어요. 이범윤도 우리가 또 기억해야 되는 인물이에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는데, 이범윤 선생이 군인이셨습니다. 이분이 이쪽 지역에 넘어와 가지고 내가 다시 한 번  전열을 정비해서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격작전을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때 이범윤 선생 밑에 안중근 의사가, 우영장이었거든요. 최재형 선생 같은 경우에는, 이분(이위종 선생)도 와서 의탁하고, 헤이그 특사 중에 한 분이죠, 또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도 그렇고 최재형 선생 밑에 둥지를 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잖아요. 1860년생이신데 노비 출신 아닙니까. 노비 출신이에요. 이 조선을 싫어할 만한데 민족의식이 어떻게 살아계셨나 봐요. 그래서 다시 나라를 찾겠다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하셨는데 1920년에 돌아가세요. 바로 그 4월참변 때 돌아가시게 되는 것이죠. 이분이 이 집에 사시다가 총살당하십니다. 우리가 홍범도라든지 안중근이라든지 이위종 이범윤을 또 유인석까지 포함해서, 기념할 때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바로 최재형 선생이셨다. 이런 생각도 우리가 해볼 수 있겠습니다.
또 전로한족중앙총회라고 하는것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그것이 바로 대한국민의회가 되어서 최초의 임시정부가 되는 거예요. 최초의 임시정부가 되는데 또 거기서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최재형이니까 정치적으로는 이동휘, 경제적으로 최재형, 이 두 분이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기억을 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워낙 함경도 출신인데다가 1920년에 돌아가시고 그러니까 그 존재가 한국에서는 대부분 잊혀있는, 대부분 잊혀있는 인물로 지금 남아있는 안타까움이 있죠. 

 

해인학림 팀 / 김성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위종 선생님, 이상설 선생님,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들어왔는데 경제적인 방면에서 이렇게 지원을 해주신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바가 없었어요. 고택 와서 보니까 돈을 많이 축적한 한인이 독립운동에 이렇게 지원을 많이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현실적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지원을 해주신 것을 보고 되게 본받을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번에 새로이 깨달았습니다.
해인학림 팀 / 최진영(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할 수 있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셨다는 사실도 저는 굉장히 놀라웠고, 4월 참변으로 돌아가시게 된 것도 굉장히 안타깝고, 그래서 저는 그분을 통해서 이 연해주에서 있었던 우리 동포의 고난과 그리고 시련과 그리고 그분들이 겪었던 삶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발자국 팀 / 강진현(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지난 100년 동안,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들이나 재일 동포, 재미 동포, 그 외 여러 재외 동포에 대해서 이분들의 피와 노력과 땀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이 중에서 특출난 인물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특출난 인물만 부각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이분들을 기억하는, 그래서 오히려 이분들을 욕보이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부 사람들만 기억하기보다는 이제는 앞으로 100년은 이분들 모두를 기억하고 기리면서 나아가는 게 더 옳은 방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삼오오 팀 / 김지연(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저는 거기서 최재형 선생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연해주에서의 한인들의 사진을 봤어요. 학교에서 찍은 단체사진도 그렇고. 그 얼굴들을 되게 유심히 봤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말로 들었던, 이 사람이 뭘 했고 뭘 했고 이런 것도 좋았지만, 여기에 정말로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 이 땅에서도 다 농사짓고 배우고 그러면서 살았구나. 이거를 느꼈던 것 같아요.

 

17.
이상설 선생(1870~1917)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알리고자 하였다. 성명회, 13도 의군, 권업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다 작고하여 수이푼 강에서 화장 후 재를 뿌렸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및 해설
​얼마나 슬퍼요. 황제의 명령(헤이그 특사)을 수행도 못했고, 나라를 되찾지도  못했고. 그때는 선비정신이 살아 있었던 거죠.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안 된다. 후세들에게 보이기에 나는 못난 조상이다. 나는 뜻을 못 이뤘으니까  나는 역사에서 지워져야 돼’ 라고 해서 자기의 시신을 또는 자신이 남겼던 많은 글들, ‘내 손때가 묻은 모든 것을 다 불태워 버려라’ 라고 유언을 남겨요. 그리고 자기 뼈를 이 강에다가 뿌려라, 그래서 여기 세운 거예요. 반드시 여기서 뿌렸다는 건 아니고, 이 강 어딘가에 뿌렸겠죠. 그렇지만 여기다가 우리가 유허비를  세운 겁니다. 유허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에요 뭐가. 아무것도 안 남아있어요. 이곳 어디다 라고 해서 유허비를 세웠어요. 되게 뒤늦게 세운 겁니다 이것도.  

 

 

춘래불사춘 팀 / 여채훈(전남대학교 원예생명공학과): 성공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런 노력들이 사라졌다는 것에서 참 마음이 아팠고, 이게 꼭 어떤 성공이라는 결과가 있어야지만 그게 역사로 남아야 되나 그런 생각도 한번 하게 되는….
돌아봄 팀 / 전혜현(연세대학교 사학과): 그 당시에 이상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도 분명히 역사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생각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이상설 선생님이 어떤 가치를 지닌 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해 오셨는지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같은 것을 좀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시덕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 과장
학생들이 이러한 곳이 이 연해주 지역에 있었다. 이들의 역사가 있었고 그들의 고생이 있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현재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알고 싶어 하는 희망, 욕구, 이런 것들이 굉장히 크다고 느껴져서 이번 탐방이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인학림 팀 / 김성준(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비관적인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정비가 물론 조금 부족하고, 관리가 조금 부족한 느낌도 받았지만 한국인들이 계속 찾고 있잖아요. 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탐방하면서 정말, 우수리스크 같은 외지에 있는 장소들에도 사람들이 다 있는 것을 봤고 계속해서 찾아올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지금 조금 정비가 안 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찾아오면 개선되고 긍정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느껴져서 비관적이라기보다는 희망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발자국 팀 / 이규현(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제 이주의 피해자로 보는 관점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물론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저희가 여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마주했던 실제적인 역사에서 그분들이 직접 이뤄냈던 것 그리고 사실은 더 염원했던 것 더 나아가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 모든 것들을 단순히 강제 이주의 사실에 묻혀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좀 안타깝게 느껴져서 이제는 좀 더 그분들이 이뤄냈던 성과, 업적, 염원 이런 것들을 좀 더 관심 있게 비중 있게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삼삼오오 팀 / 김지연(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더군다나 그때는 이제 굶주림과 학정을 피해서 떠나는 사람들이었잖아요. 신한촌, 또 그들이 만들었던 많은 단체들과 정부도 다시 만들잖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왜 이 사람들이 떠나와서까지 왜 마지막까지 자기 나라라고 지키고 싶어 하고 또 계속 자기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고 싶어 했을까. 러시아 사람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면 조금 덜 힘들게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자기 정체성의 일부라면 조선인이라는 것이, 그것을 포기하는 게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명주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 학예연구사
이 행사 자체는 학생들에게 뭔가 고민의 기회를 주고 학생들이 생각하고 본인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미래세대를 향한 투자처럼 생각을 했던 거였는데 우리가 준비한 것 이상으로 학생들이 이 지역에서 새로운 많은 자극을 받아 가고 다양한 방면에 대해서 뭔가 계획하는 것을 보고, 참 뜻깊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발자국 팀: 지금까지의 블라디보스토크, 모두 잊으세요.
춘래불사춘 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장소입니다.
삼삼오오 팀: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하는 우리 역사
돌아봄 팀: 주의! 연해주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해인학림 팀: 러시아 외지 땅에서 고생하셨을 우리 동포들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행일치 팀: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곳이 많으니까요, 꼭 보러 와주세요. 우리 모두 기억해요~